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11시, 한남동 집 앞에 검정 고급 세단 한 대가 섰다.
운전석에서 정장을 잘 갖춰 입은 남자가 내렸다. 아마도 강태규 회장의 비서일 남자. 그가 해주 앞으로 걸어왔다.
“윤해주 씨 맞으십니까.”
정중하고도 사무적인 남자의 목소리에 해주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네.”
그러자 남자는 정중히 차 뒷문을 열어 주었다.
“타시죠. 회장님 댁으로 모시겠습니다.”
정중한 행동과 말이었지만, 말투는 엄격했다.
해주는 미묘하게 자신을 낮잡아 보는 태도를 느끼며 차에 올라탔다.
이내 차가 출발했다.
해주는 불안한 마음에 어제보다 좀 더 보수적인 스타일의 원피스 치맛자락을 애꿎게 털어 내며 걱정했다.
전무님께 연락하지 못했는데…… 화 많이 내실까.
‘11시에 모시러 가겠습니다. 도련님께는 연락하지 않으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강 전무님 우상전자 복귀를 원하신다면 현명하게 판단하시라는 회장님 말씀, 전해 드립니다.’
아까 전화 통화에서 운전석의 남자가 말했다.
정중한 말투였지만 분명 협박이었다.
현명하게 판단하라니.
지한에게 연락을 넣고 강 회장을 만나지 않는 게 현명한 건지, 바쁜 그를 신경 쓰이게 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강 회장을 만나서 결혼을 허락받는 게 현명한 건지.
해주는 약속된 시간까지 준비하는 내내 고민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우선 혼자 강 회장을 만나 보는 것이었다.
오늘은 불려 가지만, 다음엔 잔뜩 화가 나서 직접 찾아올 것 같았으니까.
오늘의 거절이 강 회장의 분노를 산다면, 때문에 그가 직접 자신을 찾아오게 만든다면 일이 커질 것 같았다.
차창 밖으로 그녀가 탄 검정 세단이 주택가 골목을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해주는 창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주먹을 꽉 쥐며 긴장감을 덜어 내려 애썼다.
***
평창동까지 금세 왔다.
강 회장 집 대문 앞에 차가 섰고, 해주를 데려온 남자가 뒷자리 문을 열어 주었다. 해주는 조심스럽게 차에서 내렸다.
남자가 다시 문을 닫고, 대문 옆에 달린 초인종을 누르는 동안 그녀는 높은 담을 바라보았다.
보고 있자니, 어제 한 번 와 봤음에도 안으로 들어가기가 두려웠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무도 모를 것만 같은 높이였다.
해주는 남자를 따라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정원을 지나고 집 안으로 들어선 뒤, 사용인의 안내에 따라 다이닝 룸에 도착하니 강 회장이 먼저 상석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단정한 걸음걸이로 테이블 앞으로 다가간 해주가 조심스럽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강 회장은 그런 해주를 쳐다보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눈앞에 없는 사람처럼 시선을 스치지도 않은 채 자신의 비서를 향해 말했다.
“자네는 그만 가 봐. 내일 아침 7시까지 오도록 하고.”
“네, 회장님.”
정중히 허리를 숙인 남자가 물러가자 그제야 강 회장은 해주를 쳐다봤다.
해주가 긴장하며 자세를 곧게 하고 강 회장을 마주 보는데, 그가 냉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이제부터 내가 아가씨에 대해 하나씩 사실 관계 확인할 거야.”
해주에게 앉으라는 권유 따윈 없었다. 호칭은 무례했고, 말투는 거만했다.
하지만 해주에게 무슨 힘이 있을 리가. 그녀는 순순히 대답했다.
“네, 회장님.”
강 회장이 다리를 꼬고 식탁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그러곤 종이 한 장을 집어 들며 시선으로 전체를 한 번 훑는 듯하더니 차갑게 말했다.
“한국대. 자퇴를 했어. 그렇지?”
해주는 손에 땀이 나는 것 같았다.
강 회장 손에 든 종이에 뭐가 적힌 걸까 궁금했는데, 자신의 신상 정보가 적혀 있던 모양이었다.
“네, 맞습니다.”
“쯧. 과외, 편의점, 가정부, 카페? 제대로 된 일 하나 해 본 적 없고. 맞아?”
“네.”
어느새 손에 땀이 흥건해졌지만, 해주는 당당하게 대답하려 애썼다.
강 회장 같은 사람을 안다. 자신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깔아뭉개던 아빠의 사채업자.
아빠가 비굴하게 굴수록 더 막 대했다. 마지막엔 폭력까지 행사했다.
그나마 해주에겐 인간 취급은 해 줬었다. 두려움을 티 내지 않고 눈을 똑바로 마주쳤기 때문에.
강 회장은 계속해서 종이를 훑어 내려갔다. 그러다 한순간, 그의 표정에 짙은 불쾌감이 어렸다.
“가정 환경도 형편없어. 회사 부도낸 친부에 실종된 친모라. 게다가 친부는 병석에 누워 있구만. 이런 쓰레기 같은 부모 밑에서 컸으니 철면피 깔고 내 아들이랑 결혼하려 들지.”
해주는 자신을 비하하는 강 회장이 기분 나쁜 것보단 좀 놀라웠다.
강 회장과 정식으로 처음 만났던 게 불과 어제였다. 한데 하루 만에 이 정보들을 전부 알아냈다니.
문득 그녀는 지난 2년간의 자신이 우스워졌다. 지한이 아주 깊숙이 숨어 버린 자신을 못 찾은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니, 새삼 바보처럼 느껴졌다.
“자. 아가씨, 말해 봐.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아가씨를 내가 내 식구로 들여야겠어?”
해주가 지한의 생각을 하는 사이,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강 회장이 손에 든 종이를 구겨 버리며 물었다.
강 회장은 불쾌했다. 이런 하찮은 계집을 두고 식구를 운운한다는 게.
고작 얼굴 반반한 것 하나 가지고 큰 꿈 꾸는 계집들 하나둘 본 게 아니다.
그나마 제 주제를 아는 것들은 스폰이나 받아 가며 은밀히 첩살이를 하는데, 강 회장도 그 정도는 눈감아 줄 수 있었다.
지한이 정략결혼으로 회사만 더 단단하게 만든다면 뒤에서 하는 일들까지 간섭할 이유가 없으니까.
하지만 눈앞에 꼿꼿하게 서 있는 물건은 감히 제 집안사람이 되고자 했다.
강 회장의 첨예한 시선을 받으며 해주는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고민했다. 어떤 대답을 해야 현명할까.
가진 건 없어도 전무님을 행복하게 해 드릴 자신은 있다고?
아니면 전무님에 대한 진심을 구구절절하게 말해 볼까?
그러는 사이 강 회장이 책상 위에 놓인 하얀 돈 봉투를 집어 들었다.
“대답 못 하겠지. 아가씨가 생각해도 스스로가 참 뻔뻔할 테니. 그렇지?”
강 회장이 해주가 서 있는 방향으로 돈 봉투를 툭 던졌다.
“세 장. 아주 후하게 넣었어. 그러니 과욕 부리다 험한 꼴 당하지 말고 내 아들이랑 헤어져.”
마음 같아선 그냥 쫓아내고 싶었지만, 눈 똑바로 뜨고 서 있는 꼴을 보니 쉽게 물러날 계집은 아니었다.
그럼 돈으로 쫓아내야지.
생돈을 쓸데없이 써야 한다는 게 아까웠지만, 강 회장은 투자라고 생각하며 넣었다.
강 회장은 확신했다. 지한은 이 결혼이 아니면 하지 않을 것처럼 굴지만, 결국엔 자신이 정해 준 집안과 혼사를 치르게 될 거라고.
우상전자로 복귀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이용하면 쉬울 테다.
핏줄이 어디 갈까.
우상전자 대표 자리에 앉겠다고 뭐든지 했던 자신의 젊은 시절처럼, 우상전자 대표 자리를 원하고 있는 지한 또한 뭐든지 하게 되겠지.
해주는 시선을 내려 돈 봉투를 쳐다봤다.
세 장이면, 3억 원일까. 아주 후하게 넣었다고 했으니 아마도 맞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좀 억울했다.
돈이란 게 이렇게 쉽게 가질 수 있는 거였다니. 단지 헤어지는 조건만으로 받을 수 있는 돈이었는데, 왜 자신과 아빠는 그토록 힘들게 살았을까.
“죄송합니다. 주신 돈, 받지 않겠습니다.”
해주는 말했다.
사람마다 돈의 무게가 다른 건 억울했지만, 아빠가 사채로 위협받았던 그 순간 같은 제안을 받았더라도 이 돈은 받지 않았을 테니까. 차라리 지한처럼 거래를 원한다면 모를까, 대가 없는 큰돈은 위험했다.
게다가 이 돈을 받는 건 지한을 기만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를 두 번 배신할 순 없었다.
“안 받겠다고?”
“회장님이 불순한 의도로 주신 돈에 자존심 팔고 싶지 않습니다.”
“뭐야? 불순? 이 버르장머리 없는!”
강 회장이 노여워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주먹으로 책상을 강하게 내리친 그가 위협적으로 여겨졌지만, 해주는 굴하지 않고 말했다.
“전무님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세요.”
“끝까지 내 심기를 거스르겠다 이거지? 감히……!”
“죄송합니다. 회장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셔도 제 마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강 회장이 노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 정도로 뻔뻔하니 감히 가사 도우미 주제에 내 아들 꼬셔 결혼하려 하는 거겠지. 한데 말이야.”
그가 천천히 해주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아주 느리게, 위협감을 풍기며 해주의 앞에 다다른 그가 말했다.
“그 천한 주둥이를 나불댈 수 있는 것도 사지 멀쩡할 때나 가능하지 않겠어?”
해주는 순간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여태까진 그저 우상그룹의 회장이기 때문에 강 회장을 겁냈는데, 지금의 이 감정은 훨씬 고차원적인 두려움이었다.
그가 가까워질수록 살기가 느껴졌다. 온몸이 절로 굳어졌다.
강 회장이 손을 뻗어 식탁 위 돈 봉투를 집어 들었다. 손안에서 봉투를 구겨 쥔 그는 눈을 무섭게 치켜뜨곤 다시금 위협적으로 말했다.
“호의 베풀어 줄 때 찌꺼기나 주워 먹을 것이지. 감히 어디서 말대꾸야, 말대꾸가. 너 같은 것 하나 사회에서 매장시키는 건 일도 아니야. 어?”
다음 순간, 해주는 눈을 질끈 감아야 했다.
강 회장이 손을 치켜올려서.
머리를 향해 위협적으로 뻗쳐진 손에 그녀는 반사적으로 눈꺼풀을 세게 감았다.
“뭐 하세요.”
그때였다. 위쪽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날아들었어야 할 손은 잠잠했고, 한순간 다이닝 룸에 정적이 흘렀다.
해주가 천천히 눈을 뜨니, 언제 왔는지 지한이 강 회장의 손을 공중에서 잡고 있었다.
강 회장의 낯빛에 당혹감이 서렸다.
“너, 너…… 네가 어떻게!”
“갈수록 더 실망시켜 주시네요. 아주 추하세요.”
지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아버지에게 하는 말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싸한 목소리로.
“뭐야?”
“말씀드렸잖아요. 아버지보다 소중한 여자라고. 빈말인 줄 아셨어요?”
“너! 이 한심한 새끼! 고작 여자 때문에 아비한테 대들어?”
강 회장이 얼굴을 험악하게 구긴 채 씨근덕대며 지한에게 잡힌 팔을 빼내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지한은 그를 놔주지 않고 말했다.
“잘못 생각하셨어요. 해주 씨가 없어지면 제가 다른 여자랑 결혼할 거라고 여기셨다면요. 우상전자로 협박하셔도 마찬가집니다. 전 아버지와 달라서 욕심보다는 내 사람 지키거든요.”
“뭐야?”
강 회장이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넌 네 처지를 망각하는 게 잘못됐어! 우상그룹이야! 네가 짊어지고 갈 곳, 일개 회사가 아니라 우상그룹이라고!”
지한이 헛웃음을 지었다.
“우상그룹이 뭐요. 그게 제 사람보다 중요할까요?”
그러더니 고개를 기울이곤 덧붙여 말했다.
“제가 인정받을 때마다 우상전자 대표 자리에서 물러나게 될까 봐 경계하신 분이잖아요, 아버지. 회사를 위해 결혼하지 않는 제가 대표 자리와 멀어지는 거니 기뻐하셔야죠.”
나직하게 말하던 지한은 표정을 싸늘히 굳혔다.
“욕심이 과하면 다 잃는 법이에요.”
“뭐, 욕심? 네가 미친 게지!”
“이 말, 저 어릴 때 아버지가 해 주셨던 말이고요.”
지한은 그만 강 회장의 팔을 놓아주었다.
이내 그의 시선이 해주에게로 향했다.
“윤해주 씨. 따라 나와요.”
지한은 강 회장에게 그랬듯 싸늘한 말투로 해주에게 말하곤 먼저 다이닝 룸을 빠져나갔다.
해주는 서둘러 그를 따라나섰다.
[결혼 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