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해주 양, 나이가 드니까 식사를 제때 못 먹으면 기력이 없어요. 그러니 먼저 먹은 거 이해해 줘요.”
권호재가 말했다.
신사적인 말투에 해주가 얼른 손을 저었다.
“식사 빨리하실 수 있게 저희가 더 일찍 왔어야 했는데요.”
“시간 맞춰 잘 왔는데 뭘. 여기 식사 맛있으니 많이 먹고 가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말씀 낮춰 주세요.”
“그럴까?”
강 회장이 껄껄 웃으며 곧장 말을 놓았다.
굳이 따지자면 인상은 지한처럼 서늘한 편인데, 웃는 모습은 배포가 커 보였다.
해주는 그 미소에 한결 더 편해진 마음으로 테이블 한쪽에 가지런히 정리된 빈 컵 두 개를 꺼냈다.
권호재는 이미 물 잔을 채웠으니 자신과 지한의 것을 채우려는데, 문득 권호재가 말했다.
“지한이가 해라.”
갑작스러운 명령에 해주가 영문을 몰라 행동을 멈추고 권호재를 바라보니, 그가 해주를 향해 윙크하고 지한을 보며 말했다.
“요즘 세상에선 잡일은 남자가 하는 게야. 그래야 평생 예쁨받고 사는 거다.”
지한은 기막힌 웃음을 지었다.
“할아버지께서 하실 말씀은 아닌데요.”
“그래서 후회하고 살지 않냐. 저승 가면 네 할머니한테 무릎 꿇고 싹싹 빌 생각이다. 넌 후회할 짓 하지 마.”
시한부 판정을 받은 뒤로 참 많이 변한 외조부를 보며 지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곤 그는 해주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줘요. 내가 하게.”
“네? 아니…….”
해주는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권호재가 기껏 배려하며 말해 줬는데 괜찮다고 사양하기도 눈치 보였다. 머뭇거리는 그녀를 보며 다시 지한은 말했다.
“식사하는 내내 할아버지가 날 흘겨보실 거예요. 체하기 싫으니 줘요.”
해주가 마지못해 물통을 건네자 지한은 해주와 자신의 물컵에 물을 따랐고, 물이 조금 남은 권호재의 잔도 다시 채워 주었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음식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두 분 손님, 죽과 세 가지 전 함께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
메인 식사로 떡갈비를 먹고 나니 어느덧 식후 디저트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식사 자리는 기분 좋게 무르익었다.
“결혼 날짜는 3주 뒤, 토요일 어떠세요.”
지한이 티슈로 입을 가볍게 닦으며 물었다.
식사하는 동안 가벼운 근황을 나누고, 조금 전부턴 구체적으로 결혼식에 대한 얘기를 하기 시작했던 참이었다.
“날짜야 나는 상관없지. 두 사람이 상의해. 식장은?”
“WS호텔, 플래티넘 관에서 진행할 생각이에요.”
“그래. 호텔 홍보도 되고 좋은 선택이지. 날짜가 촉박한 결혼식이니 하객에게 축의금은 받지 않는 게 좋지 않겠냐.”
“안 그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순조롭게 얘기가 오고 갔다.
하지만 해주는 슬슬 긴장하기 시작했다.
아직 권호재는 그녀에 관한 얘기를 꺼내지 않았으니까.
어디 사는지, 대학교는 어디를 나왔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결혼을 전제로 사귀는 손자의 여자 친구를 소개받고, 개인사를 묻지 않을 리 없었다.
생각보다 더 별 볼 일 없다는 걸 알면 지한의 외조부가 어떻게 나올지 걱정이었다.
강 회장처럼 문전 박대를 할까, 아니면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을까.
뭐든, 좋은 반응이 예상되진 않았다.
해주는 문득 씁쓸해졌다. 예전엔 가진 게 없어도 이렇게 바보같이 굴지 않았었는데.
가진 게 없으면 더 열심히 살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하찮게 여겨도 늘 당당했던 과거가 그립다고 생각할 때였다.
“결혼식, 동시 입장할 생각입니다.”
지한이 말했다.
계속 웃는 얼굴을 하던 권호재는 미간을 설핏 좁혔다.
“요즘 세상이 아무리 바뀌었다고 해도 그건 아니다. 해주 양 아버지가 얼마나 서운하시겠냐. 사돈어른하고는 상의한 거냐?”
권호재의 시선이 해주를 향했다.
아버지가 동의하신 거냐고 묻는 듯한 눈빛에 해주는 긴장했다.
결혼할 때는 상대방이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는지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있었다.
한데 불완전한 가족. 불운한 가정. 그걸 제 입으로 말해야 한다니.
해주가 눈이 마주친 권호재에게, 병상에 누워 있는 아빠 얘기를 하려던 찰나였다.
“상의 못 했어요. 해주 씨 아버님 아파서 병원에 계시고, 어머니는 안 계세요. 동시 입장할 수 없을뿐더러, 혼주석은 비워 놔야 합니다.”
“뭐야?”
지한의 얘기를 잠시 가만히 곱씹어 보던 권호재가 혀를 쯧쯧 찼다.
해주는 그 표현이 불편한 기색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그는 의외로운 말을 꺼냈다.
“그랬구만. 인상이 밝아서 조금도 생각지 못했는데, 고생 꽤나 하고 자란 모양이구만.”
권호재는 해주를 안쓰러워하는 눈빛으로 말을 덧붙였다.
“나도 부모님을 일찍 잃었지. 고아로 자라는 동안 고생 꽤나 했어. 참 외로웠는데, 일찍 가정 꾸리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자식들 보고 어찌나 행복하던지.”
의외의 위로였다. 조금도 예상치 못한.
“해주 양도 지한이랑 가정 꾸려서 지난 외로움 잊어. 대를 이을 아들도 좋지만, 딸자식 있어야 집안이 화목하니 해주 양 닮은 딸 낳으면 좋겠구만. 이왕이면 아들, 딸 하나씩 낳아도 좋겠어.”
긴장감이 풀린 탓일까? 아니면 진심으로 위로하는 권호재의 목소리가 그간의 설움을 달래 주는 것 같아서일까.
어르신의 고지식한 말에도 해주의 마음이 뭉클해졌다.
울컥하는 감정을 애써 누르며 해주는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전무님이랑 좋은 가정 꾸릴게요.”
“가정이 불우한 건 죄가 아니야. 당당하게 굴어야 사람들이 무시를 안 하지. 내 경험담일세.”
“할아버님 말씀도 잘 새겨듣겠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권호재의 시선에 긴장이 풀리고, 편안해진 해주의 표정이 들어왔다.
식사 내내 살갑게 굴면서도 지나치게 경직된 모습이 눈에 선명히 보였는데, 그 이유를 알고 나니 안쓰러웠다.
물론 예전의 그였다면 지한의 짝으로 해주를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그의 집은 고등학생 때 서울 친척 집에 겨우겨우 빌붙어 살기 전까지 여름엔 비가 새고 겨울엔 찬 바람이 새는 기울어져 가는 판잣집이었다.
개천에서 난 용이 될 때까지 얼마나 갖은 고생을 했던지.
서럽도록 시린 언 밥과, 아무도 무시하지 못하는 부를 축적했어도 잊히지 않는 칼날 같은 말들을 생각하면 지한이 더 풍족하게 살 수 있는 집안과 연을 맺어야 한다고 강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끼던 딸아이, 희영을 그렇게 결혼시키고, 외롭게 세상을 떠나게 만든 뒤로 그의 생각은 달라졌다.
자신 또한 시한부 판정을 받게 되니 돈만 좇으며 살던 세월이 다 부질없이 느껴지기도 했다.
이제는 그저 지한이 평안한 가정에서 마음이 풍족해지길 바랄 뿐이었다.
결혼 얘기가 나오자마자 지한이 눈앞의 해주와 결혼한다고 했을 땐 의심했었다.
지한이 제 아비를 닮아 우상전자 대표 자리를 욕심내고 있는 걸 알고 있으니,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 아무 여자애나 데려온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오늘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안심했다.
희영이 세상을 떠난 뒤로 늘 차갑고 타인에게 선을 긋던 지한이 해주를 세심히 살폈다.
겉으론 티 나지 않았지만, 식사 내내 해주가 불편하지 않은지 살피고, 이따금 가벼운 미소를 짓기도 했다.
지한은 희영이 살아 있을 땐 제 엄마를 그렇게 챙겼었다. 생색내지 않으며 세심하게.
손자에게 또다시 소중한 누군가가 생겼다는 생각에 호재는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권호재가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지한을 향해 말했다.
“동시 입장하도록 하고, 다른 것도 해주 양 불편하지 않게 맞춰 줘.”
“그럴게요.”
다시 권호재가 해주를 바라봤다.
“어쩐지 잘 먹지를 못하더니. 긴장 많이 했던 모양이야.”
해주는 죄송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맛있는 밥 사 주셨는데 맛있게 먹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괜찮아. 결혼 전에 탈이 나면 안 되지. 양껏 먹어야지.”
긴장해서 그런가. 속이 좋지 않았다.
억지로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으려 했지만, 속에서 받지 않았다.
물론 비단 오늘만의 일은 아니었다. 요즘 계속 조금만 먹어도 얹힐 것 같고, 속이 울렁거렸으니까.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미닫이문이 열리며 직원이 들어왔고, 식사가 끝난 걸 확인하더니 상 위를 한 번 정리했다.
살가운 미소를 띤 직원이 디저트를 내오겠다며 방을 나섰을 때였다.
“자, 즐거운 만남이 끝났으니 용돈을 줘야지.”
불쑥, 권호재가 상 위에 두툼한 흰 봉투를 올려 두더니 그대로 해주 쪽으로 밀어 주었다.
“네? 아니에요.”
갑작스러운 용돈에 해주가 놀란 눈으로 손을 내저으며 거절하자, 권호재는 다시금 해주의 앞으로 봉투를 깊숙이 밀어 넣었다.
“내가 가진 게 돈뿐이야. 젊어서는 욕심부리며 모았는데, 죽을 때 다 돼 그런가, 가져갈 수도 없는 돈 뭘 그리 아득바득 열심히 모았나 싶더라고.”
권호재의 표정이 쓸쓸했다. 지난 세월에 대한 오만 가지 감정이 그의 주름진 낯 위로 스쳤다.
“말년에나마 좋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 그러니 늙은이 성의 무시 말고 받아 둬.”
해주가 난감해하며 지한을 보자, 지한도 받아 두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주는 그제야 조심스럽게 봉투를 집어 들었다.
“감사합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며칠 전에 강 회장에게 돈 봉투로 뺨을 맞을 뻔했을 땐 자존감이 무너지는 것 같았는데, 권호재의 다정함에 다시 기운이 났다.
해주도 옆에 두었던 쇼핑백을 조심스레 집어 들었다. 안 그래도 타이밍을 보고 있었는데 지금이 선물 드리기 딱 좋을 것 같았다.
“이거, 약소한 선물이지만 받아 주세요.”
오는 길에 청담동 유명 전통 과자점에 들러 사 온 정과 세트와 조청 한과 세트였다.
권호재는 사양하지 않고 받아 들며 껄껄 웃었다.
“빈손으로 와도 되는데, 뭘 이런 걸 다 사 와 그래. 어이구, 취향도 딱 맞췄구만. 안 그래도 요즘 생각나던 참이었는데.”
“뭘 좋아하실지 몰라 전무님 조언을 구했어요.”
해주의 말에 권호재는 흐뭇한 시선을 지한에게로 돌렸다.
“할애비가 뭘 좋아하는지 기억은 하는구나. 무심한 줄만 알았더니.”
“좋아하시는 거, 싫어하시는 거 다 기억합니다.”
무뚝뚝한 말투였지만 그럼에도 손자의 관심이 좋은지 권호재는 기분 좋게 웃으며 해주를 바라봤다.
“내 손자 잘 부탁해. 해주 양도 알다시피 우리 지한이가 무뚝뚝해도 속 깊은 놈이야. 정도 많고.”
손자를 보는 따뜻한 시선에 해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지한 씨 다정한 사람이에요. 저야말로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직 결혼을 한 게 아님에도 권호재는 해주를 진짜 손주며느리처럼 대해 주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가족의 정. 그 따뜻함에 해주는 다짐했다.
살가운 손주며느리가 되어 드리겠다고. 다정하게 대해 주시는 만큼, 짧은 결혼 생활 동안 좋은 부부 사이를 연기하겠다고.
[결혼 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