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들어가십쇼!”
“전무님,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캄캄한 하늘에 달빛이 진하게 보이는 밤늦은 시간, 마당이 넓은 오리고기 가게 앞이었다.
얼큰하게 취한 인사들을 받은 지한이 웃음 지으며 대답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자신이 먼저 돌아서지 않으면 아무도 걸음을 떼지 않을 걸 알기에, 지한은 먼저 그들을 등지고 돌아섰다.
검은 세단에 시동을 켜 놓고 기다리던 윤이 재빨리 튀어나와 차 뒷자리 문을 열어 주었고, 지한은 차에 올라 시트에 기댔다.
눈을 감은 그의 얼굴 위로 짙은 피로가 엿보였다.
아주 오래간만에 술을 마셨다.
해남 리조트 독채 펜션 수정 작업도 마쳤고, 이제 정말 공사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리며 가진 회식 자리였다.
짧게 앉아 있다 일어나려고 했는데 이렇게 늦어질 줄이야.
야근을 밥 먹듯이 해 댔던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리조트 개발 팀원들과 꽤 친해졌다. 덕분에 하나둘 건네 온 술을 마다하지 못했더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주량 가까이 마신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아마도 2년만. 몸이 받아들이지 못할 만도 했다.
어느새 감은 눈 위로 가로등 불빛이 휙휙 지나가기 시작했다.
거슬리는 기분에 다시 눈을 뜬 지한은 차창을 반쯤 내리고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술기운을 물리쳤다.
공기가 쌀쌀하다. 봄인데도 아직 밤은 그랬다.
찬기가 도는 봄밤의 공기. 지한이 가장 싫어하는 조합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을 생생하게 떠올리게 했으므로.
지한은 어젯밤 꿨던 꿈을 떠올렸다.
아버지가 나왔고, 시간은 아직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였다.
온통 암흑뿐인 공간 속에서 고집스럽게 의자에 등을 바짝 기대고 앉은 아버지를 보는데, 숨이 막힐 것처럼 답답해서 그는 고함을 질렀다.
‘아버지! 어머니 돌아가시고 후회하시려고 이러세요?’
‘우상전자!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한데요! 대체 왜 어머니를 내버려 두시는 건데요!’
‘더 손써 보지도 않는 이유, 어머니 재산이 탐나서예요? 큰아버지 밀어내고 우상그룹, 우상전자 차지하시려고요?’
‘오늘부로 제게 아버지는 없습니다. 어머니 버리고 얻은 자리 어디 잘 가져 보세요. 그리고 늘 경계하셔야 할 겁니다. 머지않아 제가 아버지한테서 빼앗아 갈 테니까요.’
꿈이었지만 과장은 없었다. 때문에 그만큼 생생했다.
참 오랜만의 꿈. 그것도 그 시절의 꿈을 꾼 건, 멀어졌던 목표가 다시 성큼 가까워졌기 때문인가.
도망갔던 윤해주가 돌아온 거리만큼 단숨에 다시 아버지 위치까지 가까워질 수 있어서?
“윤해주…….”
이 결혼을 하는 게 맞는 걸까. 또 내 발등 찍는 꼴은 아닌지 모르겠다.
다시 눈을 뜨며 지한이 픽, 웃음 지었다.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엔 술기운이 가득 담겨 있었다.
“많이 마시긴 했나 보네.”
“속 안 좋으세요?”
지한의 혼잣말에 윤이 룸 미러를 쳐다보며 반응했다. 지한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그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실 결혼이야 아무나와 해도 상관없었다.
정략결혼으로 시작해 별거하는 부부가 한둘도 아니고. 이혼이 어렵다면 목적만 달성한 후 서류상 관계만 유지하고 남남처럼 지내는 방법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럼에도 윤해주를 선택한 건…….
지한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집에 들어갔을 때 해주가 자고 있길 바랐다.
쓸데없이 감성적으로 변한 기분으로 마주치면 안 될 것 같았으니까.
***
“오늘도 늦으시네.”
양치를 마친 해주가 주방 정수기 앞에 서서 컵에 물을 채우며 비어 있을 침실을 바라봤다.
밤 12시가 넘어가고 있는 시각.
아정과 실컷 수다를 떨다 와서 그런가, 들뜬 마음 때문인지 오늘따라 잠이 쉬이 오지 않았다.
더불어 식사하고 커피를 마실 때까지도 지한의 얘기만 했던 탓인지 마음이 어지러워 잠이 오지 않기도 했다.
해주는 물을 마셨다.
그러곤 이 넓은 집보다 훨씬 더 넓고, 깜깜한 창밖보다 더 어두울 우주에 혼자 남은 느낌을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굉장히 이상한 기분. 한 가지 감정으로 표현할 순 없지만, 그래도 굳이 벗어나고 싶은 이 마음을 정의 내린다면…….
외로움일까.
그래, 다른 것들보단 그 마음에 좀 가까운 것도 같다.
그러니까 괜히 조금 전 라일락커피 사장님에게 전화를 걸었지. 주무실 준비를 할 시간인 걸 알면서도.
아정과 그랬듯 한바탕 수다를 떨고 나자 좀 괜찮더니, 적막한 집에 혼자 좀 있었다고 다시 불편한 마음이 도졌다.
“걱정거리가 없어지니 별생각을 다 하네.”
해주가 작게 웃으며 스스로를 가볍게 비난했다. 웃음으로써 별 감정이 아니라고 여기고 싶은 마음에서.
‘언니 전무님 집에서 일했을 때 말이야. 그때 전무님 좋아했었지?’
다시 빈 컵을 싱크대로 가져가 씻는데, 문득 아까 아정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남몰래 품고 있던 마음이라고 생각했는데 티가 났을 줄은 몰랐다.
“이번엔 조심해야지. 좋아하지 않도록.”
까칠하다가도 다정하고, 서늘하다가도 따뜻했다.
얼마 전, 바쁜 와중에 응급실까지 함께 가 준 것도 그렇고. 편히 쉴 수 있게 VIP병실로 침대를 옮겨 준 것도 그렇고.
해주는 이만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이 늦은 시간까지 그를 기다리며 신경 쓰고 있다는 건, 방금의 다짐과는 다른, 원치 않은 징조이니 방으로 들어가 어서 잠이나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문득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온 것이.
해주의 걸음이 멈췄다.
구두를 벗는 소리가 들리고, 슬리퍼로 갈아 신는 소리가 들리고, 이내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더 빨리 방으로 들어갈걸, 하고 후회하는데 이내 해주의 시선에 지한이 들어왔다.
어쩐지 조금 흐트러져 보이는.
“아직 안 잤네요?”
“아, 네. ……술 드셨나 봐요.”
살짝 풀어진 지한의 발음을 느끼며 해주가 물었다.
“조금. 회식했거든요.”
역시. 늘 정돈된 모습이던 평소와 달라 보이는 건 그 때문이었나 보다.
한데, 조금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하기엔 평소 무심하고 짧게 시선만 줄 뿐인 지한의 눈 맞춤이 좀 짙고 길었다.
“그럼 쉬세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짧게 고갯짓하며 인사를 하고 해주는 걸음을 재촉했다.
살짝 눈이 풀린 모습이 괜히 위험하게 느껴졌다.
지한이 위협적인 모습을 보였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저…… 방금까지 그의 생각을 했기 때문일까? 지금 그의 모습이 문득 2년 전 그날을 상기시켰다.
제 얘기를 들어 주다 와인에 취했던 그날 밤. 자신에게 입 맞추던 그 모습을.
“여기서 뭐 했습니까.”
그때였다. 지한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해주를 붙잡았다.
“네?”
해주가 그를 쳐다보며 되물으니 그는 고개를 기울였다.
“뭘 했느냐고요. 여기서.”
여기서 뭘 했냐니. 주방에서 달리 할 게 뭐가 있을까.
지한이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의문을 가지던 해주는 아차 싶었다.
혹시 과거처럼 사고를 치려 한다고 오해한 걸까?
방금 지한의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았기에 해주는 재빨리 해명했다.
“목말라서요. 물 마셨어요.”
“아, 물. 나 올 땐 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
“잠들었었는데 목이 말라서 나왔어요.”
“아, 그래요. 잠들었다가 목이 말라서.”
많이 취한 걸까? 해주는 지한과 나누는 대화의 내용이 좀 이상하게 느껴졌다.
“궁금한데.”
문득 들려온 말에 해주가 지한에게로 몸을 틀었다.
“네?”
“2년 전에 나랑 잠자리한 거 말입니다. 나 방심하게 만들려고 의도적으로 그랬어요?”
해주는 너무 놀라 하마터면 사레들릴 뻔했다.
그러나 지한은 해주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냥, 궁금해서.”
“아뇨. 그건 아니에요.”
해주는 눈에 힘을 주고 말했다. 절대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는 듯.
결코 2년 전의 잠자리를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쓰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저 거짓과 사실을 뒤섞어 만든 불쌍한 사연을 팔아 지한과 술을 먹고, 그를 먼저 뻗게 만드는 것. 거기까지가 해주의 목표였다.
술에 취한 지한이 입을 맞춰 올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다가오는 지한을 외면하기엔 그가 너무 근사했다.
결국 마지막 순간에 해야만 하는 일을 잊고 탐이 나는 마음이 앞서 잠자리를 했지, 목적 따위로 그랬던 게 아니다.
“그럼? 그때 왜 나랑 잤습니까.”
“그건…… 의도치 않게…….”
“의도치 않게 자게 됐다?”
“네…….”
지한은 알까. 과거 얘기를 하면 할수록 자꾸만 그때의 감정이 살아난다는 걸.
해주는 안 그래도 마음을 키우지 않으려고 조심하는데, 갑자기 술을 마시고 들어와 아무렇지 않게 감정을 건드는 지한이 좀 원망스러웠다.
좋아했거든요. 그래서 전무님 키스 받아들였어요.
그 말을 들으면 불쾌해하실 거면서.
해주가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삼키는데 약간 비아냥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결혼 후에 방을 합치면, 그때도 어쩌다 자게 되나?”
“……네?”
당황스러워하는 해주의 얼굴을 보며 지한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사람 일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해주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눈동자만 불안정하게 움직였다.
원래 술버릇이 나빴던가. 아니면, 하필 하룻밤 몸을 나눈 그날 도망간 게 자존심이 상했던가. 그래서 마음에 담아 뒀던 걸까.
그때 푸스스,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뭐 그렇게 심각해. 걸러 들어요. 그냥 농담이니까. 아, 그리고.”
지한이 해주를 쳐다봤다.
다시 묘한 긴장감이 돌았다.
“웨딩드레스. 그때 말 못 했는데, 예뻤습니다. 더 많이 입은 모습 봤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울 만큼.”
그는 가볍게 입매를 올리더니 다시 걸음을 옮겨 해주를 지나쳤다.
지한이 침실 문을 닫고 사라진 뒤에도 줄곧 해주는 꼼짝할 수 없었다.
그저 그가 있는 침실을 한참 동안 바라볼 뿐이었다.
자신이 뭘 들은 건지 곱씹어 보면서.
“……그래서 뭐. 전무님이 그날을 언급했으면 뭐. 드레스 얘기하셨으면 뭐. ……설레서 어쩔 건데?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대책 없이 뛰는 심장께를 손으로 꾹 누르며 해주는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달래면서.
[결혼 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