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네. ……네?”
해주가 멈칫하다 물었다.
“아버지라면…… 회장님, 말씀이세요? 내일, 회장님께 인사드려야 해요?”
결혼해야 하니, 강 회장을 만나야 하는 건 당연히 각오했다. 하지만 차차, 오랜만에 온 지한의 집에서 먼저 적응하고 인사를 드리러 갈 줄 알았는데 당장 내일이라니.
“말했잖아요. 시간이 없다고. 우상전자로 한시라도 빨리 들어가려면 모든 일을 서둘러도 모자라요.”
당황스러워하는 그녀를 보면서도 지한은 딱히 미안해하지 않는 말투로 말했다.
“지금부터 마음의 준비 해 둬요. 이만 일어나죠.”
용건을 마친 지한이 자리에서 일어섰고, 해주는 얼떨떨하게 그런 그를 따라 일어섰다.
하지만 걸음을 떼지 않았고, 그녀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망설이다 말했다.
“저, 하루만 시간을 주시면 안 될까요? 라일락커피 사장님께 작별 인사는 하고 갈 수 없을까요…….”
해주는 용기를 내 물었다. 서운해할 사장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연고 없는 미르마을에 금방 스며들 수 있게 도와준 은인인 사장의 마음을 섭섭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하루 시간을 주겠다는 대답을 간절히 바랐지만, 돌아온 건 냉정한 대답이었다.
“그럴 여유 없어요. 난 아주 바빠요. 윤해주 씨 개인적인 일로 내 계획에 차질 생기는 건 용납 못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전무님 입장에선 참 어처구니없는 부탁이었겠지. 조용히 하라는 대로 따라 해도 부족할 판에, 참 뻔뻔했을 테다.
그럼 사장에게 마지막 인사는 전화로 해야 하는 걸까. 괘씸하다고 생각하시면 어쩌지.
은혜를 갚아도 모자랄 분들과의 마지막이 늘 왜 이렇게 꼬이는 걸까. 전무님도, 사장님도…….
해주의 서글픈 심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지한은 잠시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다가 왼팔에 찬 손목시계를 쳐다봤다.
“오늘 저녁 7시에 출발하는 걸로 하죠. 그 안에 작별 인사 마치고 짐 챙겨서 나와요. 내 마지막 배려입니다.”
언제부터 그렇게 너그러웠다고.
윤해주. 참 많이 봐준다. 예나, 지금이나. 저 시무룩한 표정이 뭐라고.
현재 시각은 오후 3시였다. 4시간이면 꽤 충분한지 해주의 안색이 조금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시간 주신 만큼 늦지 않게 나갈게요.”
여전히 자신의 관대함이 불쾌했던 지한은 대꾸하는 대신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서 앞서 걸었다.
해주는 그 뒤를 조용히 뒤따르다가, 차에 다다랐을 때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곤 메시지를 보냈다.
[사장님 저 오늘 아빠 병원 때문에 말씀 못 드리고 카페 문 닫았어요. 그리고 그 일로 드릴 말씀이 있는데, 7시 전에 뵐 수 있을까요?]
***
해주는 라일락커피 2층에 월세를 살고 있었다.
짐을 꾸리고 있던 해주는 똑똑, 노크 소리에 문을 열었다.
현관문 바깥에 사장이 있었고, 그녀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며 물었다.
“뭔 일 있어? 나 머리 헹구자마자 뛰어왔어.”
갓 파마해 뽀글뽀글한 머리를 하고서 사장은 해주를 이리저리 살폈다.
카페 문을 멋대로 일찍 닫았다며 죄송하다고 말한 해주는 할 말이 있다며 보자고 말했다.
늘 성실하고 약속은 철저히 지키던 해주가 카페 문을 상의도 없이 닫은 것도 그녀답지 않은데, 자기 얘긴 죽어도 안 하던 애가 시간을 내 달라고 하다니.
“일단 앉으세요. 차 드릴까요?”
해주가 식탁 의자 하나를 빼며 사장에게 앉기를 권했다.
“커피랑 차, 미용실에서 실컷 마셨어. 뭔데? 무슨 일인데.”
차마 죄송한 마음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얼른 얘기를 끝내고 바깥에 있는 지한에게로 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녀는 사장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 얘기를 시작했다.
시작은 서울에 가게 됐다고. 한참 입술을 달싹이다가 겨우 말을 이었다. 정말 죄송하지만, 오늘 가야 할 것 같다고. 아빠 병원비를 핑계로 대면서, 서울에서 좋은 자리를 제안받았는데, 신약을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보수를 제시해 줬다고 해주는 말했다.
연신 죄송스러운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던 그녀의 얘기가 끝나자 사장이 말했다.
“그랬구나. 서울 올라가는 게 너한테 좋지. 그래도 당장 오늘이라니. 너무 갑작스럽다, 얘.”
처음엔 다짜고짜 서울로 떠나야 할 것 같다는 해주의 말에 당황하던 사장은 아빠의 병원비 얘기에 수긍하면서도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죄송해요. 놓치면 다시 잡을 수 없는 자리라.”
해주의 눈이 촉촉해졌다.
지한과의 계약이 끝나고 이혼하게 되면, 이젠 제2의 고향 같은 미르마을로 돌아와야겠다고 생각하는데 괜히 울컥, 눈물이 났다.
“왜 울어. 나도 눈물 나려고 하네.”
“사장님께 죄송해서요. 잘해 주신 은혜는 갚지도 못하고, 전 상의도 없이 갑자기 떠난다고 하고. 저 일 끝나면 꼭 다시 올게요.”
“무슨! 죄송할 거 하나 없어. 기회는 주어질 때 잡아야 하는 거야. 정 생각해서 갈팡질팡하다가 그 기회 놓치면 평생 후회해. 아빠 병원비 보태 주지도 못하는데 잡지는 말아야지. 그리고 이왕이면 서울에서 계속 일해. 젊을 땐 기회 넓은 곳이 최고야.”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다른 분들께 인사 못 드리고 가는 것도 너무 죄송해요.”
“상황이 그렇게 됐는데 어째. 사람들한테는 내가 잘 말해 줄 테니 걱정 마. 밑에 차 한 대 있던데. 서울 같이 가는 일행이야?”
“아, 네…… 업체에서 데리러 왔어요.”
해주가 작은 거짓말로 얼버무리자 사장은 애써 섭섭한 표정을 숨기며 의자를 뒤로 뺐다.
“빨리 가 봐야겠네.”
그러곤 핸드폰을 챙겨 들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입고 있던 털 조끼 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식탁 위에 올려 두었다.
“이번 달 월급이랑 보름치 월세.”
“네? 안 주셔도 돼요!”
시야에 들어온 봉투에 화들짝 놀란 해주가 봉투를 밀어내자, 사장은 다시 해주 쪽으로 봉투를 깊숙이 밀어주었다.
“서울 가서 일하면, 뭐 첫 달부터 월급이 나와? 나처럼 냉큼 가불해 주는 사장도 없어. 그러니 받아 가. 너 수중에 돈 좀 있어야 내 맘도 편해.”
“사장님…….”
“설마 서울 갔다고 연락 끊을 건 아니지?”
“그럴 리가요. 연락도 자주 할게요. 정말 감사해요.”
“꼭 해! 안 그러면 서울 쫓아갈 거니까. ……어휴. 더 있다간 눈물 날 것 같으니까 이만 갈게. 잘 가고!”
“사장님, 항상 건강하셔야 해요.”
“오냐.”
사장이 손을 흔들곤 집을 나섰다. 현관문이 닫힐 때까지 사장을 배웅한 해주는 혼자 남은 집에서 촉촉한 혼잣말을 내뱉었다.
“이번에 잘 해내자. 잘 해내서 모든 걸 제자리로 돌려놓자.”
지한에게 묵은 죗값을 치르고, 아빠와의 관계도 회복이 되길, 해주는 간절히 바랐다.
***
해주가 집에서 나오자, 라일락커피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검은 세단이 보였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가자 윤이 먼저 차에서 내렸고, 뒤이어 업무를 보던 태블릿을 내려놓으며 지한 또한 바깥으로 나왔다.
“짐은 그게 답니까.”
해주가 끌고 온 24인치 캐리어를 보며 지한이 묻자, 해주는 민망해했다.
“카페랑 아빠 병원 말곤 외출하질 않아서요. 챙길 게 몇 개 없었어요.”
그때, 윤이 다가왔다.
“주세요. 실어 드릴게요.”
“아, 감사해요.”
“앞으로 다시 자주 보겠네요. 갑자기 그만두셔서 얼마나 서운했다고요.”
해주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다시 잘 부탁드려요.”
과거, 해주는 윤과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지한의 비서인 그에게 해주가 이따금 아침을 차려 주었고, 윤은 해주에게 유명한 제과들을 사다 주곤 했다.
여전히 윤은 좋은 사람인가 보다.
좋은 사람인 만큼 2년 전, 지한을 곤란하게 한 사람이 자신이라는 걸 알면 참 많이 실망했을 텐데. 지한이 기술 자료를 훔친 범인에 대해 정말 조금도 티를 내지 않았는지 해주를 대하는 윤의 태도는 해맑기만 했다.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윤이 트렁크로 가 해주의 짐을 싣자, 지한은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다.
“타요.”
“네? 아니에요. 제가 조수석에 탈게요.”
“왜. 뒷자리가 상석이라서? 서울까지 4시간 더 걸려요. 앞자리에서 나 신경 쓰느라 편히 갈 수 있겠어요? 서울 가자마자 일정이 바빠요. 괜히 병나지 말고 편하게 가요.”
지한이 재차 뒷자리를 권했다. 실랑이를 하기엔 이미 너무 늦은 출발이라, 해주는 더는 군말 없이 조심스럽게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
지한이 차 문을 닫아 주었다. 안전띠를 매고서 해주는 창밖의 미르마을을, 라일락커피 건물을 바라봤다.
정말 떠나야 하는구나. 평생 정착할 곳인 줄 알았는데. ……아니, 차라리 잘된 일이야.
지독히 녹슨 삶의 고리를 끊고 돌아오면 이토록 평화로운 미르마을에 정말 정착할 수 있을 테니까.
이윽고 지한과 윤도 차에 올랐다.
해주는 그만 혼자만의 작별 인사를 마치고 미련 없이 앞을 보았다. 그사이, 검정 세단이 미르마을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
한남동까지 꼬박 4시간 반이 걸렸다.
자정이 가까워진 시간. 익숙한 한강의 야경을 보고 있자니 해주는 그제야 서울로 돌아온 게 실감이 났다.
도시는 여전했다. 그사이, 높은 빌딩이 몇 개 더 생긴 것 같지만.
그리고 또 그대로인 곳.
얼마 후 도착한 지한의 집 역시 그랬다.
한강을 바라보고 있는 단층 저택을 낮은 담이 둘러싸고, 안쪽에서 이국적인 느낌의 키 큰 나무들이 한 번 더 울타리 역할을 해 주고 있는 멋진 외관이 그랬고,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는 듯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집 안도 여전했다.
지한을 따라 현관으로 들어온 해주는 집 안 전경을 보고 있자니 괜히 마음이 이상했다.
하나하나 쓰고 닦으며 사용하던 가전들, 먼지를 정성스럽게 털어 냈던 가전들이 2년 전, 그 자리 그대로 놓여 있었다.
가장 행복했던 때였다. 아빠에게 감당할 수 없는 빚이 있었지만, 이 집에서 일하게 되며 이자와 원금도 다달이 갚을 수 있게 됐으니 걱정 따윈 없던 시절이었다.
언젠가 퇴직금으로 나머지 빚도 다 갚고, 아빠랑 행복하게 살 생각으로 매일 열심히 살았었는데.
“전무님, 짐 옮겨 두었습니다. 더 시키실 일 없으면 먼저 가 보겠습니다.”
그때, 해주가 지낼 작은방으로 짐을 옮겨 놓은 윤이 거실로 나왔다.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팔에 걸치던 지한이 대꾸했다.
“수고했어. 회사에서 보지.”
“네, 전무님. 주말 편히 쉬세요.”
지한에게 인사한 윤이 미소 지으며 해주에게도 가볍게 묵례했다. 그제야 해주는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가볍게 꾸벅였다.
과거 추억은 여기까지다. 추억해 봐야 옛날 일이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다.
어차피 떠올려 봤자 마지막은 후회로 가득한 그날 밤으로 다다를 뿐.
[결혼 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