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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협상-17화 (17/68)

17화.

-언제 보내면 되겠습니까?

“다음 주 화요일 밤 11시. 회장실로 은밀히 찾아오게 해.”

-네, 알겠습니다.

돌아온 대답에 강 회장이 전화를 끊었다.

그가 회 한 점을 젓가락으로 집어 들며 한쪽 입꼬리를 죽 끌어당겼다.

“노인네 만나 결혼 파토는 물 건너갔다고 기뻐하고 있겠지. 멍청한 것. 감히 우상가(家)에 들어오려 하는 대가는 톡톡히 치러야겠지?”

길어야 1년 정도. 강 회장이 해주를 두고 볼 기간이었다.

시한부 인생인 노인네는 어차피 그 뒤엔 세상을 뜰 테니, 그 뒤엔 발칙한 계집과 이혼하게 하고 지한을 새장가 보낼 생각이었다.

결혼 생활에서 이혼하게 만드는 일이야 쉽다.

그 후엔 사업적으로 죽이 잘 맞는 기업 중 하나, 우상그룹의 재계 순위를 더 높이 만들어 줄 비즈니스 파트너를 찾아야지.

***

고요한 공간. 지한은 새근대는 숨소리를 내며 곤히 잠든 윤해주를 바라봤다.

매일 긴장하고 주눅 든 모습만 봤는데, 잠에 빠진 해주의 얼굴은 꽤 평온해 보였다.

그가 링거가 꽂힌 해주의 손목으로 시선을 옮겼다.

예전에도 마른 편이었지만, 이제는 안쓰러울 만큼 손목이 가늘게 느껴졌다.

그가 불편한 기분에 설핏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자업자득이야, 윤해주. 그러게 도망가지 말았어야지.”

지한은 해주의 가는 손목 위로 과거를 떠올렸다.

저 손에 깍지를 꼈다. 양손을 머리 위로 올려 고정하고, 푹신한 침대 위에서 몸을 겹쳤었다.

불행했던 시간 속에 유일한 안락.

매일 아침 주방에 있는 해주와 마주쳤다.

새벽부터 일하는 게 피곤하지도 않은지 늘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처음엔 어린 여자애가 잘리지 않으려고 애쓰는 게 안쓰러웠다. 그래서 의무적으로 잘해 주었는데, 하루는 해주가 말했다.

‘전무님 댁에서 일한 뒤로 하루하루가 행복해요.’

‘긍정적이네요. 내가 특별히 잘해 주지도 못하는데.’

지한의 물음에 해주는 대답했다.

‘잘해 주지 못하셨다니요. 월급 많이 주시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잘해 주고 계신걸요. 상무님 덕분에 매달 이자 안 밀리고 갚을 수 있었고, 덕분에 조금이나마 저축도 하고 있는데요. 몇 년 동안 요즘만큼 행복했던 적 없었어요. 저 써 주셔서 감사해요. 은혜 평생 잊지 않을 거예요.’

이유는 알 수 없다. 왜 그날부터 윤해주가 자신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건지.

불우한 환경에도 긍정적인 모습이 예뻐 보였나.

아님 그날 환하게 웃는 얼굴이 그냥 예뻤던가.

어느 순간부터는 매일이 그날 아침만 같길 바랐다.

매일 아침마다 웃는 윤해주를 볼 때면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드는 일들 따윈 생각나지 않았으니까.

더는 아버지와 쓸데없이 신경전을 벌이며 우상전자를 욕심내지 않아도 행복하겠다고 여겼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소중한 사람은 만들지 않겠다는 긴 세월 다짐을 저버리고 마음을 키워 갔다.

그래서 배신감이 컸었다.

그럼에도 스스로가 이해 가지 않았던 건, 쓸데없는 시간 낭비를 싫어하면서도 신고하지 않고 은밀히 윤해주의 뒷조사를 했던 것.

“덤프트럭 운전자가 사채업자라……. 그 사고가 우연이 아니었단 말이지.”

지한이 낮게 중얼거렸다.

심부름센터의 정보로는 해주의 행방과 기술 자료를 어디로 넘겼는지만 알게 됐을 뿐이었다.

해주의 입으로 해남까지 도망친 이유를 듣게 된 뒤로, 그는 틈틈이 그 사건을 떠올렸다.

빚을 갚았는데 죽이려 했다.

왜?

죽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을까? 기술 자료를 빼돌렸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그렇다고 사람을 해하는 건 리스크가 너무 크지 않나.

윤해주가 자신의 집에서 일하던 동안엔 2억짜리 사채에 별 탈이 없었다.

매달 갚아야 할 이자가 터무니없이 많았을 뿐, 입금만 잘되면 불필요한 협박은 없다고 해주는 말했었다.

윤해주가 훔친 자료를 그대로 베껴 신제품을 출시한 건 DF전자.

DF전자에서 하필 윤해주를 콕 집은 건 왜일까. 내 집에서 일하는 건 어떻게 알고.

어쩌면 사채업자는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DF전자 쪽에서 먼저 제안을 했을까? 큰돈을 줄 테니 윤해주를 이용해 우상그룹 기술 자료를 빼돌리자고?

윤해주가 착각한 게 아니라고 한다면, 죽여야만 했던 이유는 뭐지?

다음 순간 지한은 자꾸만 늘어지는 생각의 꼬리를 잘라 내야 했다.

해주의 눈꺼풀이 느리게 열리고 있었기에.

해주는 잠시 병원 천장을 바라봤다. 그다음으론 천장 가까이에 있는 링거팩을 쳐다보다가 지한을 발견했다.

“……전무님.”

해주가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지한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눌러 제지했다.

“누워 있어요. 바로 일어나면 어지러울 겁니다.”

“아…….”

해주는 다시 등을 침대에 기댔고, 약간은 비몽사몽한 기분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긴…….”

낯선 방이었다. 분명 응급실에서 수액을 맞고 잠든 기억이 있는데, 이곳은 응급실이 아니라 침대가 하나뿐인 넓고 쾌적한 병실이었다.

“윤해주 씨 잠든 동안 병실 옮겼어요. 일을 좀 해야 해서.”

지한의 뒤로 2인용 소파와 작은 커피 테이블이 있었다. 테이블 위엔 그가 일하며 쓰던 태블릿PC가 놓여 있었다.

“죄송해요. 바쁘신데 저 때문에…….”

“사과는 됐습니다. 그것보다, 오 여사님 요리가 입맛에 안 맞아요?”

“아뇨, 잘 맞아요.”

“그래요? 급성 위장염에다 영양실조라던데. 위장염은 신경성이라 치고, 그럼. 왜 몸이 그 지경이 될 때까지 안 먹은 겁니까?”

의사가 검사 결과를 들려줬을 때, 지한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해주가 온 뒤로 오 여사에게 특별히 부탁까지 했다.

건강식 위주로 챙기고, 먹고 싶어 하는 게 있으면 다 해 주시라고.

최근 오 여사를 통해 먹는 양이 적다고 듣긴 했었다. 그래도 차려 주는 식사를 몇 입이라도 꼭 먹는다고 했고, 예전에도 식사량이 많은 편이 아니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영양실조라니.

지한이 미간을 좁혔다.

“진짜 다이어트라도 합니까?”

그의 목소리가 까칠해서 해주는 당황한 표정으로 얼른 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제가…… 무사히 결혼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나 봐요.”

“부담감은 있고, 책임감은 없었나 보네요. 결혼식 앞두고 건강 관리 못 하는 걸 보니.”

“죄송합니다…….”

해주는 지한의 눈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그의 말이 맞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결혼식을 위해 컨디션 조절쯤은 스스로 해야 했는데.

지한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이렇게까지 다그치듯 물으려던 건 아닌데.

안색은 좋아졌지만, 아직 힘없는 해주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몹시 거슬렸다.

실은, 지금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는 모습도 꼴 보기 싫었다.

아니, 한편으론 갑과 을이 누군지 분명하게 보여 주는 태도에 좀 더 잔인하게 굴고 싶기도 했다.

그렇다고 겁먹게 만들고 싶진 않은 이중적인 마음.

지한은 결국 제 앞의 작은 한 줌 같은 여자를 몰아붙이고 싶은 욕구를 참아 냈다.

대신 그는 스스로를 한심하게 생각하며 쯧, 작게 혀를 찼다.

“긴장되는 거 이해 못 하는 거 아니지만, 적어도 결혼식까진 건강 챙기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럼요. 잘 챙길게요. 다신 이런 일 없도록 할게요.”

해주의 다짐에 지한은 조금은 누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

“마음 좀 편해질 소식 들려주자면. 햇빛요양병원에 보안 설비 설치 마무리됐고, 윤해주 씨 아버지 병실 앞에도 경비 초소 설치 끝냈다고 연락받았습니다.”

조금 전, 해주가 잠든 틈에 지한이 의뢰를 넣은 경비업체에서 전화가 왔다.

모든 요구 사항을 반영했고, 고객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겠다고.

믿을 만한 업체였다. 요구하는 돈만 준다면 사람을 죽이고, 살리고, 지키는 데 최선을 다하는 곳이니까.

지한의 말에 해주는 아, 하고 안도감 짙은 탄성을 뱉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지한이었다.

고작 1년을 알았을 뿐임에도 해주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믿음직한 사람이었다.

아빠가 안전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자 가슴에 꽉 묶여 있던 끈이 느슨하게 풀어지는 것 같았다.

링거를 맞은 덕분에 아팠던 명치께는 나아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가슴이 답답했는데, 이 순간 그 불편한 기분에서마저 해방되는 것 같았다.

“부탁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하나 더. 의사가 신약 제안했다던데. 돈 때문에 고민했다는 얘기 전해 들었어요.”

“아, 그건 신경 쓰지 마세요.”

그 얘긴 하지 않으려 했는데. 이미 지한에게 받은 것투성이였다. 이제 더는 염치가 없을 것 같았다.

“갑은 을의 가족을 부양한다. 계약서 내용입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지한이 말했다.

“충분히 해 줄 수 있는 일이니 신약 사용하고 싶은지, 아닌지만 말해요. 알아보니 임상 실험 결과가 좋던데.”

해주는 입술을 달싹였다. 정말이지 염치는 없지만…… 두 번 묻는다면 부탁하고 싶어진다.

“사용, 하고 싶어요.”

해주의 대답에 지한은 눈썹을 까딱였다.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곤 말을 덧붙였다.

“정 비서 오라고 할 테니 링거 다 맞으면 차 타고 집으로 가요. 난 회사로 들어가 봐야 하니까.”

해주가 응급실에 실려 온 지 벌써 두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여태 자리를 지켰지만 더는 이곳에서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고 있을 수 없었다.

“아, 아니에요. 혼자 갈게요.”

더 번거롭게 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해주가 거절했지만 지한은 단호했다.

“또 쓰러지려고. 더 피곤해지는 상황 만들지 말고 그냥 타고 가요. 퇴원 수속도 정 비서가 할 거니 쉬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더 토 달다간 쓸데없이 그의 시간만 뺏게 될 것 같아서 해주는 더 말을 붙이지 않았다.

지한이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을 때였다.

“전무님.”

해주의 부름에 다시 지한이 행동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봤다.

“혹시 저 외출 좀 해도 될까요? 아는 동생 좀 만나고 오고 싶어서요.”

아정을 만날 생각이었다.

물론 이런 상황에 할 말은 아니었지만 바쁜 지한에게 언제 또 물어볼 수 있을지 몰랐다.

그는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니까.

마주치지 못한다는 이유로 메시지로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히 지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몸 나아지면 편히 만나요. 나가기 전에 어디로 가는지 메시지만 한 통 남겨 놓고.”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결혼식에 초대해도 되나요?”

“마음대로. 허락받을 필요 없어요. 내 필요에 의해 하는 결혼이지만 윤해주 씨 결혼이기도 하니까.”

지한은 자신의 말에 눈에 띄게 밝아진 해주의 눈빛을 느꼈다.

매일 집에 있으려니 답답하기도 했겠지. 누구라도 만나 기분 전환하고 오는 게 비싼 보양식을 먹이는 것보다 낫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말을 덧붙였다.

“단, 현명하게 판단해요. 초대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결혼식에 대한 정보가 새어 나갈 테니.”

“네, 그럴게요. 딱 한 명 초대하려고요.”

“그래요, 그럼.”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 지한이 이만 걸음을 돌렸다.

[결혼 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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