21화.
파티션이 앞뒤로 놓여 있고, 커튼으로 완전히 가려진 자리.
지한과 전경우 이사가 마주 앉았다.
잠시 후 따뜻한 블랙커피를 담은 찻잔 하나와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담은 유리컵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지한이 설탕 봉지를 뜯자 맞은편에 앉은 전 이사가 의아한 듯 말했다.
“커피를 그렇게 마시는 사람은 처음 봤네만.”
“다음에 드셔 보세요. 의외로 맛있습니다.”
“난 차가운 커피는 영 별로라. 상상만 하겠네.”
지한은 대답 없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별 성과 없는 얘기는 이쯤 하자는 듯.
잡담은 충분히 나눴다. 가벼운 근황, 그룹사 전반적인 이슈, 지한이 몸담은 계열사의 남해 리조트 공사 진행까지도.
커피가 나왔으니 이만 영양가 풍부한 본론으로 들어갈 차례였다.
선을 긋는 지한의 반응에 전 이사도 동의했다.
외딴곳에 있는 낡은 카페까지 불려 나온 마당에 커피 취향이 궁금할까.
“그래서, 만나자고 한 용건이 뭔가.”
“힘 좀 보태 주셨으면 해서 뵙자고 했습니다.”
“힘?”
“강 회장님. 제 아버지, 우상전자, 더 나아가 우상그룹에서 물러나실 수 있게 힘 좀 실어 주셨으면 합니다.”
전 이사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지한을 조금 짠한 시선으로 보며 대답했다.
“예상은 했네만, 정말 그 제안을 할 줄은 몰랐군.”
“회사가 참 많이 변했습니다. 조금 더 지나면 늦을지도 모르고요. 마침 저도 곧 우상전자로 복귀하니 지금이 최적의 시기입니다.”
“그래?”
지한의 우상전자 복귀는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전 이사가 되물었다.
“제 외조부가 우상전자 주식 상당 부분을 가지고 있는 건 알고 계시겠죠.”
“그래. 알다마다.”
“외조부께서 아버지께 제안하셨습니다. 우상전자 주식을 아버지께 상속할 테니 절 우상전자로 복귀시키는 게 어떻겠느냐고요. 아버지가 받아들이셨습니다.”
지한은 자신의 결혼이 우상전자 복귀의 필수 조건이라는 건 얘기하지 않았다.
이 일에 해주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혹시 우상전자 복귀를 약속받고 하는 정략결혼이라는 게 알려지게 된다면, 물어뜯기 좋아하는 회사 내부자들이 해주의 신상을 캐려 할 것이다.
지한의 앞길에 방해가 되는 것뿐 아니라, 사채업자로부터 숨고 도망치기 바쁜 해주의 삶이 원치 않게 세상에 드러나게 될지도 몰랐다.
“이런 얘기를 나한테 해도 되겠어? 나를 믿나.”
“믿는다고 얘기할 순 없겠지만, 20년 넘게 봐 온 분이니 신뢰합니다.”
나쁘지 않은 대답이었는지 전 이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님 물러나게 할 방법은 있고? 우상전자 주식. 회장님 손에 들어가면 더 큰일이 아닌가.”
“우선, 보여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보여 주고 싶은 거?”
전 이사가 되묻자 지한은 입매를 가볍게 올려 웃고는 말했다.
“정 비서, 가지고 들어와.”
지한이 목소리를 크게 내어 말하자, 커튼이 열렸다.
옆 테이블에서 대기하고 있던 윤이 테이프로 칭칭 감은 몸만 한 상자 하나를 든 채 모습을 드러냈다.
지한은 전 이사 앞으로 손짓했다.
“이사님 앞에 놔 드려.”
“네, 전무님.”
지한이 시키는 대로 테이블 끝에 상자를 내려놓은 윤은 다시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하곤 자리를 피해 주었다.
잠시 적막이 흘렀다. 묘하게 불편한 기운마저 흘렀고, 이내 먼저 입을 연 건 지한이었다.
“열어 보시죠.”
가만히 상자를 노려보던 전 이사의 표정이 별안간 구겨졌다.
“강 전무. 사람 잘못 봤어. 나는 한배를 타자는 줄 알았지, 차기 회장으로 밀어 달라는 부탁인 줄은 몰랐네. 그런 자리인 줄 알았다면 안 나왔어!”
호통치는 전 이사의 얼굴 위로 실망 가득한 표정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도 그럴 것이, 전 이사는 늘 확신했었다. 차근차근, 업무 성과로만 존재감을 드러내던 지한은 욕심 많은 지 아비와 다를 거라고.
한데, 이게 뭔가.
눈앞에 놓인 건 다름 아닌 사과 박스였다. 목적이 분명해 보이는.
그러니 저를 우습게 봤다고 생각해 자존심도 상했는지 얼굴이 붉게 상기됐다.
지한과 전 이사 사이에 긴장감이 흘렀다.
그러나 오래가진 못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기 전, 지한이 먼저 표정을 풀었으니까.
언뜻 그의 표정엔 전 이사의 말이 재밌다는 기색이 스치기도 했다.
“일단 열어 보세요. 확인하고 화내셔도 늦지 않습니다.”
그래도 전 이사가 노려만 보고 있자, 지한은 자신 있다는 듯 입매를 올렸다.
“분명 마음에 드실 텐데요. 저 믿어 보시죠. 좋은 기회 놓치지 마시고요.”
이번엔 전 이사가 조금 누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지한의 말투와 표정을 보니, 단순히 뇌물을 건네는 게 아닌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제야 그는 손을 뻗어 상자를 제 앞으로 가져왔다.
상자에 붙은 테이프를 제거하고 뚜껑을 연 전 이사는 이내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뱉었다.
“이게 뭔가.”
돈다발이 아니었다. A4 사이즈의 종이 뭉치들이 상자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보시다시피 서류입니다. 복사본이고요.”
괜히 오해하고 역정을 냈던 전 이사는 머쓱함에 지한을 다그쳤다.
“아니, 이 사람아. 사과 박스에 담아 오면 어떡하나!”
“긴장 좀 풀리셨습니까?”
지한이 입매를 끌어 올리자 전 이사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 거참. 강 전무, 자네 이런 성격이었나? 내가 자네 본 세월이 긴데, 여태 뻣뻣한 사람인 줄만 알았는데 말이야.”
“가까운 사람들한텐 자주 농담도 합니다. 물론.”
지한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전 이사님 반응이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돈인 줄 알고 반색하시면 도로 가져갈 생각이었습니다.”
“날 시험했다는 건가?”
“신중하게 파악하고 싶었습니다.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지한이 태연히 사과하자, 전 이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상자 속을 뒤적였다. 그러곤 가장 두툼하게 묶인 한 묶음의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가 몇 장 휘리릭 넘기며 혀를 찼다.
“참. 누가 이렇게나 해 처먹었나.”
“맨 앞 장 다시 보시면 아시겠지만, 우상 백진호 사장님입니다.”
“백 사장 혼자?”
“원래 간이 크신 분이죠.”
“하. 이걸 어떻게 여태 감춘 건지. 그것도 대단한 일이구만.”
전 이사가 비꼬듯 말했다.
지한은 상자로 손을 뻗어 비교적 얇은 한 묶음의 서류를 집어 들며 대꾸했다.
“아버지 측근이니까요. 가족이 법조계에 있기도 하고, 우상케미컬은 가장 관리가 안 되는 계열사니 좀 쉽기도 했겠고요. 이건 우상전자 김성조 이사님 겁니다.”
지한이 내민 서류를 받아 들며 전 이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지한이 언급한 인물은 검소하고 사람 선하다며 칭찬이 자자했기 때문이었다.
“대체 이 자료들은 어디서 난 건가?”
“황철규 케미컬 부사장님. 원래는 그분이 장부로 전부 수기 작성하셨던 것들입니다. 이건 장부 세 권을 복사해서 인물별로 묶어 둔 거고요.”
지한의 말에 전 이사가 미간을 좁혔다.
“황 부사장이 모았다고? 이것들을 전부? 아니, 그 양반이야말로 회장님 측근이잖나.”
“모든 일이 자기중심으로 돌아가야 직성에 풀리는 분이잖습니까. 수틀릴 때를 대비하신 거죠.”
지한의 말에 문득, 전 이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강 전무는 서류를 어떻게 손에 넣은 거야? 부사장이 순순히 넘겨줘?”
지한이 가볍게 웃음 지었다. 제가 생각해도 참 어이없다는 듯.
“제가 술을 잘 못해서 몰랐는데, 술이 참 사람을 쉽게 만들더군요.”
지한은 어깨를 으쓱이곤 말을 덧붙였다.
“자기애가 높은 분이니 그 점도 이용했고요.”
황철규 부사장.
지한이 그에게 비리 관련 자료가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넉 달 전, 리조트 개발 팀원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회식 장소로 택한 소고기 전문 식당. 그곳에 마침 황철규 부사장도 가까운 사람들이랑 왔었다.
황철규는 그때 룸을 잡고 식사를 했는데, 공교롭게도 그곳이 식당 뒷문과 가까웠다.
식당 뒤뜰에서 전화 통화를 하고 자리로 돌아가던 길, 지한의 귀에 허세를 부리느라 목소리를 키운 황철규의 말이 선명히 들려왔다.
‘그 새끼들 결국 다 내 발아래 있어. 알아서들 골고루 헛짓거리하고 다니니 내 장부에 잉크 마를 새가 없다니까. 병신들. 암튼 폭탄끼리 아주 잘도 뭉쳐 다녀. 백 사장 그 새낀 내가 꼭 조져 준다. 사람 개무시나 하고 말이야. 어디 더 해 보라 해. 핵급으로 아주 크게 터뜨려 줄 테니까.’
지한은 얼큰하게 취한 목소리를 들으며 웃었다. 표정은 실소에 가까웠지만, 속은 희열감으로 가득 찼다.
강 회장도 마찬가지라. 황철규 주위에 아버지 말고 다른 강 회장이 있을 리는 없고.
장부라…….
황 부사장은, 강 회장 라인을 타고 케미컬 부사장까지 올라왔다.
때문에 강 회장의 충실한 개 역할을 자처하고 있었는데, 회장이 바뀐다면 언제든 새로운 줄을 잡아 아부할 준비가 돼 있는 줏대 없는 인물이기도 했다.
장부엔 어떤 내용이 든 거지? 횡령, 상납 그런 것들? 아버지 이름도 적혀 있을까.
없다 해도 상관없었다. 아버지 라인 사람들이 줄줄이 엮여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버지의 자질을 논할 수 있으니까.
장부를 손에 넣는 건 쉬웠다.
요즘 케미컬 백진호 사장과 황철규 부사장 사이가 틀어졌다는 얘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2주마다 있는 골프 모임에 황 부사장만 빠진다고.
그 점을 노렸다.
윤을 시켜 황철규 부사장에게 접근하게 했다.
윤은 황철규에게 말했다.
‘전무님께서 백진호 사장님과 척진 건 알고 계십니까? 전무님은 부사장님께서 한배를 타 주시길 바라십니다. 어차피 차기 회장은 전무님 아니시겠습니까. 부사장님 아드님께서도 케미컬 다니시죠. 다른 계열사 더 높은 자리, 탐나지 않으십니까?’
황철규는 일주일 만에 윤의 제안에 응답했다.
지한과 술 한잔하고 싶다는 그의 말에 지한은 은밀히 그의 집에서 대화하길 청했다.
그 뒤는 순조로웠다. 뭐든 한번 경험해 본 건 두 번째가 더 쉬운 법이니까.
윤해주가 했던 대로.
지한은 그를 감언이설로 취하게 만들고 집에 있던 장부 위치를 파악했다.
그리고 황철규의 말을 교묘히 녹음했다.
‘한배 타니까 내가 강 전무한테 이 장부 주는 거야.’
지한의 선창에 황철규가 따라 했다. 좀 웅얼거리는 목소리였지만 내용은 확실했다.
아침이 됐고, 상황을 파악한 황철규가 화를 냈지만 이미 늦었다. 장부는 빼돌린 뒤였으니까.
시간을 되돌릴 수도, 장부를 되찾아 올 수도 없어 분노하던 황철규는 나중엔 빌었다.
장부는 넘길 테니 출처는 비밀로 해 달라고.
현명한 선택이었다. 강 회장의 측근이었으니 그만큼 그의 성정도 잘 알 터였다.
강 회장은 자신에게 해가 되는 사람은 가차 없이 부숴 버린다. 그러니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까 두려웠을 것이다.
비밀로 하는 조건으로 황철규는 지한의 편에 서기로 했다.
아마 지한과 한배를 타기 위해 자료를 넘긴 거라고, 그렇게 자기 위로를 하는 모양이었다.
[결혼 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