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거실을 지나 현관을 나섰다. 정원을 지나 대문까지 향하는 동안, 해주는 걸음 빠른 지한을 버겁게 쫓아갔다.
대문을 넘자 바로 앞에 지한의 검정 세단이 있었다.
지한이 말없이 운전석 문을 열었고, 해주는 눈치를 보며 조수석에 올라탔다.
지한의 옆자리에 앉은 해주는 무릎에 시선을 둔 채로 긴장했다.
화가 난 표정이 분명한데, 지한은 두 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고요할 리 없는 차 안이 조용하니 꼭 언제 휘몰아칠지 모르는 태풍의 눈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고 해주는 생각했다.
“내가 참. 어이가 없는데.”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핸들을 쥐고 있던 손을 떼고 팔짱을 낀 그가 기막히다는 표정으로 말을 덧붙였다.
“겁이 없는 거예요, 아니면 생각이 짧은 겁니까?”
“……죄송합니다.”
“무슨 생각으로 아버지 만나러 왔어요? 잘 보일 사람은 할아버지니 무시하라고 경고했을 텐데. 여사님께 연락받고 내가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압니까?”
“전무님께…… 도움이 되고 싶었어요.”
“오만하네.”
지한이 짜증스레 손으로 머리카락을 넘겼다.
“아버지, 잔인한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을 혼자 상대하면서 뭘 도움이 되겠다고.”
잔인한 사람.
강 회장을 따로 만나지 않았다면 몰랐을 텐데, 만나고 나니 알 것 같았다.
가까이 왔을 때 살기를 느꼈으니까.
해주는 할 말이 없었다. 고개를 숙인 채 그녀는 말했다.
“죄송해요.”
“죄송할 짓은 제발 하지 말아요. 내가 안 갔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지한은 짜증을 삼키려는지 잠시 눈을 감았다.
그 잠깐 사이, 해주는 그를 바라봤다.
지한은 많이 피곤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매일 아침 일찍 출근해 이르면 밤 10시, 늦으면 새벽에 퇴근하곤 하니까.
과거에도 바쁘긴 했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해주는 그게 자신 때문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괴로웠다.
미안했다. 지한이 자신 때문에 우상전자에서 쫓겨났고, 다시 본래 자리를 찾기 위해 원치 않은 결혼을 해야 한다는 게.
무탈한 결혼이라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해 또 신경 쓰게 만들어야 한다는 게 미안했다.
이내 지한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새 감정을 가라앉혔는지, 그가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여사님께 알린 건 잘했습니다. 앞으로도 오늘 같은 일 있으면 꼭 알려요.”
처음엔 지한에게 알리지 않으려고 했다.
그럴 가능성은 낮겠지만, 혹시나 자신이 강 회장을 만난다는 걸 알렸다가 지한의 우상전자 복귀가 정말로 어려워질까 봐.
잘 처신하라는 말이 유독 마음에 걸렸다.
차라리 자신을 해코지한다면 참겠지만, 지한의 우상전자 복귀가 좌절된다면 미안해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처음엔 그렇게 가볍게 생각했는데, 집을 나서던 길에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혼자 갔다가 일이 더 잘못되면 어떡하나, 지한의 분노를 사게 되면 어떡하나.
때문에 집을 나서며 뒤늦게나마 오 여사에게 부탁했다.
‘여사님, 제가 핸드폰이 지금 먹통이라서요. 혹시 지한 씨한테 연락 좀 넣어 주실 수 있을까요? 저 강 회장님 만나 뵈러 간다고 대신 좀 전해 주세요.’
지한의 핸드폰 번호를 모른다고 말했다간 이상한 눈초리를 받을까 봐 먹통이라고 둘러댔다.
오 여사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고, 해주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네. 꼭 알릴게요.”
“혹시 모르니 할아버지 뵙는 주말까진 집에만 있어요. 바깥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생각 말고. 할아버지께 얼굴도장 찍으면 함부로는 못 할 테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해주의 대답에 지한이 슈트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이내 핸드폰을 꺼낸 그가 화면을 켜 해주 앞에 내밀었다.
“윤해주 씨 핸드폰 번호 남겨요. 뭘 알리려면 연락이 돼야 할 테니.”
해주는 그에게서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그러곤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저장해 다시 지한에게 돌려주었다.
지한이 곧장 저장된 번호로 전화를 걸자 해주의 가방에 든 핸드폰이 전화벨을 울렸다. 해주가 핸드폰을 찾기 위해 가방을 열자 다시 그가 말했다.
“내 번호 저장해 놔요. 급한 일 생기면 시간 상관없으니 개의치 말고 연락해요.”
“네, 그럴게요.”
곧바로 차가 출발했다.
두 사람은 불쾌한 높은 담과 빠르게 멀어져 갔다.
***
하루가 유독 긴 날이었다.
샤워 후 깨끗한 잠옷으로 갈아입은 해주는 침대에 걸터앉아 지친 몸을 쉬었다.
강렬한 기억이 두 가지 생각났다. 돈 봉투로 뺨을 맞을 뻔했던 순간과, 지한이 나타나 자신을 데려간 순간.
강 회장이 돈 봉투를 쥔 손을 휘두르려 했을 땐 그냥 체념했었는데…….
지한이 나타난 순간 서러움으로 바뀌었다.
왜 내 인생은 이러냐고.
차마 지한에게 투정 부릴 순 없어 참았지만, 혼자 남은 이 순간엔 누구에게라도 어리광 부리고 싶었다.
이 순간, 생각나는 사람은 둘 있었다.
아빠와 라일락커피 사장님.
해주는 핸드폰을 들었다.
아빠는 자신에 대한 죄책감으로 말문을 닫은 지 오래돼 전화할 수 없었다. 그래서 라일락커피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내 사장이 전화를 받았다.
불안하게 흔들렸던 감정이 순식간에 안정됐고, 해주는 먹먹한 기분을 숨긴 채 애써 웃음 지으며 말했다.
“사장님. 서울 도착하자마자 연락드리려고 했는데 일이 바빠서 이제 연락드려요. 저 없다고 술 막 드시는 거 아니죠?”
오래도록 수다를 떨어야지.
내일 다시 힘낼 수 있도록 말이다.
***
주말은 금방이었다.
아침이 돼 방 커튼을 여니 지난 밤 내린 봄비로 세상이 유독 맑아 보였다.
오랜만에 외출하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요 며칠, 해주는 지한의 말을 따라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처음엔 괜찮았는데, 시간이 지나니 이제 좀 답답하던 참이었다.
그나마 오전엔 오 여사와 수다를 떨 수 있었는데, 오후에 오 여사가 퇴근한 뒤면 적막 가득한 집에 혼자 덩그러니 놓여 좀 쓸쓸했다.
지한은 바빴다. 해주가 이틀 정도는 그가 출퇴근하는 모습도 못 볼 만큼.
배달시킨 브런치를 아일랜드 식탁에서 마주 보고 앉아 먹는 게 어색할 만큼.
“점심 한정식 식당으로 갈 거예요. 좌식 테이블이니까 편하게 입어요.”
드레싱을 넣지 않은 샐러드를 포크로 찍으며 지한이 무심하게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던 해주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할아버님께서 절 마음에 들어 하실까요?”
“글쎄. 적어도 반대는 하지 않으실 겁니다.”
지한이 샐러드를 씹어 넘기곤 말을 덧붙였다.
“마음 편하게 먹어요. 아버지와 달리 권위적인 타입 아니시니. 까다로우신 편이긴 하지만 처음 보는 자리에서 무례하게 구실 분은 아닙니다.”
지한이 걱정 말라는 듯 말했지만, 그럼에도 해주는 긴장했다.
앞서 강 회장에게 부정당했으니까.
타인에게 그토록 멸시당한 건 처음이라 그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 있었다.
이번에, 지한의 외조부에겐 인정받고 싶었다. 그래서 결혼이 순탄하게 흘러가길.
자신은 없었지만 어차피 부딪쳐야 하는 일이기에, 해주는 마음을 굳게 먹고 다시 물었다.
“그럼, 할아버님께선 뭘 좋아하세요? 빈손으로 가기 뭣해서요.”
해주는 질문하고서 지한의 눈치를 봤다.
강 회장을 만날 땐 시간이 촉박해 빈손으로 갔다. 하지만 이번엔 시간이 있었고, 무엇보다 지한의 외조부가 이 결혼에 결정권을 가지고 있으니 작은 점수라도 따고 싶었다.
하지만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입장에서 괜한 참견은 아니었을까 싶었는데, 다행히 지한은 대수롭지 않았는지 가볍게 대답했다.
“한과 좋아하십니다. 나도 뭐 하나 사 가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어요. 자주 가는 가게 있으니 가는 길에 들르죠.”
지한이 때마침 식사를 마쳤다. 그가 샐러드와 함께 배달시킨 커피로 입을 헹구고는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럼 천천히 준비해요.”
지한이 자리를 뜨자, 해주도 포크를 내려놓았다.
먹는 척만 하며 거의 먹지 않았지만, 더 먹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요즘 내내 이런다. 지한과 결혼을 무사히 치러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인지 밥이 잘 삼켜지지 않았다.
해주는 손으로 명치께를 살짝 감쌌다가 뗐다.
체하는 것보단 배고픈 게 낫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
화창한 날씨만큼이나 화사한 색의 옷을 골라 입은 해주는 지한을 따라 청담동에 위치한 한정식집, 다림에 도착했다.
지한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해주가 먼저 작은 정원이 딸린 분위기 좋은 목조 건물로 들어섰다.
카운터 앞에 서 있던 직원이 두 사람을 공손히 맞이했다.
“예약하셨습니까?”
“강지한입니다.”
“두 분,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홀 자리는 따로 없는지 카운터 옆으로 긴 복도가 있었고, 양옆이 전부 방이었다.
직원은 그 무수한 방들 중 ‘춘’이라 적힌 방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창호지 위에 얇은 나무살을 세로로 길게 붙인 미닫이문을 열자, 먼저 와 있던 권호재가 미리 받은 죽을 천천히 음미하며 떠먹고 있었다.
“왔구나.”
인기척에 문 쪽을 바라본 권호재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 순간, 해주는 조금 안심했다.
권호재의 표정이 부드러웠다. 손자인 지한을 바라볼 때뿐만이 아니라, 해주를 향한 눈빛도 그랬다.
“일찍 오셨네요.”
“시한부 인생 얼마 남지 않았으니 빨리빨리 움직여야지. 느긋하게 살기엔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 앉거라.”
농담하며 웃은 권호재가 맞은편 자리를 가리키며 앉기를 권했다.
지한이 해주에게 먼저 들어가라며 안쪽을 향해 손짓했고, 해주는 정식 인사를 나누기 전에 권호재에게 고갯짓으로 먼저 인사를 하고서 안쪽 자리에 앉았다.
이윽고 지한도 자리를 잡자, 권호재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예비 손주며느리 반가워요.”
권호재의 살가운 인사에 해주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미소 띤 얼굴로 그의 손을 맞잡았다.
“안녕하세요, 윤해주입니다.”
해주는 인사하며 조심스럽게 권호재를 바라봤다.
흰색 양복에 염색하지 않은 흰머리. 참 과감한 패션이었다. 그런데도 풍채가 좋고 슈트가 잘 어울려서 그런지 과하다기보단 오히려 멋쟁이처럼 느껴졌다.
지한에게서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오늘 본 권호재의 모습은 전혀 병세가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해주는 잠시 강 회장을 떠올려 보곤 확신했다.
지한의 외모는 외탁한 모양이라고. 그가 나이가 들면 딱 그의 외조부 같은 모습일 것 같았다.
[결혼 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