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1시간에 걸친 쇼핑이 끝이 났다.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따라 나온 퍼스널 쇼퍼가 트렁크에 짐을 실어 넣어 주며 지한과 해주에게 친절히 인사했다.
“다음 쇼핑 때도 연락 주세요.”
그러곤 해주를 향해 한 번 더 미소 지었다. 꼭 연락을 달라는 듯.
해주는 애매한 웃음을 지어 보이곤 손에 든 명함을 불편하게 고쳐 쥐고서 검정 세단에 올랐다.
이내 차가 출발했고, 백화점을 빠져나왔다.
복잡한 서울 도로에서 지나가는 차들을 바라보던 해주가 손에 든 명함을 만지작거릴 때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합니까.”
“네?”
해주가 화들짝 놀라며 지한을 돌아봤다.
“아까 내가 전화 통화하고 돌아온 뒤로 줄곧 기분도 별로인 것 같은데.”
“아니에요. 기분 괜찮아요. 단지…….”
“단지?”
지한이 해주를 살짝 돌아보며 묻자 그녀는 말했다.
“퍼스널 쇼퍼님 아는 분인가 해서요. 어디서 봤던 건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 그 직원.”
퍼스널 쇼퍼가 유난히 해주를 빤히 보긴 했다.
그제야 지한은 다른 생각에 빠진 해주를 이해하곤 물었다.
“명함은 뭡니까.”
“아. 퍼스널 쇼퍼님이 주셨어요.”
<세림백화점 퍼스널 쇼퍼 권주경>
명함을 지한에게 보여 주었다.
“쇼핑할 일 생기면 개인적으로 연락 달라고 하시면서요. 원래 그런 건가요?”
쇼핑을 마친 뒤, 탈의실에서 구매한 원피스 중 하나로 갈아입고 나왔을 때였다.
지한은 마침 잠시 해남 리조트 업무 건 때문에 통화를 하러 나갔고, 해주는 퍼스널 쇼퍼와 방 안에 단둘이 남았다.
하얀 피부와 연한 하늘색이 잘 어울린다고, 목선이 예뻐 스퀘어 네크라인이 참 고급스럽게 어울린다고 칭찬하던 퍼스널 쇼퍼가 물었다.
‘실례지만, 제가 고객님 성함과 연락처를 알 수 있을까요? 명함을 주셔도 좋습니다.’
‘연락처를요?’
‘연락을 주시면 원하시는 상품 따로 빼 드리려고 해요.’
‘전 백화점 VIP고객도 아닌데요.’
‘오늘 뵈었으니 고객님이죠. 퍼스널 쇼퍼 룸 이용하지 않으시더라도 개인적으로 강지한 님 이름으로 연락 주시면 언제든 쇼핑 도와드리겠습니다.’
만인의 호감을 살 만한 생글거리는 미소. 그런데도 해주가 느끼기엔 살갑다기보단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 표정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은근히 돌려 거절했다.
‘그러시다면 명함 주세요. 제가 필요할 때 연락을 드릴게요.’
“날 통하지 않고 윤해주 씨 쇼핑을 직접 챙기는 게 일반적이진 않죠.”
지한의 대답에 해주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오해였을까. 그냥 지한의 여자 친구로서 왔으니까, 우상그룹이라는 큰 고객의 동행 손님이니까 잘해 주려던 것뿐이었을지도.
아님, 정말 아는 사람인가? 긴가민가할 만큼 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사이라 연락처를 받으며 이름을 알고 싶었나?
물론 그렇대도 해주가 먼저 연락처를 알려 주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인생에서 큰일을 몇 번이나 겪었던 해주가 신중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정말 아는 사이일 수도 있겠어요. 학창 시절 친구라든지. 제가 기억력이 안 좋아서 기억을 못 했나 봐요.”
길게 끌고 갈 대화거리가 아니라 해주가 이쯤 마무리하려는데, 다시 지한이 말했다.
“퍼스널 쇼퍼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아까 허리에 손 두른 건 불쾌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네? 아, 그럼요. 전혀 불쾌하지 않아요.”
잊고 있던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바람에 해주가 살짝 당황하며 대답했다.
“앞으로도 종종 오늘같이 스킨십을 해야 할 겁니다. 그러니 가벼운 접촉 정도는 예상해 둬요.”
“네, 그럴게요.”
해주는 몇 번의 스킨십이 있더라도 불쾌해하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부부 사이에 스킨십이 없는 것도 이상하고, 2년 전…… 이미 잠도 잔 사이였다. 밤새, 몇 번이나 몸을 섞었던 사이에 스킨십은 별로 대수롭지 않았다.
다만, 아까처럼 대책 없이 설레지 않게 항상 마음의 준비를 해 둬야겠다고 생각했다.
***
평창동 언덕 중턱, 담 높은 고급 주택 앞에 검정 세단이 섰다.
차에서 내리며 해주는 자기 키보다 세 배는 높은 듯한 담을 바라봤다.
지한의 집이 담을 낮추고 키 큰 나무를 세워 갑갑한 느낌을 해소했다면, 강 회장의 저택은 안을 볼 수 없어 무서우리만큼 갑갑한 성벽처럼 느껴졌다.
보고 있자니, 한층 더 긴장됐다.
손에 땀이 나는 것 같아 해주가 주먹을 꽉 쥐는데, 그녀의 행동을 발견했는지 지한이 말했다.
“긴장할 필요 없어요. 이 결혼을 제안하신 분도, 날 우상전자에 다시 복귀시키라고 말씀하신 분도 내 할아버지입니다. 윤해주 씨가 잘 보여야 할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니 편하게 해요.”
“노력할게요.”
해주는 노력하겠다고 대답했지만, 정말 편하게 강 회장을 만날 자신은 없었다.
강태규 회장은 냉정한 사람이었다.
사람을 갈아 회사를 키운 대표적인 기업인으로 유명했고, 자기 사람으로 두었어도 한 번 눈 밖에 나면 가차 없이 잘라 버린다고 했다.
하긴. 아들에게조차 살갑지 않은데 타인에게는 오죽할까.
해주는 2년 전 목격했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 강 회장은 지한의 집으로 찾아와 자신에게 보고 없이 회사 일을 처리했다는 사실에 불같이 화를 냈었다.
꼭 자식을 대하는 태도라기보단 마치 라이벌, 혹은 경쟁자를 대하는 것 같았달까. 당시 해주는 강 회장이 지한을 견제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눈에 차지 않을 아들의 결혼 상대에겐 어떤 태도를 보이려나. 좀 긴장된 해주는 입고 있는 원피스 자락을 당겨 옷을 더 단정하게 만들었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회장님께선 통화 중이십니다.”
강 회장 저택 사용인의 안내에 따라 지한과 해주는 다이닝 룸에서 강 회장을 기다렸다.
하나, 통화가 길어지는지 강 회장은 한참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곧 강 회장을 만난다는 사실에 많이 떨었던 해주의 긴장감이 조금 풀렸다.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생길 만큼.
다이닝 룸이 참 예뻤다. 조명도, 벽을 장식해 둔 접시도. 다른 공간들보다 유독 화사한 것 같다고 생각하던 해주는 문득 의문을 가졌다.
어째서 이 공간만 이렇게 화려한 거지?
넓은 정원은 소나무를 비롯한 비싼 수입 수목들로 채워졌고, 다이닝 룸으로 오기 위해 지나왔던 넓은 거실엔 고급스러운 가구들과 값비싼 미술품들이 가득 차 있었다.
다만, 너무 투박했다.
인테리어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해주가 느끼기엔 조화를 신경 쓰지 않고 무조건 비싸고 좋은 것들을 몽땅 채워 넣은 것 같았다.
그에 비해 다이닝 룸은 가구와 소품 하나하나 정성스러운 손길이 닿은 느낌이었다. 게다가 창밖으로 정원의 소나무가 보이는 것도 멋있었다.
“긴장 많이 하는 것 같더니. 집 구경하는 여유도 있네요.”
불현듯 들려온 지한의 말에 천장을 구경하고 있던 해주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민망해했다.
“아. 다이닝 룸이 예뻐서요.”
“그래요? 보는 눈이 있네요. 유일하게 이 집에서 보기 좋은 공간이죠.”
어? 착각인가.
문득 해주는 내내 서늘하던 지한의 표정이 갑자기 조금 부드러워진 것처럼 느껴졌다.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손수 인테리어 하신 공간이거든.”
그제야 해주는 지한이 지은 표정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돌아가신 전무님 어머니께서 꾸미신 공간이었구나.
“미술 전공하셨다고 들었던 것 같아요.”
“정확히는 디자인을 전공하셨죠. 기억하네요?”
기억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기가 괜히 좀 곤란해서 해주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지한의 어머니에 대해 들었던 건 그의 집에서 일을 시작한 지 3개월이 지났을 즈음, 평소 술을 잘 마시지 않는 지한이 처음으로 만취해 집에 들어왔던 날이었다.
그날 지한은 누구에게 말하는지 알 수 없는 혼잣말로 어머니에 관한 얘기들을 줄줄이 꺼냈었다.
돌아가신 지 5주기 되는 기일이라는 말과 함께.
그러고 보니 전무님 어머니 기일까지 두 달쯤 남았구나.
해주가 날짜를 떠올리던 그때,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이윽고 강태규 회장이 다이닝 룸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에 봐도 지한과 참 다르게 생겼다고 해주는 생각했다.
반듯하고 깔끔한 이미지의 지한과 달리, 강 회장은 날카롭고 예민한 인상이었다.
지한은 자신감 넘치는 태도와 단단한 눈빛을 가졌으나, 그는 특유의 고압적인 태도와 눈빛으로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강 회장이 마주 보고 앉은 해주와 지한을 지나쳐 테이블 상석에 앉았다.
때마침 사용인이 커피와 차를 내왔고, 강 회장은 제 앞에 놓인 커피 잔을 들며 해주를 노골적인 시선으로 바라봤다.
손에 든 커피 잔을 입으로 기울이고, 뜨거운 커피를 호로록 소리가 나도록 마시고, 다시 테이블 위에 잔을 내려놓을 때까지.
“소개해 드려요, 아니면 만나는 사람 있는 거 확인하셨으니 이만 일어날까요.”
해주를 향한 강 회장의 집요한 시선을 끊어 내려 지한이 물었다. 그제야 강 회장은 입을 열었다.
“자신만만하기에 믿어 주려 했더니.”
그의 언짢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보자마자 낯이 익다 했다. 2년 전 그 가정부 계집 맞지? 네 녀석 정신 빠지게 만들었던.”
불쾌해 보이는 강 회장의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한은 말했다.
“쓸데없는 일에 기억력이 이렇게 좋으신 줄 몰랐네요.”
“기껏 데려온 게 이딴 계집이야? 내보내라는 말에 정리한 줄 알았더니, 뒤에서 만나고 있었어? 한심한 놈!”
강 회장이 끝내 분노하며 날카롭게 해주를 쳐다봤다.
“천한 계집애가 낯짝도 두껍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따라와, 따라오기가!”
분위기가 싸늘했다. 시작부터 난관이었다.
해주는 고개를 숙였다. 막말 같은 건 불쾌하지 않았다. 강 회장에게 지한의 신붓감으로 환영받지 못할 거라곤 예상했었으니까.
기껏 백화점까지 가서 명품 원피스를 사 입고 왔는데 옷 하나로 신분을 변화시킬 순 없구나, 깨달았을 뿐.
다만 그녀가 두려운 건.
회장님이 계속 반대하시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이 결혼에서 잘 보일 사람은 지한의 외조부라고 했다. 과연 이런 반응이라도 괜찮은 걸까?
한데…… 정신 빠지게 만들었다는 건 무슨 얘기일까. 정리하라고 말을 했었다니…….
“이런 말 듣게 하려고 아버지께 소개해 드린 거 아닙니다.”
지한은 차분한 목소리지만 강한 말투로 강 회장에게 말했다. 경멸 어린 표정에선 선을 넘지 말라는 경고가 느껴졌다.
“뭐야?”
“말씀드렸습니다. 아버지가 원하시는 조건 맞춰 결혼해야 한다면, 할아버지 재산은 물 건너가게 될 거라고 말입니다.”
“감히 아비를 협박해?”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저한테 아버지보다 소중한 여자니까요.”
지한은 강 회장에게 보란 듯이, 그가 불쑥, 해주의 손을 잡았다.
“하도 보채시기에 바쁜 사람더러 시간 내 달라고 부탁하며 소개해 드렸더니, 결혼식 날짜만 통보할 걸 그랬네요. 더 있어 봤자 아버지 감정만 상하게 해 드릴 것 같으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해주가 당황할 틈도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지한이 그대로 해주 또한 일으켜 세웠다.
“결혼식 날짜는 할아버지와 상의 후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루빨리 우상전자 주식 받으실 수 있게 해 드릴 테니, 방해할 생각은 마세요.”
지한이 걸음을 옮겼다. 그에게 손을 붙잡힌 해주는 허둥지둥, 강 회장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곤 지한을 따라나섰다.
이내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고, 다이닝 룸에 남은 강 회장은 주먹을 꽉 쥐었다.
“아들 새끼가 감히 아비한테 기어올라?”
강 회장은 장인 권호재의 말을 떠올렸다.
‘결혼하면 다시 전자에 불러들인다는 조건을 내걸어. 내 손자가 결혼하면, 자네가 그토록 탐내던 우상전자 주식, 나 죽은 뒤 자네한테 상속한다고 유언장 써 줄 테니.’
감히. 그의 회사 일을 마음대로 지시한 것은 평소라면 용납할 수 없는 월권이었다.
하지만 근 몇 년간의 구설수로 강 회장은 현재 우상전자 대표 자리가 위태로운 상태였다.
입지를 더 단단히 하기 위해서는 장인 소유의 우상전자 주식 3%가 필요했다. 그래서 정말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는 걸 직접 확인한 뒤,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강 회장은 이를 갈며 분노했다.
“그래도 저딴 계집이 감히 내 집안에 들어앉는 건 말도 안 되지. 감히 누구 얼굴에 먹칠하려고!”
[결혼 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