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청담동 해외 수입 웨딩드레스 QUEEN.
“신부님 나오십니다.”
결혼식 날짜가 촉박한 예비부부를 위해 웨딩 플래너가 추천하고 예약을 잡아 준 하이클래스 프리미엄 수입 업체 Queen의 첫 번째 웨딩드레스였다.
원장의 말에, 지한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직원이 여는 커튼으로 시선을 주었다.
하얀 조명이 강렬하게 비추고 있는 내부가 천천히 드러났고, 이내 조명에 반사된 비즈 장식이 화려하게 빛나는 A라인 드레스를 입은 해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영국 왕실에서 사랑하는 디자이너의 드레스입니다. 작년 겨울, 할리우드 여배우가 결혼식에 초이스해 화제가 된 디자인입니다.”
원장의 설명을 들으며 지한은 찬찬히 해주를 훑었다.
착복 전까진 단아한 해주와 어울릴까 싶었는데, 오히려 해주의 단아함과 드레스의 화려함이 잘 어우러진다.
해주가 가는 손에 들고 있는 백합 조화 다발은 드레스의 우아함을 더해 주었다.
푹 파인 네크라인만 아니면 딱 적당했을 텐데.
우물 깊은 쇄골이 전부 드러날 만큼 노출도가 있는 드레스였다. 드레스 디자인이 야한 느낌을 주지는 않았지만, 그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편 해주는 지한의 꿰뚫는 듯한 시선을 느끼며 어색해했다.
그는 정말 빤하게 자신을 보고 있었다. 얼굴 위로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로.
식장하고 어울리는지, 그런 것들을 가늠하고 있는 걸까?
며칠 전 식사 자리에서 지한은 결혼을 통해 WS호텔 예식장을 홍보할 것이라고 했었다.
프리미엄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그룹 회장 아들이 결혼한 예식장’이라고 선전한다면 가치가 높아질 테니까.
그러니 홍보에 어울릴 만한 웨딩드레스를 고르는 게 중요하겠지. 하지만 예비부부를 연기하는 중이니까 잘 어울린다는 말 한마디 해 주면 좋을 텐데.
화려한 치장을 하고, 커튼이 열리길 기다리는 동안 지한의 반응을 내심 궁금해했었다.
조금은 자신처럼 결혼에 대한 설렘을 가져 주지 않을까, 그녀도 모르는 사이 은근히 기대했었나 보다.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생각한 대로 잘 어울리네요.”
지한은 말했다. 여전히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신부님 목부터 어깨 라인이 여리여리하니 예쁘셔서, 지금 보여 드린 것처럼 네크라인이 깊다 싶을 만큼 파인 드레스도 잘 어울리세요.”
“그래요. 확실히 그렇네요.”
원장의 말에 지한은 동의하듯 대답했지만, 이내 그는 첫 번째 웨딩드레스에 미련이 없다는 듯 말했다.
“다른 것도 봐 보죠. 다른 스타일로요.”
“두 번째 드레스로 머메이드라인 드레스 보여 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원장이 해주에게로 다가가며 커튼을 닫았다.
화려했던 해주가 커튼 뒤로 사라지자 지한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러자 감은 눈 위로 떠오르는 해주의 부드러운 어깨선 잔상에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2년 전, 침대 위에서 그를 가슴 뛰게 했던 가는 몸 선이, 드레스를 입은 해주의 위로 자꾸만 겹쳐졌다.
***
“두 번째로 보신 하이넥 머메이드 디자인은 화이트 라벨 라인 신상이라 많이들 선호하세요. 다른 고객님께서도 같은 날짜에 염두하고 계셔서 빠른 결정 내려 주셔야 예약 가능합니다.”
원장의 말에 지한은 사복으로 갈아입고 나와 제 옆에 앉아 있는 해주에게 물었다.
“원하는 걸 골라 봐요.”
“제가요?”
“입는 사람이 마음에 들어야지. 내가 보기엔 둘 다 잘 어울리던데. 둘 중 어떤 게 더 마음에 들었어요?”
해주는 곧바로 대답하는 대신, 앞에 놓인 카탈로그에 시선을 두며 고민했다.
리허설 촬영은 생략하기로 했으니 본식 드레스 하나만 고르면 됐다.
단 두 개 중 하나를 고르면 되는 일인데도 이토록 고민이 되는 건, 자신이 원하는 것과 지한이 원하는 웨딩드레스가 달라서였다.
해주는 첫 번째 입은 것을 선택하고 싶었다. 화려한 스타일이 취향은 아니었지만, 풍성한 웨딩드레스는 어릴 적부터 로망이었다.
그 드레스를 입고 있던 동안, 언젠가 아빠와 나눴던 대화가 생각나기도 했었다.
‘우리 딸 공주 같은 드레스 입고, 아빠 손잡고 식장 들어갈 거 생각하니까 먹먹해.’
‘공주 드레스가 뭐야.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우리 해주, 아빠 공주지. 엄마는 여왕님이고 해주는 공주지.’
‘으, 소름 돋아. 공주 소리 그만해. 그리고 나 이제 스무 살이거든? 무슨 결혼이야?’
‘벌써 대학생이잖아. 아빠한텐 먼 미래 같지가 않아.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화려한 드레스 사 줄게. 우리 딸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주인공 만들어 줘야지.’
불현듯 떠오른 행복한 추억에 해주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을 때였다.
“결정했어요?”
지한이 물었다. 해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머메이드 드레스로 할게요.”
지한이 더 마음에 들어 한 웨딩드레스를 선택하기로 했다. 어차피 결혼식에 아빠는 없고, 이 결혼은 그를 위한 것이니까.
***
배웅하며 원장이 잡아 준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왔다.
숍에서 연락을 넣은 건지, 건물 앞에 발레파킹을 맡겼던 세단은 미리 도착해 있었다. 차에 오른 뒤 지한이 물었다.
“점심 먹고 들어가죠.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아무거나 괜찮아요.”
“아무거나. 특별히 먹고 싶은 게 없으면 내가 가는 식당으로 가죠.”
해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식사하고 싶지 않았지만.
분명 아침을 조금밖에 먹지 않았는데 속이 좋지 않았다.
허리를 꽉 졸라매는 드레스를 입느라 무리했나. 명치가 꽉 막힌 것처럼 불편했다.
그래도 식사를 하기로 한 것은.
‘조금만 먹으면 되겠지. 먹지 않겠다고 하면 전무님도 안 드실 것 같으니까…….’
먹고 자는 기본적인 것보다 일을 중요시하는 지한이다.
웨딩드레스를 보느라 시간을 뺏겼으니, 아마 혼자 식사해야 한다면 먹지 않을 거라고 해주는 확신했다.
어쩌면 저녁까지. 지한이 빈속으로 일하지 않길 바라며 해주는 티 나지 않게 엄지와 검지 사이를 주물렀다.
***
지한과 해주는 점심시간이 지나 한산한 중식당으로 들어섰다.
“메뉴 천천히 보시고 불러 주세요.”
두 사람을 전망 좋은 창가 자리로 안내한 직원이 메뉴판을 두고 자리를 비켜 주자, 지한은 앞에 놓인 메뉴판을 펼치며 말했다.
“마음껏 주문해요.”
“네.”
고개를 끄덕인 해주는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가장 위에 부담되지 않을 만한 음식을 찾았다.
양념이 많이 된 요리는 건너뛰고, 가벼운 식사류 위주로 훑었다.
그중 눈에 띈 것은 맑은 국물이라는 설명이 들어간 완탕이었다.
“전 이거, 완탕 먹을게요.”
지한은 메뉴판에서 해주가 손으로 짚고 있는 부분을 쳐다보곤 말했다.
“면 없는 거면 양이 적을 텐데요.”
“배가 많이 안 고파서 괜찮아요.”
“그래요, 그럼. 음료는 뭐로 할래요.”
“그냥 물 마실게요.”
지한은 더 묻지 않고 손을 들었다. 곧장 근처를 지나가던 직원이 다가왔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완탕, 차슈덮밥, 부탁합니다.”
직원이 메뉴를 확인하곤 주문을 넣으러 주방으로 걸음을 돌렸다.
***
요리는 오래 걸리지 않아 나왔다.
“청첩장은 늦어도 모레면 나올 겁니다. 윤해주 씨 아버지 성함. 성만 같게 해서 윤도훈으로 인쇄 들어갔습니다.”
“부탁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뭐 어려운 거라고.”
지한은 젓가락으로 무장아찌를 집어 먹고는 덧붙였다.
“조만간 예물 때문에 한 번 더 나와야 할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예물도 하는구나. 하긴, 형식적인 결혼이래도 결혼반지 정도는 있어야겠지.
해주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지한이 완탕 국물을 조금씩 떠먹는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가 물었다.
“다이어트라도 합니까?”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린가 싶어 해주가 지한을 쳐다봤다.
“양도 얼마 안 되는 요리인데 거의 손도 안 대고 있는 것같이 보여서.”
지한의 말에 해주는 좀 놀랐다.
적게 먹는 걸 알고 있다니. 그녀에겐 관심조차 두지 않는 줄 알았다.
“배가 많이 안 고파서 그래요.”
“본인 안색 안 좋은 건 알아요?”
“아, 그래요?”
티가 많이 나나? 안 그래도 계속 머리가 핑핑 돌고 있었다. 식은땀 때문에 속옷 와이어 부분이 축축하고, 명치 부근은 계속 불편했다.
해주가 괜히 손으로 얼굴을 쓸어 보고 있으려니 지한이 무심한 투로 말했다.
“제대로 안 챙겨 먹으니까 기운이 없을 수밖에. 불편해서 못 먹겠더라도 억지로 먹어요. 결혼 생활 동안 윤해주 씨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이상해…….
지한이 아픈 걸 알게 되니 긴장이 풀린 걸까. 해주는 몸의 이상 징후를 전보다 크게 느꼈다.
지한의 말이 끊겨 들려왔고, 짧은 대답조차 할 수가 없었다.
식은땀은 이제 한여름 뙤약볕을 맞는 사람처럼 원피스를 다 적실 만큼 줄줄 흘렀으며, 갈비뼈 가운데에선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참아야 하는데…… 잘한 거 하나 없는 주제에 전무님 앞에서 꼴사나운 모습 보이면 안 되는데.
하지만 누군가 위를 꽉 쥐고 비트는 듯한 고통에, 해주는 결국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배를 부여잡고 테이블 쪽으로 몸을 고꾸라뜨렸다.
눈을 감은 해주의 귀에 건너편 의자가 다급히 밀리는 소리가 났다. 이어…….
“윤해주 씨!”
지한의 놀란 목소리까지 들려왔다.
***
같은 시각.
우상그룹 강태규 회장은 청담동 일식집에서 점심 만찬을 즐기는 중이었다.
“요즘 전 이사 그 새끼 아주 날뜁니다. 다른 주주들 선동질하는 게 장난이 아닙니다, 회장님.”
강 회장과 식사를 함께하는 우상전자 김지찬 이사가 열을 내며 말했다.
강태규 회장이 아직 부사장이던 시절부터 그의 줄을 타서 이따금씩 떨어지는 콩고물을 주워 먹으며 이사 자리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평소였으면 자신과 반대되는 세력의 얘기에 불쾌해했을 강 회장이 오늘따라 평온했다.
“어떻게. 전 이사 사생활이라도 캐 볼까요?”
최근 1년간 강 회장이 이만 전자 대표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주장이 주주들 사이에서 퍼지고 있었다.
그 주장의 선두 주자는 전경우 이사였다.
일머리 좀 있다고 주주들 신뢰를 받고 설치는 꼴이란.
“놔둬. 어차피 그 새끼 아무 힘도 못 쓰니까.”
“하지만…….”
“내게 다, 수가 있어.”
강 회장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나뿐인 아들 지한이 결혼하고, 장인에게 우상전자 주식만 상속받으면 그는 과반이 넘는 지분을 소유하며 막강한 의사 결정권을 갖게 된다.
노인네. 언젠가 큰 도움이 될 줄 알았다. 진작 하나뿐인 딸자식에게 상속했으면 좀 좋았겠느냐마는, 이제라도 탐내던 재산이 제 손에 들어온다고 생각하니 강 회장은 희열을 느꼈다.
알아주는 부동산 재벌로, 소유하고 있는 주식만도 상당한 권호재.
그중 권호재가 가진 우상그룹 관련 주식을 탐낸 지도 어언 33년이었다. 우상그룹 선대 회장, 즉 태규의 아버지가 회사를 공격적으로 키우기 시작한 시점부터 권호재는 주식을 사들였고, 특히 우상전자 지분은 3%로, 주주 중 다섯 번째로 많이 소유하고 있었다.
아내, 권희영과 결혼한 것도 그 주식이 탐났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빌어먹게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포기하고 살았는데, 척지고 살던 아들놈이 도움이 될 줄이야.
전 이사와 주주들이 차기 회장으로 미는 이가 지한이었다.
아비 뒤통수를 치려는 괘씸한 아들놈을 다시 전자로 데려오는 게 찝찝하지만, 어차피 최대 주주가 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
능력 없는 회장이라고 뒷말을 하든 말든 전혀 개의치 않는다. 능력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가진 게 많으면 자연히 높은 자리가 따라오는 것을.
그 자리를 지키고, 또 지키면 그만이다. 권력은 능력이 아니라 돈과 자리가 만들어 주는 거니까.
적자는 새로운 인재를 뽑고 그들을 갈아 다시 채우면 그만이었다.
김 이사가 일이 있어 먼저 자리를 뜨고, 식사를 이어 가던 강 회장이 핸드폰을 들었다.
-네, 회장님.
정중한 말투였지만, 비열함은 숨길 수 없는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넘어왔다.
“그림자, 일 하나 해야겠다.”
[결혼 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