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정 비서가 예전에 쓰던 방에 짐 옮겨 놨으니 결혼 전까진 거기서 지내요. 욕실도 전처럼 방 옆에 있는 것 사용하고요.”
지한의 말에 해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게요.”
화장실을 제외하면 방은 네 개.
침실과 서재, 옷방은 현관에서부터 짧게 나 있는 복도를 따라 면해 있었고, 하나 남은 방은 현관을 마주 보고 동떨어져 있었다.
과거 해주가 머물던 손님방이었다. 결혼 후 한 침실을 쓰기 전까지 해주는 그 방에서 지내기로 했다.
“내일 일찍부터 움직여야 하니 되도록 빨리 쉬는 편이 좋을 겁니다.”
지한이 먼저 걸음을 옮겨 침실로 향했다. 이내 그가 방문을 열고 사라질 때가 돼서야 해주는 현관 맞은편 방문을 열었다.
***
간단히 짐을 정리하고, 해주는 샤워하고 다시 방에 들어왔다.
스킨케어를 간단히 하고, 그녀는 방의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금세 어둠에 적응한 눈이 달빛에 어스름하게 비치는 방을 둘러봤다.
침대 하나, 붙박이 옷장 하나, 테이블과 의자 하나씩. 커튼 달린 큰 창문이 있고, 천장엔 손바닥만 한 매립 등이 6개 박혀 있다.
방 또한 여전히 그대로였다.
“전부 다 여전하네. 나만 달라졌어.”
먹먹하게 중얼거린 해주는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며 그 위에 지한을 그렸다.
빛이 나는 사람, 자꾸만 눈길을 사로잡아서, 오랜만에 만나도 여전히 마음을 설레게 하는 사람.
“결혼을 한다면 자주 흔들리겠지. 뻔뻔하게 좋아하지는 말자.”
***
싱숭생숭한 마음이 잠에 깊이 들게 할 리 없었다.
꼭두새벽부터 눈을 뜬 해주는 거실로 나갔다.
이제 막 해가 뜨기 시작해 사위가 어스름했다. 거실 불을 조심스럽게 켠 해주는 주방으로 들어섰다.
몸에 밴 습관은 다시 몸이 기억한다고, 2년 만에 찾은 주방임에도 그녀는 낯설지 않은 기분으로 냉장고 앞에 섰다.
“주방 써도 되려나.”
그러곤 잠시 고민하다가 냉장고를 열었다.
음식 재료들이 깔끔하게 정리돼 있었다. 여전히 많이 먹진 않는지 양은 적었다.
해주는 달걀 두 개와 버터를 꺼냈다.
그녀는 아침은 간단하게 달걀 요리 위주로 배만 가볍게 채우는 지한을 기억하고 있었다.
싱크대 위에 놓인 식빵에 달걀과 버터를 이용해 프렌치토스트를 할 생각이었다.
봉지를 묶고 있는 플라스틱 클립을 빼고 빵을 꺼내는데, 문득 그 옆에 놓인 커피 머신이 해주의 눈에 들어왔다.
덩달아 지한이 아침은 건너뛰었어도 커피는 반드시 마셨던 사실이 떠올라 그녀는 중얼거렸다.
“커피 타 드려도 괜찮을까?”
그때, 스틱 설탕이 해주의 눈에 띄었다. 한 움큼 통 안에 꽂혀 있는 걸 보니 옛 생각이 떠올랐다.
언제나처럼 지한에게 아이스커피를 가져다주었던 날, 해주는 슬그머니 커피에 넣어 드셔 보시라며 설탕 스틱을 내밀었었다.
그러자 지한은 단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거절했다. 입 안이 텁텁해지는 걸 꺼린다고.
그런 그에게 해주는 스틱 설탕을 넣어 먹으면 그리 달지 않다고 설명했다. 씁쓸한 커피 맛 끝에 적당한 단맛이 올라오는 게 아주 맛있다고.
취향에 안 맞으면 다시 커피를 내려 드릴 테니 한 번만 넣어 드셔 보시라며 애원하다시피 추천했던 건, 그 당시 해주의 눈에 지한이 참 피곤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버거운 업무 일정을 쉬는 날도 없이 소화해 냈고, 매일 밤늦게까지, 때로는 새벽녘이 밝을 때까지도 그는 서재에 틀어박혀 일을 했다.
우상그룹 회장의 아들이라고, 그는 허투루 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안쓰러울 정도로.
순간 해주는 죄책감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토록 열심히 살아왔던 그의 일을 망친 거다.
지한의 노력을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게 만들었다.
이 집에 돌아오니, 주방에 서니 여태까지보다 죄의식이 커졌다.
그러니 잘해야지. 뭐든지 해 드려야지.
할 줄 아는 게 몇 개 없으니 해 드릴 수 있는 건 많지 않겠지만, 이런 작은 일이라도 지한에게 해 주고 싶었다.
해주가 프라이팬을 꺼냈을 때였다. 문득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현관에서부터 발소리가 가까워졌고, 해주는 긴장했다.
누구지? 아직 아침 7시인데 올 사람이 있나?
당황스럽게 다가오는 사람을 기다리는데, 이내 모습을 보인 건 운동복 차림의 지한이었다.
땀에 젖은 머리를 한 그가 해주를 발견하곤 걸음을 멈췄다.
“뭐 합니까?”
예상치 못한 곳에서 지한이 나타나자 해주는 당황해서 말했다.
“아. 아침을 좀 하려고요. 예전에 가볍게 드시던 것 생각나서 스크램블드에그랑 소시지만요.”
“내가 윤해주 씨한테 아침 차리라고 시켰던가. 기억엔 없는데.”
지한이 차가운 눈빛으로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아, 역시 하지 말았어야 했구나. 하긴, 자신의 집에서 도둑질한 사람이 아무 물건이나 만지는 건 역시 불쾌한 일이겠지.
“죄송합니다. 일찍 일어난 김에 전무님 아침 차려 드리고 싶었어요. 멋대로 주방 사용한 것, 사과드릴게요.”
지한은 고개를 푹 숙인 해주를 잠시 가만히 쳐다봤다.
2년 사이 참 많이도 변했다.
예전엔 매사 좀 당돌하다 싶을 만큼 당당했는데, 이젠 말 한마디만 해도 주눅이 드는 꼴이.
뭐, 자업자득인가. 저지른 죄가 크니까.
지한은 더 말을 보태지 않기로 했다. 이미 무엇 때문에 자신이 언짢은지 해주가 알고 있으므로.
“아직 요리 전인 것 같으니 정리해요.”
지한이 손에 든 쇼핑백 하나를 아일랜드 테이블 위에 올려 두며 말을 덧붙였다.
“가볍게 먹을 식사 사 왔으니 먹고. 참고로, 평일 오전에 집안일 도와주시는 여사님 오시니 윤해주 씨가 뭘 할 생각하지 말고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여사님께 부탁드려요.”
“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해주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커피도, 내려 드리면 안 될까요? 뭐라도 해 드리고 싶은데…….”
“됐어요.”
지한은 단호히 거절했다.
“윤해주 씨.”
“네?”
“날 위해 아무것도 하지 마요. 결혼식을 마치고, 내가 우상전자에 무사히 복귀만 하면 윤해주 씨 빚은 사라지는 거니 잘 보일 필요 없어요.”
“네…….”
선 긋는 말을 마친 지한이 해주를 지나쳐 걸었다.
이내 열렸다 닫힌 방문을 바라보던 해주는 씁쓸하게 손에 쥐고 있던 프라이팬을 내려다봤다.
“그래. 뭐라도 해 드리고 싶은 것도 내 욕심이지. 전무님께서는 결혼과 이혼을 해 줄 아내가 필요하다고 했지, 내조하는 아내가 필요하다고 했던 것은 아니니까…….”
해주는 프라이팬과 계란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지한이 짜 놓은 일정대로 그의 아버지, 강 회장을 만나러 가기 위해 이제 그만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하며.
***
오전 10시.
지한과 해주가 세림백화점 2층 VVIP라운지에 도착했다.
“강지한 님 맞으신가요?”
직원이 예약을 확인하고 기다란 금색 양문형 문을 열어 주니, 안쪽에 포근한 공간 하나가 나왔다.
안으로 들어가니, 퍼스널 쇼퍼 룸 입구에서 대기 중이던 퍼스널 쇼퍼가 두 사람을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단정한 차림새에 빨간 립스틱이 인상적인 퍼스널 쇼퍼는 브랜드 제품들이 걸려 있는 이동식 행거 맞은편 3인용 소파에 두 사람을 안내했다. 그러곤 소파 앞 테이블 앞에 메뉴판을 펼쳐 놓아 주며 말했다.
“오늘 다과는 쿠키 세트 준비되어 있습니다. 음료는 뭐로 하시겠어요?”
해주가 메뉴판에 짧게 시선을 주었다가 떼며 말했다.
“전 괜찮아요.”
그러자 지한이 말했다.
“차로 두 잔 준비해 주세요.”
그가 해주를 보며 다정스레 미소 지었다.
“아버지 만나면 긴장해서 물 한 모금 못 마실 텐데. 지금 목 축여 둬요.”
차에서 내릴 때까지만 해도 서늘하던 그였다.
강태규 회장을 만나면 묻는 말 외엔 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조언만 남기고 입을 꾹 다물었던 그가 누가 봐도 연인처럼 다정하게 굴었다.
당황하지 않고, 해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늘 그의 애정과 배려를 받았던 사람처럼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럼 마실게요. 차로 부탁드려요.”
“차 두 잔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친절한 응답과 함께 다시 메뉴판을 거둔 퍼스널 쇼퍼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
해주는 눈앞의 금색 행거를 바라봤다.
고급스러운 옷들이 정갈하게 걸려 있었고,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가방과 구두는 조명 아래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참 황홀한 공간이었다. 어제까지와는 다른 삶이 시작되는 현실이 확 와닿는 기분을 줄 만큼.
“할아버지 뵈러 갈 때 입을 옷까지 고를 거예요. 단정한 스타일 위주로. 그러니 원하는 스타일이 아니라도 입도록 해요.”
“네, 전무님께서 골라 주시는 대로 입을게요.”
지한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얌전히 골라 주는 대로 입을 생각이었다.
이 결혼에 해주는 자아를 드러내지 않을 생각이니까.
지한이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하지 않고.
탈 없이 결혼하고, 결혼 생활을 마무리 지어 지한에게 도움이 되는 게 목표였다.
그때, 두어 번의 노크 소리와 함께 출입문이 열렸다. 다시 퍼스널 쇼퍼가 히비스커스차와 다과를 담은 나무 쟁반을 들고서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찻잔을 먼저 지한의 앞에, 그리고 해주의 앞에 놔 주며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의례적인 눈 맞춤에 해주가 가볍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순간, 퍼스널 쇼퍼의 얼굴이 한순간 미묘해질 줄은 예상하지 못하고.
눈이 마주치자마자 퍼스널 쇼퍼가 미소가 사라진 표정으로 해주를 빤하게 쳐다봤다.
얼굴에 뭐가 묻었나? 아님…….
가까이서 보니 귀티 나는 전무님과 달리 너무 초라한 게 느껴졌나?
이유가 어쨌든 깊이 탐색하는 시선에 해주는 피곤해졌다.
갑작스럽게 지한을 만났고, 아빠가 아팠고, 결혼 계약을 제의받으며 서울에 왔다. 그리고 결혼할 사이라고 선언하기 위해 지한의 아버지를 뵙기로 하며 백화점 쇼핑까지.
꼬박 하루도 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이토록 많은 일을 겪었으니 정신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이유 모를 기 싸움 같은 시선을 받기엔 피로감이 짙었다.
때문에 해주가 먼저 시선을 피하려고 했다.
“뭐 합니까.”
그때, 불현듯 해주와 퍼스널 쇼퍼 사이 불편한 적막이 깨졌다.
눈치 빠른 지한이 끼어든 덕분이었다.
높낮이 없는 음성. 그 서늘함은 퍼스널 쇼퍼를 향해 있는데, 어깨를 움찔한 퍼스널 쇼퍼보다 더 긴장한 쪽은 해주였다.
가는 허리에 단단한 팔이 둘렸다.
해주를 보호하듯, 허리에 가볍게 두른 지한의 팔이었다.
지한이 퍼스널 쇼퍼를 차갑게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시선이 꽤 불쾌한데.”
정말 보호하려는 건 아니겠지. 사이좋은 연인처럼 보이기 위해, 사랑하는 애인을 위해 기꺼이 불편함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기 위한 장치겠지.
그럼에도 해주는 심장이 뛰었다. 지한의 손끝이 느껴지는 아랫배까지 울릴까 봐, 그래서 지한이 느끼게 될까 봐 걱정스러울 만큼 빨리 뛰었다.
그제야 퍼스널 쇼퍼가 해주를 향한 시선을 거뒀다.
“아. 죄송합니다. 오늘 준비한 옷이 고객님께 어울릴지 살폈습니다. 바로 첫 번째 원피스부터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녀가 다시 친절한 웃음을 지으며 상황을 설명하자, 지한은 가는 허리에 두른 손을 풀었다.
해주도 긴장을 풀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여전히 빨리 뛰는 심장에 지한을 쳐다보지 않으려 애쓰면서.
대신 행거에서 원피스 하나를 빼 오는 퍼스널 쇼퍼 쪽을 쳐다보며 해주는 생각했다.
혹시 아는 사람인가? 그렇다기엔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
[결혼 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