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 협상-18화 (18/68)

18화.

“언니! 여기야 여기!”

사흘 뒤, 한남동에 위치한 태국 음식점이었다.

태국을 연상시키는 화려한 장식으로 인테리어 해 놓은 가게 안에 들어서자마자, 출입문 근처에 앉아 있던 아정이 크게 손을 흔들며 그녀를 반겼다.

해주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아정에게로 향했다.

“오래 기다렸지?”

해주가 아정의 맞은편 의자를 빼며 묻자 아정은 손을 휘휘 저었다.

“내가 일찍 온 건데. 언니랑 수다 떨 생각하니까 설레서 좀 오버해서 빨리 나왔어. 얼른 앉아. 할 얘기 너무 많아.”

아정이 보채는 대로 얼른 자리에 앉자, 뭐가 그리도 급한지 아정은 메뉴판부터 내밀었다.

“일단 주문부터. 우리 수다 떠느라 에너지 많이 써야 하니까 많이 시키자.”

그런 아정이 귀여워 해주는 웃음 지었다.

“그래. 먹고 싶은 거 다 주문해.”

“일단 수박주스는 당연히 먹어야 하고.”

여전히 먹는 걸 좋아하는지 아정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메뉴를 하나씩 읊기 시작했다.

***

“주문하신 수박주스 두 잔, 솜땀, 게살 볶음밥과 푸팟퐁커리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주문할 때 요청했던 대로 요리가 한꺼번에 나왔다.

테이블 위를 푸짐하게 채워 놓은 직원이 돌아가자 아정이 수박주스를 집어 들며 말했다.

“자, 이제 일 얘기 그만하고 연애 얘기합시다. 남해 남자들 어땠어?”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해주는 아정에게 연락이 끊긴 것에 대해 사과하고, 이어 남해 생활 얘기도 해 주었다.

카페 2층에 월세 내고 지내며 카페 아르바이트를 한 것, 간간히 농사도 도와드리고 어르신들과 시장도 같이 다녀왔던 것.

처음엔 흥미롭게 듣던 아정은 금세 지루해했다. 일 얘기만 듣고 있으니 꼭 지금 일하고 있는 것처럼 기가 쭉쭉 빨린다고.

연애 얘기는 재밌나. 눈을 빛내는 아정이 귀여워 해주는 웃음 짓고는 말했다.

“평균 나이 60세. 나 제외하면 제일 젊은 분이 54세, 내가 일하던 카페 사장님.”

“응?”

“연애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고.”

“와…… 실화야? 언니 2년 동안 너무 재미없게 산 거 아니야?”

재미를 느낄 새도 없이 돈을 벌고 아빠의 안위를 신경 쓰느라 정신없었지만, 해주는 어두운 면이 티 나지 않게 웃음 지으며 대답했다.

“나름 재밌었어. 평화롭고.”

“그랬다면 다행인데……. 철저히 도시 체질인 나는 공감할 수 없다.”

“넌 재형 오빠랑 좀 어때? 여전히 만나?”

“뭐, 만나고 있지.”

“내가 레스토랑 그만두기 한 달 전쯤에 사귀었으니까…… 4년 됐네?”

해주가 연애 기간을 세어 보자 아정은 뭐 씹은 표정을 지었다.

“내가 미쳤지. 그딴 놈을 4년이나 만나고.”

“왜. 오빠가 너 공주 대접해 줬던 것 같은데.”

“언니가 아는 장재형 죽었어.”

아정이 생각만 해도 열받는다는 듯 세모눈을 했다.

“요즘 그 자식 변했거든.”

“변했다고? 어떻게?”

해주가 상상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자 아정은 답답한지 하아, 크게 한숨 쉬곤 수박주스를 한꺼번에 들이켰다.

“완전 의처증이야. 지가 모르는 사람 만나고 오면 인증 샷 꼭 찍어야 하고, 밤 9시 넘어서까지 회식하잖아? 그럼 지 불안하다고 전화랑 메시지를 5분 간격으로…….”

아정이 단발머리가 흐트러질 만큼 세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 떠올리니까 열받아. 정 때문에 못 헤어지는 내가 등신이지.”

“재형 오빠가 집착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해주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대답하자 아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도 이런 식으로 변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지. 얘기하니까 울컥하네. 딴 얘기하자.”

정말 열받았는지 아정이 수박주스에 이어 물까지 벌컥벌컥 들이켰다.

해주는 아정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금세 빈 물 잔에 물을 채워 주며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레스토랑은 왜 그만뒀어? 점장님 가게 차려서 나가면 네가 그 자리 맡기로 했었잖아.”

“엄마 통해서 지금 일자리 추천 들어왔거든. 계약직인데도 엄마가 대기업 이름발이 좋다고 무조건 옮기래서 옮겼지, 뭐. 여긴 안내 데스크인데도 2년 계약직 하면 정직원 전환도 시켜 준대고.”

아정은 멋대로 사는 편이었다. 누가 욕하든 조언을 해 주든 자기 소신대로 움직였는데, 오직 한 사람, 엄마 말에는 끔뻑 죽었다.

“정직원 되는 거면 괜찮네. 일은 잘 맞아?”

“정적이라 심심한데 월급이 괜찮아서 할 만해. 딱 하나 거슬리는 거 빼면.”

“하나?”

해주가 묻자 아정은 얼굴만 떠올려도 이가 갈리는지 어금니를 꽉 물었다.

“언니도 알지? 강지한 전무님 비서.”

“정윤 비서님?”

“응응, 그 자식. 직장 생활 속 내 유일한 스트레스 원인.”

“정윤 비서님 얘기 맞는 거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윤 때문에 힘들다니. 해주가 겪었던 윤은 늘 살갑고 친절한 좋은 사람이었다.

해주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기울이자 아정은 열을 내며 말했다.

“그래, 그 재수 없는 놈. 난 처음에 정윤 걔가 전무님인 줄 알았잖아. 하도 원리 원칙 따지며 잔소리를 해 대니까. 뭔 놈의 잔소리를 4절까지 하는지.”

“그래?”

“언니한텐 안 그랬어? 안내 데스크가 하찮다고 무시하는 거야, 뭐야?”

아정이 기막힌 표정을 지으며 이 자리에 없는 윤을 향해 도끼눈을 떴다.

그럼에도 해주는 그저 의아했다. 윤이 잔소리를 하는 스타일이었나?

해주에겐 반가운 인사나 가벼운 농담 따위만을 건네 왔었는데.

“그건 그렇고, 그날 전무님한테 인사 간 거야? 어떻게 나보다 전무님한테 먼저 찾아갈 수 있어?”

말을 이어 가던 아정이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아정은 과거 해주가 지한의 집에서 가사 도우미 일을 했던 걸 알고 있었다.

다만 해주가 지한에게 큰 죄를 저지르고 도망치듯 지한을 떠난 것이란 사실은 몰랐다.

그러니 며칠 전 WS호텔&리조트 본사를 찾아간 게, 서울로 올라온 김에 지한에게 인사하러 온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해주는 긴장했다. 지금이 말할 타이밍인 것 같았다.

그녀는 옆자리에 놓인 가방을 무릎으로 끌어와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전무님을 먼저 찾아간 건 아니야. 해남에 있을 때 이미 만났어.”

“진짜? 어떻게?”

해주는 아정을 만나기 전에 다양한 스토리텔링을 해 봤다. 지한과의 러브 스토리에 대해.

“전무님이 일 때문에 해남 왔다가 우연히 만났어.”

그리고 고른 한 가지. 역시 우연히 만났다는 게 가장 자연스럽겠지.

“헐, 대박 신기해. 인연인가? 어떻게 해남까지 가서 만나?”

“그러게. 인연인가 봐. 그래서…… 나 결혼해.”

“응?”

아정이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해석하느라 굳어 있는 사이, 해주는 가방을 열어 한 장 들어 있던 청첩장을 내밀었다.

“뭐야, 나 지금 뭐 받은 거야?”

얼결에 청첩장을 손에 든 아정이 겉면에 적힌 ‘아정이에게.’ 자신의 이름을 보고는 봉투를 열었다.

안엔 세로로 접힌 부드러운 질감의 종이가 있었다. 완전히 꺼내 펼치니 약도와 함께.

<4월 10일 토요일, WS호텔 서울 본점 플래티넘 관. 신랑 강지한, 신부 윤해주.>

결혼식 정보가 적혀 있었다.

아정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키웠다.

“잠깐, 잠깐.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장난치는 거 아니고?”

빨리 뭐든 설명하라는 아정의 눈빛에 해주는 말했다.

“해남에서 만나고 어쩌다 보니 결혼까지 하게 됐어. 청첩장 너한테 처음 주는 거야.”

해주는 앞서 지한에게 허락을 받았다. 아는 동생이 하객으로 와도 되겠냐고.

그러자 어제저녁, 지한은 청첩장 한 묶음을 해주의 몫으로 집에 가져왔다. 해주는 그중 한 장을 아정의 몫으로 가져왔다.

비공개 결혼식이다.

우상그룹 강지한과 가사 도우미 출신 윤해주.

신데렐라 스토리로 자극적인 기사가 나올 법하지만, 정말 중요한 하객들만 초대해 신부에 관한 정보는 이름 외엔 흘리지 않고, 기자들의 출입은 적극적으로 막을 예정이라고 했다.

그 모든 것이 해주를 위해서였다. 아빠를 안전하게 지키고 싶어 하는.

그러니 해주도 조용한 결혼식에 동참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하객도 최대한 부르지 않는 게 좋겠지만, 그래도 한 사람 정도는 초대하고 싶었다.

결혼식에 환상은 있어도 결혼 생활에 환상은 없다. 그러니 어쩌면 이번이 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일지 모를 결혼식이었다.

가짜 결혼식이니 의미 없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소중한 사람 한 명쯤은 제 결혼식을 지켜봐 주었으면 했다.

그 사람이 아빠라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으니 친동생처럼 아끼는 아정이 와 준다면 고마울 것 같았다.

“청첩장 내가 처음이야? 이제야 언니 결혼 알게 된 서운한 맘이 좀 풀릴 것 같네. 일단 들어 보자. 어서 스토리 좀 풀어 봐 봐.”

해주는 사실을 기반으로 만들어 낸 지한과의 연애 스토리를 천천히 풀어 내기 시작했다.

지한과 만난 시점을 6개월 앞으로 당기고, 그가 카페로 찾아왔던 순간을 좀 더 달콤하게 각색하고.

남해에서 연애하다가 결혼을 약속하며 서울로 막 올라왔고, 지한이 바쁜 탓에 좀 서둘러서 결혼식을 하기로 했다는 말까지.

눈을 빛내며 해주의 얘기를 듣던 아정은 나중엔 두 손을 모아 심장께에 대었다.

“아, 설레. 드라마 요약본 본 기분이야. 부럽다, 부러워!”

아정이 호들갑 떠는 목소리에 해주는 양심이 찔렸다.

다 가짜인데 부러움을 받으니 마음이 불편하기도 했다.

오늘처럼 거짓된 삶을 살게 되겠지.

사랑해서 하는 결혼이라는 거짓말을 시작으로 앞으론 사랑하는 부부를 연기해야 한다.

진실이 최고인 줄 알고 살았다. 솔직하면 어떤 일이든 결국 잘된다고 생각했다. 거짓말하는 사람을 혐오하고 살았는데.

해주는 어쩐지 서글퍼졌다.

살다 보니 신념이 꺾이는 순간이 오고,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요즘처럼.

스스로에게 부끄러움 없이 살아도 안 될 일은 안 되고, 온몸이 불쾌하게 간지러워질 만큼 남을 속여도 좋은 일이 따른다.

1년, 계약대로 결혼 생활이 끝나면 전부 제자리로 돌아가겠지.

그땐 지금처럼 가짜를 진짜처럼 말한다는 죄책감은 들지 않을 것이다.

해주가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결혼한다고 해서 말인데, 언니 전무님 집에서 일했을 때 말이야. 그때 전무님 좋아했었지?”

“응?”

“잘생기고 멋있다는 얘기 진짜 많이 했었잖아.”

“내가 그랬어?”

“연예인도 아니고, 일반인이 잘생기면 얼마나 잘생겼다고 찬양하느냐고 이해 못 했잖아. 물론 회사 취업하고 실물 본 뒤엔 인정했지만. 암튼 그때 좋아했던 거 아냐?”

2년 전의 해주에게 지한을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글쎄. 그땐 선망의 대상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지한은 해주에게 오를 수 없는 나무였으니까.

멋있다고 생각했고, 다정한 그로 인해 가슴이 뛰기도 했지만 그냥 그가 멋있는 사람이라 그런 줄 알았다.

나중에야 알았다. 좋아해서 그랬던 거였음을.

그와 잠자리를 한 날. 그를 배신해야 했던 날.

그때, 아정의 핸드폰이 전화를 울렸다. 잠시 액정 화면에 뜬 발신인을 확인한 아정은 그대로 전화를 뚝 끊어 버렸다.

“누군데?”

“장재형. 안 받아도 돼.”

아정이 세모눈을 하더니 다시 벨 소리를 울리는 핸드폰을 아예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괜찮아?”

“괜찮아. 이따 집 갈 때 전화하면 돼. 아무튼 언니 아버지는 잘 계셔?”

“응, 잘 계시지.”

해주는 재형과 아정의 다툼을 걱정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아빠의 얘기를 할 차례였다.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하는 사연을 꾸며 낼 시간이었다.

다행인 건 아정이 아빠의 이름을 몰라서 청첩장 속 이름을 바꾼 것까진 변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었다.

[결혼 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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