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오전 10시가 조금 넘은 시각. 윤이 한남동에 도착했다.
“해주 씨, 잘 지내셨어요?”
살가운 윤의 물음에 해주도 편안히 대답했다.
“네, 비서님께서도 잘 지내셨죠?”
“그럼요.”
윤이 차 뒷문을 열어 주었다.
“타세요. 늦지 않게 가려면 바로 출발해야 해요.”
해주는 고개를 가볍게 숙이고는 뒷자리에 올랐다.
이윽고 윤이 WS호텔&리조트가 있는 서초동으로 차를 출발시켰다.
금세 한남동 주택 골목을 빠져나갔고, 아침보다는 속이 나아진 해주는 그제야 웨딩드레스에 대한 설렘을 느꼈다.
결혼엔 크게 환상이 없었어도 웨딩드레스는 한 번 꼭 입어 보고 싶었다. 이렇게 빨리, 갑작스럽게 입어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오늘 어떤 것들을 입게 될까?
해주는 도무지 자신이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이 상상이 가지 않았다.
늘 옅은 화장에, 머리는 풀거나 질끈 묶기만 했으니 완벽하게 꾸민 모습이 어떨지 가늠이 될 수 있을 리가.
해주는 대신 지한을 떠올려 보았다. 턱시도를 입은 모습은 어떨까?
늘 입는 슈트도 멋지게 소화해 내는 그는 결혼식의 꽃이라는 신부보다도 빛이 날 것 같았다.
그녀가 새삼 반하게 되면 어떡하지, 그러지 않도록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가짜 결혼이라도 좀 설레는 게 있어요?”
윤이 물었다. 순수한 궁금증으로.
지한과 해주의 결혼에 조건이 따른다는 걸 유일하게 아는 윤이었다.
“음, 경험해 보지 못한 걸 해 본다는 설렘이 좀 있어요. 그만큼 걱정도 되고요.”
“하긴, 걱정도 클 것 같아요. 한데, 해주 씨는 전무님께 착취당하지 않으시죠?”
“착취요?”
의도를 알 수 없는 물음에 해주가 조심스럽게 되묻자 윤이 말했다.
“아이구, 단어 선택이 좀 그랬네요. 제가 요즘 밤이고 주말이고 죄다 반납하고 일만 하다 보니 좀 비관적으로 변해서…….”
“음, 전무님은 오히려 편하게 해 주세요. 오늘처럼 결혼 준비하는 것만 아니면 대부분 자유 시간이고요.”
일이 바빠 그렇겠지만, 지한은 해주에 관해 아무것도 터치하지 않았다.
비록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 심심하긴 해도 착취와는 거리가 멀었다.
해주의 말에 윤은 섭섭한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해 보면 예전에도 전무님은 저랑 해주 씨 차별하긴 하셨어요.”
“전무님께서 차별을요?”
해주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이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자 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예전에도 해주 씨는 일만 마치면 여유 시간도 주시고, 휴일도 챙겨 주셨는데 저는 365일 중 350일은 일했는데도 일 못한다고 혼났어요.”
해주는 그제야 윤의 말이 이해가 갔다. 윤의 입장에선 차별이라고 느꼈을 만했다.
2년 전, 지한이 자신에게 잘해 주었던 건 사실이니까.
재벌 집 가사 도우미 일을 하게 돼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마음에 기뻤던 한편, 해주는 걱정을 좀 했었다.
돈을 많이 주는 만큼 갑질을 하지 않을까.
하지만 걱정이 무색하게도 지한은 참 친절했었다. 다정함에 반해 그를 좋아하게 됐을 만큼.
갑작스레 그때의 감정이 생각나 해주의 마음이 씁쓸해지려는데, 다시 윤이 말했다.
“아, 물론 그게 억울하다는 건 아니구요! 제겐 은인인 전무님 뒷담화한 거 절대 아닙니다! ……전무님껜 비밀로 해 주세요. 제가 야근에 결혼 준비까지, 잠이 모자라서 잠시 미쳤었어요.”
뒤늦게 울상 지으며 말을 바꾸는 윤의 모습에 해주는 짐짓 웃음 지었다.
“그럼요. 저 방금 비서님께 아무 얘기도 못 들었어요. 무슨 말 했는지 기억도 안 나요.”
“역시 해주 씨, 여전히 좋은 사람!”
윤이 안도하며 엄지를 척 치켜들었다.
항상 먼저 살갑게 대해 주는 윤. 그야말로 여전히 좋은 사람이라고, 해주는 생각했다.
한참 도로 위를 달리던 자동차는 10시 30분이 가까워진 시간, WS호텔&리조트 서초 본사에 도착했다.
지하 1층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키고, 윤은 지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얼마간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던 그가 ‘네, 알겠습니다.’ 하고 말한 뒤, 다시 핸드폰을 내려놓고는 해주를 향해 뒤돌았다.
“해주 씨, 전무님 회의 중이라고 하시네요. 좀 늦어진다고 하셔서 모셔 올게요. 1층 카페에 가 있을래요?”
“네, 그럴게요.”
***
“독채 펜션 구역 조경 디자인 변경 시안입니다.”
매주 목요일 9시에 진행되는 리조트 개발사업부 회의가 길어졌다.
첫 삽을 뜨는 날짜가 정해졌기 때문이었다.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들은 서둘러 수정하고, 마무리 지어야 했다.
“기존엔 수목을 중심으로 창밖을 풍경 액자처럼 보이게 조경 꾸미는 방향으로 결정했습니다만, 수목을 새로운 종류로 들여야 하는 만큼 펜션 옆에 캠핑장처럼 나무 그늘을 만들고, 피크닉 테이블을 배치하는 방향으로 수정 의견 드립니다.”
지한은 조경 디자이너 이대한의 설명을 들으며 새 디자인 시안을 훑었다.
그제, 해외에서 수입해 오기로 한 수목의 공급량이 부족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신품종이라 값비싸지만, 꽃이 장관인 나무라 비수기에도 손님 유치를 기대했는데 계획이 어그러졌다.
그뿐인가. 그 나무를 기준 삼아 조경 인테리어를 하기로 했던 터라 새로 계획을 해야만 했다.
“펜션 뒤편 바비큐장하고 콘셉트가 겹치지 않겠어요?”
지한의 말에 박주아 팀장이 답했다.
“사용 용도가 다르니 괜찮지 않을까, 하는 게 팀원들 생각이었습니다. 독채 펜션은 가족 단위로 많이 이용하는 만큼, 아이나 반려동물이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고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기대할 수 있을 듯하다는 의견 드립니다.”
“그래요. 자유롭게 뛰어다닐 수 있는 개인 정원, 나쁘지 않죠. 고민 좀 해 보고 내일까지 답변드리죠.”
지한은 왼팔을 들어 은색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
10시 40분. 윤해주가 30분에 도착했으니 10분을 기다렸을 것이다.
“이만 회의 끝내도록 하죠. 나머지 건은 팀 회의 진행 후 보고받겠습니다.”
지한이 회의를 마무리 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회의실 문을 열고 나가니, 회의실 바깥에 둔 간이 의자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던 윤이 벌떡 일어서 그를 따라 걸었다.
“윤해주 씨, 로비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한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자 다시 윤은 말했다.
“이제 전자 가는 건 확정인데,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세요?”
“갑자기 전자로 가도 뒷말 안 나올 만한 명목 만들려면 무리해야지. 불미스러운 일 만들어 놓고 아버지 백으로 다시 전자에 발 들였다는 소리 들으면 열받을 것 같거든.”
“그렇죠. 마무리는 잘 지어야죠. 하지만 조금, 아주 조금은 쉬어 가며 하실 수도 있잖아요.”
윤의 걱정 가득한 말에 지한은 입꼬리를 가볍게 올렸다.
“정 비서가 쉬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니고?”
“그 김에 저도 쉬는 거죠. 사실 간절히 쉬고 싶습니다.”
당당하게 진심을 말하는 윤의 대답에 지한은 피식 웃었다.
“전자로 옮기면 정 비서 장기 휴가부터 보내 주지.”
“녹음해도 될까요?”
“그렇게 해.”
이내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했다.
지한이 안으로 들어섰고, 윤도 그 뒤를 따랐다.
***
해주는 1층 로비 한쪽에 있는 카페 테이블에 아이스아메리카노를 한 잔 두고 앉았다.
로비는 업무 시간이라 그런지 한산했다. 벽에는 작고 큰 그림들이 벽에 조화롭게 걸려 있어, 마치 미술 전시장 같은 느낌을 주는 인테리어를 구경하던 해주는 흘끗, 정문 옆에 있는 안내 데스크를 쳐다봤다.
기분 탓일까.
안내 데스크의 단발머리 직원이 이쪽을 쳐다보는 것 같았다.
곁눈질로 봐서 착각한 걸까.
해주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금 안내 데스크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때였다. 단발머리 직원과 눈이 마주친 것이.
……어?
큰 눈에 발랄한 분위기였다.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란 생각을 하던 해주가 눈을 크게 뜬 건 한순간이었다.
“아정이?”
그런 해주를 보더니 안내 데스크 직원이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맞네! 우리 언니 맞네. 해주 언니!”
아정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해주가 있는 곳까지 걸어왔다.
해주가 자리에서 일어서니 아정은 해주를 빤히 보다가 그녀를 꽉 껴안았다.
“뭐야. 뭐냐구! 왜 여기 있어, 언니가!”
“아정아.”
해주는 그런 아정의 등을 감싸 안으며 토닥여 주곤 다시 몸을 살짝 떼며 물었다.
“잘 지냈어? 난 아직 레스토랑에서 일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여기서 일하고 있었어?”
“레스토랑은 무슨! 나 여기 일 시작한 지 1년 다 돼 가.”
“그렇게나 됐어?”
“그래! 그렇게나 됐다구. 대체 뭐야아! 마지막에 통화할 때 해남 내려간다고 그랬잖아. 해남 내려가자마자 연락한다고 해 놓고 2년을 잠수 타는 게 어딨냐? 계속 연락도 안 받고! 서울은 언제 온 거야? 난 언니 서울에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왔으면 말을 해야지!”
아정이 울먹이는 표정으로 궁금한 질문들을 쏟아 내자 해주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핸드폰 잃어버려서 연락처도 다 잃었어. 그래서 연락 못 했어. 서울엔 그저께 와서 안 그래도 레스토랑으로 가 보려고 했었지.”
“바보같이 연락처를 왜 잃어버려! 내가 얼마나 애탔는지 알아? 언니 잘못됐는지 알고!”
아정이 눈물을 글썽이며 해주를 원망스럽게 바라봤다.
해주는 먹먹한 기분을 느끼며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안해. 당장 서울로 와서라도 너한테 말하고 싶었는데 사정이 있었어.”
“무슨 사정?”
“돈 벌었어야 했어. 아빠 빚 때문에.”
거짓말이다.
그때, 해주는 연고 없던 해남으로 도망치듯 내려가며 핸드폰을 해지했다.
덤프트럭 사고가 난 직후라, 사채업자들이 자신과 아빠를 쫓아올까 봐 두려웠으니까.
아정은 핸드폰을 끊기 직전, 해주가 유일하게 연락했던 사람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숨고 싶었지만, 모순적이게도 누군가 한 사람쯤은 자신의 행방을 알고 있어 주길 바랐다.
20대 초반,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하다가 만난 인연이지만, 자매처럼 의지한 사이였기에 해주는 아정에게 서울에서 마지막 전화를 걸었다.
지금이야 아빠가 있는 요양병원과 연락을 해야 해서 다시 핸드폰을 개통시켰지만, 아정의 연락처가 저장된 전 핸드폰을 없애 버린 지 오래라 다시 연락이 닿을 길이 없었다.
한번 정 준 사람은 끔찍하게 챙기는 아정이 많이 걱정할 걸 알았지만, 서울에 잠시라도 돌아올 순 없었다.
혹시나 사채업자를 마주친다면, 자신의 불찰로 인해 아빠의 안전이 위험해진다면 끔찍하니까.
폭풍 같던 시간을 아정에겐 말할 수 없기에 해주는 거짓말을 선택했다.
다행히 아정은 별 의심 없이 물었다.
“그럼 지금 핸드폰은? 있는 거지? 번호 알려 줘.”
“응, 있어. 알려 줄게.”
아정이 안내 데스크 후면 선반 아래에서 꺼낸 핸드폰을 해주가 받았고, 해주는 제 번호를 저장해 다시 아정에게 돌려주었다.
“전화 걸어 줘. 나도 저장할게.”
“알겠어. 바로 걸게.”
아정이 제 핸드폰 화면을 터치하며 해주에게 전화를 걸려던 때였다.
“아, 이따 해야겠다. 재수 없는 놈 나왔네.”
“재수 없는 놈?”
아정의 시선을 따라 가니 지한과 윤이 있었다. 윤은 재수 없음과는 거리가 먼 편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친화력 좋고, 솔직한 게 아정과 비슷한 성격이랄까.
그럼 지한에게 하는 말이겠다고 생각하는데, 다시 아정이 말했다.
“언니 내가 일 끝나고 연락할게. 이제 일해야 해. 지가 전무인 줄 아는 싸가지한테 또 찍히거든.”
“응?”
해주는 고개를 기울였다. 아무래도 지한이 아닌 윤을 향한 말인 것 같아서.
그러는 사이 지한이 가까워졌다.
[결혼 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