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아버지 말, 언짢았겠지만 잊어버려요.”
어느덧 한남동 집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내내 고요하던 차 안에 지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잊어버렸어요. 회장님께서 틀린 말씀 하신 것도 아니니까요. ……회사 자료 훔친 사람이 저인 걸 아셨다면 더한 말도 들었을 텐데요.”
그냥 평범한 가사 도우미로 생각했으니 이 정도에서 끝난 거라고 해주는 생각했다.
그때였다.
“윤해주 씨.”
지한이 미간을 좁히며 해주를 불렀다.
“네?”
“그날 일은 결혼과 동시에 묻기로 했습니다. 계속 그 일 언급하면서 주눅 드는 거 보기 안 좋은데.”
“아…… 죄송합니다.”
“앞으로 남이 깔아뭉개고 무시하는 거, 당연한 듯 말하지 말아요. 설사 실수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과한 사과는 지양하도록 해요. 자존감 낮은 아내 달갑지 않으니까.”
“명심할게요.”
해주는 차가운 지한의 말에 토 달지 않고 대답했다.
지한의 말이 맞다.
본디 부부는 하나로 묶어 보기 마련이었다.
막장이었던 엄마가 사람 좋은 아빠와 결혼했다는 이유로 치켜세워지고, 승승장구하며 만인의 부러움을 사던 아빠가 엄마와 함께 몰락하며 비웃음을 산 것처럼.
그러니 처음엔 사람들이 자신만 무시할지 몰라도, 시간이 지난다면 그녀와 결혼한 지한 또한 얕잡아 볼 수 있었다.
아무리 가진 게 없더라도 가진 척을 해야 맞겠지.
한데…… 그 말은 뭘까.
문득, 해주는 강 회장의 말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보자마자 낯이 익다 했다. 2년 전 그 가정부 계집 맞지? 네 녀석 정신 빠지게 만들었던.’
‘기껏 데려온 게 이딴 계집이야? 내보내라는 말에 정리한 줄 알았더니, 뒤에서 만나고 있었어? 한심한 놈!’
기껏해야 얼굴 정도 익숙하겠지, 싶었는데 강 회장은 생각보다 자신을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게다가 마치 지한이 자신을 좋아했던 것처럼 강 회장은 말했는데…….
혹시나 그랬더라도 과거일 뿐이지.
그래, 다 과거일 뿐인데…….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저한테 아버지보다 소중한 여자니까요.’
정말 대책 없다. 사랑하는 연인을 연기하기 위한 지한의 말에 가슴 설레다니.
강 회장의 집에서 나오면서 내내 손을 잡고 있을 땐, 정말 그의 보호를 받는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설레지 않게 항상 마음의 준비를 하자고 다짐한 지 반나절도 채 지나지 않아서.
해주가 흘끔, 운전하고 있는 지한을 훔쳐보았다. 운전에 집중하고 있는 얼굴이 반듯하니 잘생겼고, 운전대를 잡고 있는 손은 크고 길쭉하니 참 남자다웠다.
하긴, 어느 누가 설레지 않을 수 있을까. 이렇게 멋진 사람인데.
이미 한 차례, 그에 대한 마음 대신 돈을 선택한 주제에 다시 뻔뻔하게 지한을 좋아하지 않으려면 많이 노력해야겠다고 해주는 생각했다.
이내 한남동 집이 보였다. 해주는 그만 상념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다.
대신 강 회장의 집 다이닝 룸에서 기억해 냈던 것, 지한의 어머니 기일을 떠올렸다.
***
아침 일찍 눈을 뜬 해주가 방문을 열었다. 씻기 위해 화장실로 향하려던 그녀는 저도 모르게 주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맛있는 냄새가 났다. 밥 냄새, 반찬 냄새 같은.
지한이 아침이라도 사 온 걸까, 생각하는데 이내 보인 건 싱크대 앞, 부스스한 파마머리를 집게 핀으로 고정한 낯선 뒷모습이었다.
식기세척기에 그릇을 정리해 넣고 있던 오영선 여사는 인기척에 뒤를 돌다가 해주를 발견했다.
“일어나셨네. 앉아요, 아침 차려 줄게. 전무님은 먼저 드시고 출근 준비하고 계세요.”
잠시 당황하던 해주는 그제야 어제 아침 지한의 말을 떠올렸다.
평일 오전에 일해 주시는 여사님이 오신다고 했었지.
“안녕하세요.”
해주의 인사에 오 여사는 앞치마에 손 물기를 닦으며 말했다.
“아침, 밥 괜찮아요? 가볍게 소고기뭇국 했는데. 젊은 사람이라 빵이 더 좋은가?”
오 여사가 수저를 들고 아일랜드 식탁으로 걸어가자, 해주는 얼른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밥으로 먹을게요. 주세요. 제가 놓을게요.”
“어이구, 무슨. 내 일인데 내가 해야지. 그냥 앉아 있어요.”
50대쯤 되었을까? 마른 체형에 조금 까칠한 인상이었다. 하지만 보이는 것과 달리, 좀 사무적이긴 해도 말투에 살가움이 배어 있었다.
우리 사장님 보고 싶네……. 해주는 식탁에 앉으며 생각했다.
라일락커피 사장님도 딱 그랬다. 외모로만 봤을 땐 친해지기 힘들 것 같지만, 대화를 한마디만 해 보면 편한 사람인 게 바로 티가 났다.
손이 빠른 오 여사가 수저를 놓고는 밑반찬 몇 가지를 식탁 위에 냉큼 차렸다. 이게 웬 진수성찬인지. 먹기 좋게 접시에 옮겨 담은 밑반찬만 일곱 가지였다.
마지막으로 공깃밥 옆에 소고기뭇국을 놓아 주며 오 여사는 말했다.
“먹어 봐요. 오늘 국이 아주 시원하게 잘됐어요.”
“감사합니다.”
해주가 국부터 한 수저 떠먹었다. 아직 졸음이 서렸던 눈이 곧바로 번쩍 떠졌다. 진하고 시원한 국물이 입맛을 확 돌게 했다.
“와, 맛있어요. 깔끔하면서도 깊은 맛이 나네요. 제가 하면 이런 맛 안 나는데.”
해주가 하듯 소고기뭇국에 단순히 소고기에 무, 국간장과 맛소금만 넣은 것은 아닌 듯, 오 여사의 소고기뭇국에선 깊은 맛이 났다.
“육수 따로 내서 끓여서 그래요. 간단해 보이는 음식일수록 손이 많이 가야 깊은 맛이 나거든.”
“그래요?”
해주가 이번엔 젓가락을 들어 다른 밑반찬들도 하나씩 맛보았다.
순간, 해주는 과거 지한에게 좀 미안해졌다.
오 여사의 자리에서 해주가 일했을 때가 스물여섯이었다.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들이고 무언가 하나라도 해내면 뿌듯해할 때.
월급을 많이 받는 만큼 참 열심히 일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전문적으로 음식을 배운 적 없이 혼자 해 먹던 대로 지한에게 차려 줬었다.
어린 마음에 반찬 세 개 이상은 꼭 식탁 위에 올리며 일을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생각해 보면 솜씨가 참 애매했다.
그걸 봐주고 맛있게 먹어 줬던 지한에게 새삼 고마움을 느끼며 해주는 다시금 밥과 함께 오 여사의 반찬을 집어 먹었다.
해주의 감탄한 표정을 읽었는지 오 여사가 호호 웃음 지었다.
“내가 음식 좀 해요. 새로운 식구가 있는 거 알았으면 더 다양하게 차렸을 텐데. 와서야 알았지 뭐예요.”
그러곤 오 여사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말을 덧붙였다.
“전무님 여자 친구라고 들었는데. 난 여자 친구가 있는 줄도 몰랐지 뭐예요. 여기서 쭉 살다가 결혼할 거라던데. 맞아요?”
해주가 가볍게 웃음 지었다. 사실은 여자 친구가 아니니 그렇다고 소개하기 민망했지만, 애써 티 내지 않으며 말했다.
“네, 맞아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그럼 평일 아침엔 계속 보게 될 텐데, 신상 정보 좀 물어봐도 되나?”
“아, 윤해주라고 해요. 스물아홉이에요.”
“해주 씨라고 불러도 돼요?”
“그럼요. 원하시는 대로 불러 주세요. 그럼 저는 여사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그렇게 해요. 난 오영선. 오 여사라고 불러요.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전날 말해 주고. 그럼 장 봐서 해 줄게요.”
“감사합니다.”
대화를 나누던 사이, 해주의 식사가 끝났다.
물로 입을 가볍게 헹군 해주는 물컵을 내려놓으며 드레스 룸을 흘끔 쳐다봤다.
어제 강 회장의 집에서 돌아온 후, 지한은 해주와 함께 초밥을 배달시켜 먹고 내내 서재에 박혀 일만 했다.
화장실을 가기 위해 새벽 1시에 거실로 나왔을 때도 서재 불은 켜져 있었으니, 아주 늦게까지 일을 했을 테다.
잠을 얼마 못 잤겠지. 그 채로 아침 일찍 출근하려면 많이 피곤할 텐데.
커피…… 지한은 알아서 마시겠다고 딱 잘라 말했지만 해주는 신경 쓰였다.
진하게 내린 아이스커피에 달달한 가루 설탕을 넣어 그의 에너지를 끌어 올려 주고 싶지만, 그는 이미 해주의 커피를 거절했었다. 혹여라도 심기를 더 거스르게 될까 봐 해주는 그 마음을 꾹 누르며 오 여사에게 물었다.
“저 커피 내릴 건데, 여사님도 한 잔 내려 드릴까요?”
“커피? 내가 내려 줘야지. 앉아 있어요.”
“아니에요. 맛있는 아침 주셨는데 커피는 제가 내려 드릴게요.”
“그럼, 아메리카노, 따뜻하게. 부탁해도 될까?”
“물론이에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해주가 싱크대 한쪽에 놓여 있는 커피 머신을 켜서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오 여사의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제 몫의 아이스아메리카노를 한 잔씩.
이내 해주는 주방 정리를 막 끝낸 오 여사 앞에 커피를 내밀었다.
“드세요.”
“어머, 고맙게 마실게요.”
살가운 해주가 마음에 드는지, 오 여사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컵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리고 커피를 호로록 한 모금 들이켜더니 말했다.
“커피는 남이 내려 준 게 제일 맛있다니까.”
“그럼 앞으로 여사님 커피는 제가 내려 드릴까요?”
“그래 주면 고맙지. 앞으로 아침 메뉴 더 신경 써야겠네.”
“부담 갖지 마세요. 커피 한 잔 내려 드리는 건 식사 차려 주시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요.”
“전무님이 여자 친구를 잘 뒀네. 살갑고, 싹싹하고.”
“그렇게 봐 주셔서 감사해요.”
해주가 미소 지으며 아일랜드 식탁 앞에 앉았다. 커피를 마시며 지한을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의 출근길을 배웅하기 위해서.
오 여사의 시선도 있고, 앞으로 잠깐이나마 가족이 될 사이였으니, 아침 출근길 얼굴은 비추고 싶었다.
그때, 드레스 룸 문이 열리며 출근 준비를 마친 지한이 방 안에서 나왔다.
“일어났네요? 식사는.”
지한이 물었다. 감색 슈트를 입은 그의 모습이 멋있어, 해주는 시선을 빼앗기지 않으려 애쓰며 말했다.
“여사님께서 해 주신 밥 먹었어요.”
“잘했어요.”
“바로 출근하세요?”
“바로 가 봐야 해요. 오전 회의가 있어서. 오늘은 집에서 푹 쉬어요.”
“그럴게요. 다녀오세요.”
지한은 해주에게 가볍게 눈인사하고, 오 여사를 향해서도 목례한 뒤 집을 나섰다.
“보기 좋네요. 서로 존대하니까 존중해 주는 느낌도 나고. 요즘 젊은 사람들은 야, 너, 는 기본이고 욕설도 막 하던데. 난 그거 보기 안 좋더라고.”
“그래요?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거리감 있는 존댓말이라는 게 다행히 티 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오 여사가 있어 살가운 인사였던 것도 사이가 좋아 보이는 데 한몫했을 테고.
“그럼 들어가 볼게요.”
“그래요. 쉬어요. 커피 잘 마셨어요.”
해주는 오 여사를 향해 미소 짓고는 방으로 돌아왔다.
여태 정신이 없어서 채 하지 못했던 짐 정리를 할 생각이었다.
***
간단하게 짐 정리를 마친 해주는 샤워를 하고 나왔다.
거실 화장실에서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수건으로 젖은 머리카락의 물기를 툭툭 털며 핸드폰을 놓아둔 창가 앞 테이블로 향했다.
일정이 바빠 라일락커피 사장에게 서울에 도착했다고 미처 연락하지 못했다. 짬이 생긴 김에 전화를 하기 위해 핸드폰을 집어 들었을 때였다.
Rrrrr. Rrrrrr.
해주의 핸드폰이 울렸다.
010으로 시작하는 저장되지 않은 번호 11자리.
잠시 고민하던 해주는 전화를 받았다.
-윤해주 씨 핸드폰 맞습니까?
“네, 누구세요?”
-강태규 회장님 비서입니다. 회장님께서 조용히 만나 뵙고 싶어 하십니다.
[결혼 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