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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협상-14화 (14/68)

14화.

“조심히 들어가세요.”

디저트로 나온 아이스 홍시와 수정과까지 먹고 난 뒤, 지한과 해주가 권호재를 배웅했다.

기사가 문을 열어 준 뒷자리에 오르기 전, 권호재가 근엄하게 말했다.

“해주 양에게 늘 잘해라.”

“같은 소릴 몇 번이나 하시는 거예요. 제가 알아서 잘할 테니 할아버지는 건강이나 잘 챙기세요.”

“날 받아 놓은 노인네가 건강 잘 챙겨서 뭐 해.”

“그런 소리 마시고요. 자주 찾아뵐게요.”

“그래. 요즘 자주 적적하니 자주 와. 해주 양, 조심히 가고, 다음에 또 식사하지.”

“네, 할아버님.”

권호재가 손을 가볍게 들며 인사를 하고 차에 오르자, 지한은 가벼운 묵례로, 해주는 정중하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이내 권호재를 태운 검정 세단이 떠났다. 골목 끝까지 멀어졌을 때, 해주와 지한도 곧장 주차해 놓은 차로 향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차에 올랐을 때였다.

“전무님, 이거 돌려드릴게요.”

안전벨트를 매던 지한이 옆을 돌아보자 해주가 권호재가 준 돈 봉투를 내밀고 있었다.

“됐습니다. 할아버지가 윤해주 씨한테 주신 거니 안 돌려줘도 됩니다.”

“하지만…….”

해주는 차마 그러지 못하겠다는 듯 손을 거두지 못했다.

지한과 정말 사랑해서 결혼하는 거라면 기분 좋게 받았겠지만, 이 결혼은 계약을 수반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자신의 큰 잘못으로 하게 된 계약이었다.

“받아 둬요. 내가 받으면 할아버지 성의 무시하는 꼴이 되니까.”

“아…….”

“원하는 대로 써요. 아버지 병원으로 뭐라도 사서 넣어 드리든지.”

“감사해요.”

“뭘, 내가 준 것도 아닌데.”

지한이 차를 출발시켰다.

그제야 해주는 가방을 열어 그 안에 돈 봉투를 고이 챙겨 두었다.

아빠가 좋아하는 베이커리에서 빵을 사서 보내면 좋을 것 같았다.

손자와 결혼할 사이라고는 하지만, 처음 보는 자리에서 큰 호의를 보여 준 권호재의 선물도 하나 사고.

‘전무님 것도…….’

해주는 고민하다 말고 지한을 흘끗 쳐다봤다.

어쩌면 그가 싫어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괜한 짓 말고 해내야 하는 일이나 잘하라고 할지도.

그때였다. 해주가 어깨를 움찔, 작게 움직였다.

정지 신호에 걸려 차를 멈춘 지한이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려 눈이 마주친 탓이었다.

“왜. 할 말 있어요?”

무미건조한 지한의 물음에 해주는 애써 당황스러움을 숨기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없어요.”

지한은 해주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는 사실에 특별히 개의치 않는다는 듯 말했다.

“인사도 마쳤으니 이대로 결혼 서두를 겁니다. 전반적인 결혼 준비는 정 비서 통해 진행할 거고, 윤해주 씨와 함께해야 하는 것들은 평일에 시간 나는 대로 준비할 생각이니 계속 외출은 자제해요.”

“네, 알겠습니다.”

때마침 신호가 바뀌었다. 차가 다시 출발했고, 해주는 다시 지한과 당황스럽게 눈을 마주치는 일이 없도록 반대편 차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

“어르신, 오랜만에 기분 좋아 보이십니다.”

권호재의 곁을 따라다니며 운전기사 노릇을 해 주는 한섭이 룸 미러로 권호재를 보며 말했다.

“기분 좋지. 좋고말고.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야. 마음이 푹 놓여.”

흐뭇한 표정을 짓던 권호재는 일순간 떠오른 생각에 올렸던 입꼬리를 내렸다.

이틀 전, 강 회장이 그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어르신. 그 애, 지한이 가정부 했던 여자애입니다. 2년 전에도 지한이에게 접근하더니 이제는 기어코 결혼까지 한답니다. 지한이 그렇게 아끼시면서, 돈 보고 달려드는 천한 애를 지한이와 결혼시킬 작정이세요? 제 말은 통 듣지 않으려고 하니 어르신께서 설득해 주세요.’

사람 참 변하지 않는다.

35년 전, 희영과의 결혼 하겠다고 말하던 그 순간, 강태규는 그때도 지금과 비슷하게 말했었다.

‘희영 씨 그런 천한 놈한테 주실 겁니까? 가진 것 하나 없이 사랑만으로 행복하게 살 수 없는 거 아시는 분이잖습니까. 저는 둘 다 해 줄 수 있습니다. 풍족하게 살게 해 줄 수 있고, 행복하게 해 줄 자신도 있습니다.’

작은 사업체를 크게 성공시킨 아버지를 둔 것도, 본인 또한 제 아버지처럼 높은 곳에 목표를 두는 것도, 무엇보다도 패기 넘치는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그게 아끼는 딸자식을 외롭게 만드는 길인 줄 모르고.

그땐 자신도 욕심 가득한 못난 사람이었던 탓에 태규의 검은 욕망이 보이지 않았다.

희영이 웃지 않는 날이 많다는 걸 알면서도 무시했던 날들, 결혼 1년 만에 저를 빼닮은 아이를 낳았으니 행복할 거라고 멋대로 여긴 시간들을 그는 후회한다.

이제 더는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2년 전에 지한이 웃게 했던 아가씨가 해주 양이었구만.”

과거 사위였던 태규의 말에 의하면, 그 1년 동안 지한의 곁에 있던 아이라고 했다.

딱 그때였다. 희영이 세상을 떠나고 지한이 처음으로 웃었던 때가.

1년 뒤, 다시 전처럼 감정을 잃어버린 사람인 양 굴던 모습이 어찌나 안타까웠는지.

그는 바랐다. 부디 손주가 예전과 같아지기를.

권호재는 선하고 싹싹했던 해주를 떠올리고는 다시 한섭에게 말했다.

“한섭이 자네한테도 못 해 준 것만 생각이 나는구만.”

“무슨 말씀이세요. 늘 잘해 주셨죠.”

“거짓말도. 내가 언제 늘 잘해 줬어, 구박도 많이 했는데. 그런데도 20년이나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애정 어린 잔소리였던 거 잘 압니다. 제가 더 감사하죠. 끼니도 한 끼를 겨우 먹던 저희 애들 학비도 보태 주시고 결혼까지 시켜 주셨는데요. 늘 감사하는 마음뿐입니다.”

“그리 생각해 준다니 고맙구만. 남은 시간 잘 부탁하네.”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어르신.”

권호재는 차창 밖을 바라봤다. 기운 좋게 나무마다 꽃봉오리며 새싹을 틔우고 있었다.

***

목요일 아침, 여느 때보다 조금 이른 시간. 오전 7시 반에 해주는 기상했다.

아직 해가 다 뜨지 않아 어스름한 사위 속, 상체를 천천히 일으킨 해주는 배 위에 손을 올렸다.

그녀는 미간에 인상을 쓰고 있었고, 이마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명치께를 손으로 둥글게, 뭉친 근육 풀듯 풀며 해주는 고통에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며칠 전부터 속이 불편했다. 간헐적으로 꽉 뭉치는 것도 같고, 위가 꼬이는 느낌도 약하게 났다.

그래도 식사할 때나 그랬지, 아침부터 이런 적은 없었는데…….

얼마간 마사지하니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아 해주는 그만 손을 뗐다.

이미 출근했을 오 여사가 식사를 준비하고 있을 터였다. 해주는 이만 침대에서 일어섰다.

아무래도 아침밥은 건너뛰겠다고 말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주방에 도착하니 인덕션 앞에 선 오 여사의 뒷모습이 보였다.

“여사님, 좋은 아침이에요.”

해주의 살가운 인사에 오 여사가 몸을 반쯤 빙글 돌며 그녀를 반겼다.

“일찍 일어났네요? 좀만 기다려요. 오늘은 전무님 해주 씨랑 먹는다고 아직 안 드셨으니 같이 먹어요.”

“그래요?”

“일 바빠서 항상 새벽같이 먹고 출근 준비하시는데, 결혼할 여자 친구가 있으니 가끔이나마 여유도 부리시네.”

해주는 미소 지었다.

지한이 자신과 단둘이 식사하려는 이유가 함께 밥을 먹고 싶은 게 아니란 건 알지만 굳이 티는 내지 않았다.

아마 결혼 준비에 관한 얘기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저녁엔 주로 야근하고 자정 가까이나 돼서 집에 돌아와 곧장 잠자리에 드니, 해주가 지한과 결혼에 대한 얘기를 나눌 만한 시간은 비교적 여유로운 아침뿐이었다.

아침을 건너뛰려 했더니, 조금이라도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아무것도 먹지 않는 자신을 앞에 두고 지한이 혼자 식사하며 얘기하긴 모양새가 이상할 것 같으니까.

마침 해주도 결혼에 관해 지한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기도 했다.

그때였다. 드레스 룸 문이 열리고 출근 준비를 마친 지한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

***

“11시에 정 비서가 데리러 올 거예요. 본식 드레스 보러 갈 겁니다.”

지한은 식사를 시작하자마자 본론을 꺼냈다.

세탁실에 간 오 여사에게 대화 소리가 들리진 않겠지만, 혹시 몰라 그런지 목소리는 평소보다 부드러웠다.

“갑작스럽겠지만 오늘이 아니면 한동안 시간 내기 힘들 것 같아서. 드레스 본 후에 점심 같이하죠.”

지한이 웨딩드레스 숍 투어 날짜를 지정받은 건 어제 점심때였다.

윤이 가장 빠른 예약 날짜를 잡아 온 것이었는데, 지한은 본래 늦어도 그날 저녁까진 해주에게 얘기해 주려고 했었다. 그런데 리조트 개발팀과 중요한 회의가 늦어지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다.

회의 내용을 정리하고 집에 돌아오니 자정이 가까웠다. 그제야 알리기엔 해주가 이미 잠든 터라 다음 날 아침을 기약했다.

그래서 이제야 말하게 된 것이다.

해주에겐 갑작스럽겠지만,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결혼을 순조롭게 진행시키려면 사정을 봐줄 여유가 없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말해요.”

지한의 허락이 떨어지자 그제야 해주는 목소리를 낮춰 조심스럽게 물었다.

“청첩장이요. 아빠 이름을 가명으로 넣을 수 있을까요?”

“가명으로?”

“걱정이 좀 돼서요. 평범한 집안에서 하는 결혼식이 아니고…… 제 이름은 흔하지 않은데 아빠 이름까지 같으면 혹시 사채업자가 알아채기 쉬울까 봐요.”

“결혼식은 비공개고, 기자는 출입 금지할 예정이에요.”

지한이 그럴 리 없다는 듯 말했다. 그럼에도 해주의 표정에 걱정이 어려 있자 그가 덧붙였다.

“걱정하는 일은 일어날 리 없다고 확신하지만, 원한다면 바꾸죠.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지한이 젓가락을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내려놓고는 말을 덧붙였다.

“더 요구할 사항 있어요? 미리 말해요. 결혼식까지 시간적 여유가 없으니 앞으론 못 들어줄지도 모르니까.”

“더는 없어요. 부탁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해주의 감사 인사에 지한은 큰 부탁이 아니라는 듯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곤 물컵을 집어 들었다.

물 한 모금을 마신 그는 다시 컵을 내려놓고는 의자를 뒤로 뺐다.

“아침 회의가 있어서. 먼저 일어나죠.”

해주가 그를 배웅하기 위해 따라 일어나려고 하자, 지한은 그녀를 제지했다.

“마저 먹어요.”

“아…… 다녀오세요.”

그가 현관으로 멀어졌다. 이윽고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고, 해주는 그제야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때마침 세탁실 일을 마친 오 여사가 주방으로 돌아왔다.

“전무님 출근하셨나 봐요?”

“네, 방금 나가셨어요.”

해주는 대답하곤 말을 덧붙였다.

“여사님, 저 이만 먹을게요.”

“벌써? 밥 그대로 있는데.”

“속이 좀 안 좋아서요.”

아침부터 불편했던 속에 밥이 들어가자 통증이 이는 것 같았다.

점심에 지한과 웨딩드레스를 보러 가야 하는데, 이대로 더 먹다간 탈이 날 것 같아서 해주는 더 먹을 수 없었다.

“결혼 앞두고 긴장했나? 원체 하얘서 티는 안 나는데 좀 창백한 것 같기도 하고. 죽 끓여 줘요?”

“아니에요, 그냥 빈속이 편할 것 같아요.”

해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곤 제 몫의 수저와 밥공기를 들고 싱크대로 향하며 말했다.

“여사님 커피 내려 드릴게요.”

“됐어요. 속도 안 좋으면서 무슨.”

“밥 맛있게 차려 주셨는데 다 남긴 거 죄송해서 제가 해 드리고 싶어요.”

“내가 알아서 마실 테니까 들고 있는 그릇도 그냥 싱크대 위에 두고 들어가요. 아까 들어 보니 웨딩드레스 보러 간다던 것 같은데, 어서 들어가서 쉬다가 나가야지.”

윤이 도착한다는 시간까지 3시간 정도 남았다. 1시간 준비 시간을 빼면 쉴 수 있는 시간이 적어 오 여사의 말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럼 들어가 볼게요.”

“그래요. 어서 들어가 쉬어요.”

[결혼 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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