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새벽 6시 반. 창밖에 어스름이 내려앉았다.
몸이 알람 시계라도 되는 건지, 지한은 늘 그렇듯 같은 시간에 눈을 떴다.
평소였다면 몸을 곧장 일으켰을 거다.
침대에서 일어나 샤워를 하고, 아침 식사를 하고 출근한 뒤엔 설탕 넣은 커피 한 잔으로 정신을 또렷이 차리는 것.
10년 넘게 유지하고 있는 그의 본격적인 업무 시작 전 루틴이니까.
그러니 이른 기상에 절대로 피곤할 리가 없는데, 어젯밤엔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가.
눈에서 잠이 달아나지 않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침대에서 상체만 일으킨 지한은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다 그는 문득 미간을 좁히고 탄식하며 눈을 감았다.
조금 뒤 다시 얼굴에서 손을 뗐다. 입가엔 실소가 지어졌다.
불현듯 지난밤의 기억이 떠오른 탓에.
‘그럼? 그때 왜 나랑 잤습니까.’
‘결혼 후에 방을 합치면, 그때도 어쩌다 자게 되나?’
지한은 희미한 대화를 곱씹었다. 해주의 대답은 확실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제가 했던 말은 또렷하게 떠올랐다.
하필 잠자리를 말했을 줄이야. 지난 얘기에 그치지 못하고 술김에 욕망도 내비쳤고.
“한심하긴.”
여태 윤해주와 잔 적도 없는 놈처럼 굴었으면서. 술 좀 취했다고 풀어졌다.
이윽고 떠오르는 또 다른 말.
‘웨딩드레스. 그때 말 못 했는데, 예뻤습니다. 더 많이 입은 모습 봤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울 만큼.’
“별 얘길 다 했네.”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이 예쁘다는 건, 숍에 피팅하러 갔을 때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이었다.
그날 해주는 정말 예뻤으니까.
솔직히 눈을 뗄 수 없었다. 웨딩드레스를 입힌 채로 제 앞에 오래 세워 두고 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끝내 칭찬 한마디 하지 않았던 건, 가벼운 칭찬 한마디도 해서는 안 되기에.
스스로 걸려들 아주 작은 덫도 깔아 놓고 싶지 않았다.
더 떠오르는 실수는 없다. 필름이 끊긴 것은 아니니 실언은 거기까지인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한 지한은 이만 몸을 일으켰다.
어제의 주정이 탐탁지 않았지만, 이미 벌어진 일. 돌이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곱씹어 봤자 시간 낭비만 할 뿐이었다.
윤해주는 어차피 어젯밤 일에 대해 먼저 얘기를 꺼낼 수 없다.
제가 먼저 꺼내지 않는다면 그냥 없던 일처럼 지나가는 것이다.
그러니 몇 번이고 곱씹으며 자책할 필요는 없었다.
앞으로 술을 자제하면 될 일이었다.
***
출근 준비를 어느 정도 끝낸 지한이 주방으로 나왔다.
식탁에 두부부침을 내려놓던 오 여사가 지한에게 인사하려다 말고 물었다.
“안색이 안 좋으신 것 같은데. 어디 아프세요?”
의례적인 걱정에 지한은 의자를 빼내며 대답했다.
“어제 회식을 좀 했습니다.”
“술 많이 드셨나 보네. 마침 콩나물국 했어요. 시원하게 끓였으니 해장 좀 될 거예요.”
“맛있겠네요.”
지한은 가볍게 미소 짓고는 오 여사가 내오는 밥과 국을 기다리며 식탁 한쪽에 놓아둔 태블릿을 들었다.
그는 매일 아침 간단하게나마 정치, 경제 뉴스를 확인하곤 했다.
세상 돌아가는 데엔 큰 관심이 없지만, 아주 사소한 정보도 일에 도움이 될 수 있으니까.
[우상그룹사 CEO, 임원 참여 봉사 활동 릴레이.]
포털 사이트 뉴스 페이지를 띄우자마자 보인 기사 제목에 그가 미간을 좁히다 다시 실소를 지었다.
요즘 들어 비슷한 기사가 연잇는다. 기부, 석탄 봉사, 물품 지원 같은 내용들.
또 무슨 뒤 구린 짓을 하고 있으시려나.
지한은 아버지, 강 회장과 그 측근들을 떠올리며 혀를 찼다.
주가가 얼마나 하락했든, 그룹 이미지가 얼마나 나빠졌든 자신의 자리를 손에 꽉 쥐고 놓지 않으려는 족속들.
그들이 피라미드 맨 꼭대기에서 회사를 운영하는데 여태 원활히 잘 돌아가고 있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물론 직원들을 갈아 회사를 운영하기에 어떻게든 돌아가고 있다는 걸 잘 안다. 하나둘 사표를 내기 시작한 부장과 팀장들을 보면 곧 문제가 심각해질 거라는 게 예상이 됐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머지않아 우상그룹의 주인을 바꿔야 했다.
반드시 자신의 힘으로 그렇게 만들 것이라고, 지한은 기사 속 이사들 얼굴을 보며 어금니를 물었다.
어느새 상이 다 차려졌다.
지한은 이만 태블릿을 내려놓고 식사를 시작했다.
숙취로 쓰라린 속을 맑은 국물로 채우고 있는데, 멀리서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식사를 잠시 멈춘 지한의 시선에 해주가 보였다.
그녀는 식탁 앞에 앉은 지한을 보고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아. 식사하고 계셨네요.”
“오늘 좀 늦게 일어났어요. 식사하러 온 거면 앉아요.”
지한은 그렇게 말하곤 평온하게 식사를 이어 갔다. 해주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네. 밥하고 국 가져올게요.”
오 여사가 주방에 없어 해주는 제 밥을 직접 챙기기 위해 싱크대로 향했다.
밥을 푸고, 국을 푸는 동안 그녀는 최대한 지한을 의식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사실 해주는 밤새 지한의 말을 곱씹고 곱씹었다.
‘2년 전에 나랑 잠자리한 거 말입니다. 나 방심하게 만들려고 의도적으로 그랬어요?’
‘그럼? 그때 왜 나랑 잤습니까.’
‘의도치 않게 자게 됐다?’
‘결혼 후에 방을 합치면, 그때도 어쩌다 자게 되나?’
술에 취해 보였으니 술주정이었겠지만, 그래도 2년 전 일이 그의 입 밖으로 나왔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막연히 그날 일이 금기시된다고 생각했었다. 없던 일 취급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해주의 몸 구석구석엔 지한의 감각이 남아 있었다. 콧속을 깊게 찌르던 그의 알코올 밴 향수 냄새를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불편했던 아랫배도, 처음 들어 본 자신의 높은 목소리도, 단단한 맨몸을 꽉 껴안았을 때 느낀 따뜻한 체온과 안정감도.
해주에겐 생생한 추억이었다. 그렇기에 그가 그날 잠자리 얘기를 할 때 해주는 가슴이 뛰었다.
물론 크게 의미 부여는 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취해서 한 말이니까.
……밤새 그렇게 다짐했는데. 아침에도 쓸데없는 의미 부여는 하지 말자고 또 다짐했는데.
왜 이렇게 의식이 되고, 행동 하나하나가 어색해질까.
겨우 수저까지 쟁반에 챙겨 넣은 해주는 다시 아일랜드 식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지한의 맞은편 의자를 빼 앉고는 말했다.
“잘 먹겠습니다.”
해주는 콩나물국 국물부터 떠먹었다.
지한의 앞이라고 긴장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더불어 국물도 입 안에서 조금씩 삼켰다.
지난번 위경련을 심하게 앓고 병원에 다녀온 후로도 여전히 소화 능력이 좋지 않아서, 자칫하면 체할 것 같았으니까.
“윤해주 씨.”
“네, 네?”
불현듯 불린 이름에 해주가 화들짝 놀라며 지한을 쳐다봤다. 지한이 미간을 옅게 좁혔다.
“뭘 그리 놀랍니까.”
“아, 아니에요. 딴생각하다가…… 하실 말씀 있으세요?”
“먼저 일어나 보겠다고 말하려고 했습니다.”
해주가 깨끗하게 비워진 지한의 밥그릇과 국그릇을 보았다.
“아, 네.”
“식사 맛있게 해요. 먼저 일어날 테니까.”
“아, 네. 알겠습니다.”
앉으라는 건, 같이 식사하자는 뜻 아니었나? 아침 먹을 생각 없었는데…….
혹시나 지한이 어젯밤에 대해 무슨 말이라도 할까, 싶어서 그의 앞에 앉았다.
괜한 기대감은 실망만을 남겼다.
지한이 싱크대에 사용한 그릇과 수저, 컵을 담그고 주방을 빠져나가는 동안, 해주는 그를 의식하며 식사를 시작했다.
바보 같아.
의식하지 말자고 해 놓고, 의미 부여하지 말자고 해 놓고 서운한 마음은 또 뭐야.
제 입장에서나 추억이지. 지한에겐 불쾌한 기억일 뿐일 텐데, 말하지 않는 게 당연한데 말이다.
……혹시 기억을 못 하시는 건가.
어젯밤에 묘한 말을 한 사람 같지 않게 표정이 평온했는데.
술이 과했던 것 같으니 필름이 끊겼을지도…….
거기까지 생각한 해주는 고개를 저었다.
다 부질없는 추측일 뿐이었다.
해주는 마음을 다잡았다.
“어젯밤 일은 꿈이야. 일어나지 않은 일이야.”
아쉬운 마음을 갖는 건 위험하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다. 앞으로 갈 길이 먼데, 벌써부터 그를 마음에 둬서는 안 됐다.
***
전무실로 출근한 지한이 커피 머신 앞에 섰다.
하루의 절반 이상을 회사에서 보내고, 회의를 하거나 외근을 나가는 게 아니면 업무 대부분을 전무실에서 해결하기에 커피 머신과 냉장고 정도는 전무실 구석에 두었다.
그는 커피를 내려 얼음을 넣고 설탕 두 봉지를 찢어 넣었다.
숙취도 숙취지만 피로감도 짙었다.
오 여사가 끓여 준 맑은 콩나물국이 도움 되긴 했지만, 그럼에도 아직 남아 있는 숙취는 늘 그렇듯 커피로 해결할 생각이었다.
설탕 알갱이가 씹히는 커피를 마시며 책상으로 돌아갔다.
의자를 당겨 앉으며 좀 개운해지는 기분이라고 생각하던 때였다.
똑똑.
“전무님, 정윤입니다.”
두 번의 노크 소리 후, 문밖에서 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지한이 다시 한번 커피를 마시는 동안 전무실 문이 열렸고, 윤이 들어왔다.
용건이 있으면 말하라는 듯 지한이 커피를 마시며 쳐다봤다. 윤은 말했다.
“전 이사님과 약속 장소까지 거리가 멀어서 일찍 출발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다시 컵을 내려놓고, 지한이 물었다.
“차는?”
“렌터카로 빌렸습니다.”
“바로 출발해.”
***
흰색 중형 세단이 인적 드문 도로를 달렸다.
지한은 도로를 따라 심어진 가로수를 보며 한 인물을 떠올렸다.
전경우 이사.
우상그룹 내에서 영향력이 센 인물로, 전형적인 개천에서 난 용.
그는 집안이 별 볼 일 없었지만 실력과 운이 좋았다.
아직 우상그룹이 우상전자와 우상건설 두 사업체만 가지고 있던 중견 기업 시절.
전경우는 중졸 공돌이가 운 좋아서 환경 좋은 사무직 일 한다고 무시받던 시절에 근사한 아이디어를 내 우상전자를 소비자들에게 각인시켰다.
그 결과 가전제품은 우상전자, 라는 인식을 대중에게 심어 주게 되었고, 우상전자를 시작으로 우상그룹을 설립한 지한의 친조부 강건주의 눈에도 당연히 들게 되었다.
사람 가리고 깐깐하기로 유명한 강건주였다.
가족들에게도 엄하게 굴던 그는 전경우만큼은 품에 끼고 다녔다.
승진을 시켜 자신의 가까이에서 일하게 했고, 한사코 집은 받지 않겠다는 말에 사택을 으리으리하게 지어 가족들과 그곳에서 살게 해 주었던 일은 아직도 유명했다.
특히 강건주는 해외 출장길엔 전경우를 꼭 데려갔었는데, 그 뒤엔 늘 실망시키지 않고 대박 제품을 터뜨렸다.
시간이 흘러 강건주 회장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때의 총애는 지금도 전경우에게 힘이 되어 주고 있었다.
덕분에 그는 지금 강태규 회장과 대척점에 선 인물 중 가장 영향력이 센 인물이 될 수 있었다.
“전무님, 도착했습니다.”
지한은 그만 차창에서 시선을 뗐다.
차가 멈춘 곳은 외진 길에 우뚝 놓인 건물 앞 주차장이었다.
<작은 쉼터>
이름만큼이나 작은 건물은 은밀히 대화할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
[결혼 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