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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협상-6화 (6/68)

6화.

“……‘결혼’이라고 하셨어요?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요?”

해주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잔뜩 키운 채 물었다.

“제대로 들었어요. 결혼하자고 했습니다.”

지한은 이어 말했다.

“일단 일어나요.”

그래도 해주가 멍하니 자신을 보고만 있자, 그는 옆을 향해 고개를 까딱이며 빈자리를 검지와 중지로 툭툭 가볍게 쳤다.

해주가 그제야 조심스럽게 일어섰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잠시 망설이다가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30센티 간격.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 두 사람은 떨어져 앉았다.

결혼이라니, 대체 왜?

혹시 나를 좋아하셨던 걸까? 여전히 잊지 못하고…… 아니야. 그러기엔 아까, 그날 밤 일을 별것 아니라는 듯 얘기하셨는걸.

그럼 왜?

해주는 애매모호한 30센티 간격을 유지한 채 이어질 지한의 말을 기다렸다.

짧은 순간 여러 가정을 해 보았지만, 역시 지한의 의중을 알 수는 없었다.

“받아들이는 게 좋을 거예요. 내 나름대로 윤해주 씨한테 기회를 주는 거니까. 거절한다면 한 달 후, 윤해주 씨 정말 고소할 겁니다.”

협박과 함께 지한은 덧붙였다.

“기간은 1년 정도. 내 외조부가 돌아가실 때까지만 유지해 주면 됩니다.”

……결혼에 기한이 있어?

그제야 해주는 지한이 말하는 결혼이 무엇인지 이해했다.

“설마, 계약 결혼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여전히 눈치 빨라서 좋네요.”

지한이 아까부터 손에 들고 있던 서류 봉투 하나를 해주의 앞에 내밀었다.

“읽어 봐요.”

해주가 얼떨떨하게 서류 봉투를 열었다. 종이는 A4용지 딱 한 장이었다.

<결혼 계약서

가. 갑과 을은 계약일로부터 반드시 결혼한다. 단, 갑의 외조부가 사망 시 이혼한다.

나. 혼인 신고 절차가 이행되면 갑은 을에게 지난 책임을 묻지 않는다. 단, 을은 결혼 생활 동안 갑에게 피해를 주는 잡음을 만들지 않는다.

다. 갑은 계약 기간 동안 을의 가족을 부양해야 하며, 원만하게 계약을 이행하고 이혼할 시엔 갑이 을에게 위자료 10억 원을 증여한다.

라. 단, 을의 귀책사유로 인해 이혼하게 될 경우, 을은 갑에게 10억 원으로 죗값을 치른다.>

“추가하고 싶은 내용 있으면 말해요. 어느 정도는 조율해 줄 생각이니까.”

추가로 요구할 만한 건 없었다. 계약서는 심플하지만 목적과 책임이 확실했으니까.

해주의 잘못으로 이혼하게 될 경우, 지한이 그녀에게 죗값 10억을 요구하는 건 당연했다.

현재 만나는 남자도 없고, 자신의 얘기를 쉽게 할 만한 친구도 없으니 잡음을 만들게 될 일도 없을 것이다.

그뿐인가.

속물 같지만, 해주는 마지막 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을의 가족 부양과 위자료 10억 원.

그러니까, 아빠를 돌봐 주신다는 뜻인가? 10억을 드려야 하는 게 아니라 내가 받는다고?

마치 해주의 마음을 읽은 듯이 지한이 말했다.

“계약서에 사인하면 그 직후 윤해주 씨 아버지는 대한민국 최고 재활 센터로 옮겨지게 될 겁니다. VIP실에서 쾌적하게 치료받게 될 거고. 위자료 10억 원은, 적다고 말하진 않을 거라 생각해요.”

해주는 한 번 더 계약서를 쳐다봤다.

버거운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 동아줄을 바라던 동화 같은 꿈이 계약서 안에 들어 있었다.

그리고 역시 다시 봐도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전 전무님을 배신한 사람이잖아요. 전무님과 결혼하기엔 스펙도…….”

해주가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말을 흐렸다.

말하지 않아도 지한은 알 것이다.

아빠만 있는 한 부모 가정, 번듯한 직장도 없고, 하다못해 대학교도 중퇴인걸.

면접을 볼 때도 꼭 지한의 집에서 일하고 싶다며 애원하느라 사연 팔이 했고, 지한의 집에서 나가던 날에도 불쌍해 보이기 위해 와인 한 잔과 함께 불행한 삶을 쭉 나열했었다.

“전무님 같은 분은 조건 좋은 여자분과 결혼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니. 이 결혼에 조건은 필요 없어요. 내가 필요한 건 이혼을 쉽게 해 줄 수 있는 여자니까.”

지한은 단호하게 말했다.

더 좋은 조건의 여자라면 당연히 얼마든지 있다.

재계 순위 10위 안에 드는 우상그룹과 손을 잡고 사업을 더 키우고자 욕심내는 집안은 차고 넘치니까.

하지만 지한은 사업을 키우고자 결혼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이혼 경력이 마음에 걸려서 돈으로 갚겠다면 굳이 강요하진 않겠습니다.”

“아뇨, 마음에 걸리진 않아요.”

해주는 고개를 저었다.

이혼 경력쯤이야. 그건 문제 될 게 없었다.

다만, 결혼이라…….

해주가 결혼에 대해 깊게 고민해 본 적이 있던 것은 아니다.

경험해 보는 건 나쁘지 않고, 못 하면 못 하는 대로. 딱 그 정도 생각이었으니 딱히 로망도 없었다.

하지만 만약 결혼하게 된다면 적어도 사랑하는 사람과 하고 싶은 마음이긴 했다.

그래야 행복한 가정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 같았다.

엄마와 달리.

해주는 사랑 없이 돈만 좇은 결혼의 결말을 바로 눈앞에서 지켜봤다. 물질적인 것만 따진 결혼은 한 남자를 파멸로, 그리고 자식을 불행으로 이끌었다.

한데 계약 결혼이라니, 괜찮을까?

“왜 계약 결혼을 하려고 하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해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한은 대답해 주기 어렵지 않다는 듯 흔쾌히 말했다.

“결혼을 조건으로 우상전자로 복귀하기로 했어요.”

“아.”

그 순간, 해주는 깨달았다. 하지 않을 수 없는 결혼이라는 걸.

‘난 우상전자 대표 자리에 앉는 게 목표예요. 최대한 빨리, 그 자리에 앉아서 대체 그 자리에 어떤 권력이 있는 건지 느껴 볼 겁니다.’

2년 전 그날, 와인에 취한 지한이 했던 말.

자신 때문에 쫓겨난 우상전자에, 다시 자신과의 결혼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니, 고민할 거리가 아니었다.

“할게요, 결혼.”

“잘 생각했어요. 도장 찍으면 곧장 윤해주 씨 아버지, 내가 아는 치료 센터로 옮기도록 하죠. 사설 구급차로 이송될 겁니다.”

“네? 바로요?”

빠른 진행에 해주가 당황하자 지한은 물었다.

“한시라도 빨리 좋은 곳에 모시는 게 낫지 않겠어요?”

좋은 병원, 좋은 치료 센터. 그건 해주도 늘 원했던 거였다. 이곳은 많이 낡고, 좁고, 허름했으니까.

게다가 VIP실 같은 곳으로 옮긴다면 좀 더 아빠가 안전할지도 몰랐다.

애초에 최대한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전라남도 해남, 그중에서도 유독 구석진 동네, 미르마을에 정착한 이유가 안전 때문이었으니까.

여태까진 안전했다. 하지만 해주는 늘 두려웠다. 그놈들이 언제 찾아올지 모르니까. 혹여나 그들이 해주와 아빠를 죽이는 걸 포기했대도, 해주는 그 사실을 알 길이 없으니 아마 평생 두려움에 떨며 살 것이다.

더 안전한 곳으로 옮길 수 있다면 조금은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다만, 아빠가 이곳 사람들과 정을 붙인 것 같았다.

혼자 외롭게 VIP실에 갇혀 있는 것보단, 마음을 연 사람들과 같이 있는 편이 아빠 마음의 병을 더 빨리 치료할 수 있지 않을까.

잠깐의 고민을 끝낸 해주가 말했다.

“그럼 혹시…… 이곳 요양병원에서 아빠 환자 기록 같은 걸 지워 주시는 것도 가능한가요?”

“환자 기록을?”

지한이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 미간을 좁히자 해주는 잠시 망설였다.

이런 얘기, 지한에게 해도 될까. 또 거짓 사연 팔이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아빠를 지키려면 뻔뻔해도 부탁하는 수밖엔 없었다.

“이런 말, 전무님께는 그냥 변명이 될 뿐이겠지만, 사실 저…… 해남에 전무님 피해서 도망 온 거 아니에요.”

“날 피해서 온 게 아니다?”

“전무님께 큰 죄 짓고 도망 나온 이튿날에 차 사고가 있었어요.”

“트럭 사고 말이에요? 브레이크가 안 잡혔다던데.”

지한도 보고를 받았다. 해주를 찾으라는 지한의 사주를 받은 심부름센터에게서.

브레이크가 고장 난 트럭에 부녀가 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해주의 친부 쪽은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이틀 만에 깨어났고, 의식을 찾은 친부와 함께 해주가 전라남도 해남까지 내려갔다는 사실까지 보고받았다.

“그 트럭. 브레이크 고장 난 거 아니에요. 일부러 사고 낸 거예요.”

“일부러?”

“확실해요. 첫 번째 추돌 후에 저 혼자 차 밖으로 빠져나왔거든요. 그때 그 덤프트럭, 다시 저한테 돌진했어요.”

“……뭐?”

지한이 이맛살을 구겼다.

“운전자는 아빠 목숨 협박하던 사채업자 중 한 명이었어요. 차 유리에 선팅 안 돼 있어서 분명 똑똑히 봤어요, 제가.”

“기가 막히는군.”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지한은 잠시 해주의 말을 곱씹었다. 그러곤 물었다.

“아버지 목숨은 무슨 얘깁니까?”

“……협박당했어요. 아빠 목숨 구하고 싶으면 우상전자에서 개발 중인 신제품 기술 자료 빼 오라고요…….”

“윤해주 씨가 내 집에서 일하는 건 어떻게 알고.”

“……제가 말했어요. 재벌 집에서 일하니까 다달이 이자는 충분히 갚을 수 있다고요. 그러니 빚으로 아빠 협박하지 말라고요.”

해주가 지한을 흘끗 봤다. 혹시 말하면 안 됐던 게 아닐까 싶어서.

지한은 그 말엔 개의치 않았다. 단지, 해주와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윤해주가 아직 스물여섯이었던 때.

그땐 밝고 단단했었다.

아직 모든 걸 책임지기엔 어린 나이임에도 아버지 빚을 갚기 위해 안 해 본 일이 없었던 그녀는 평일 오전, 건물 청소 일을 하다가 청소 반장에게 잘 보여 지한의 집 가사 도우미 일 면접을 추천받았다고 했다.

너무 어려 안 되겠다는 지한의 말에, 게으름 피우지 않겠다고 눈을 빛내기에 고민하다 채용했었다. 그리고 다짐보다 훨씬 더, 안쓰러울 만큼 열심히 일했다.

‘늘 감사합니다. 상무님 덕분에 빚 이자도 갚고, 적은 돈이지만 다달이 적금도 들 수 있게 됐어요. 5년 안엔 원금 갚는 게 목표예요. 저 정말 열심히 할게요. 오래 써 주셔야 해요.’

오래 곁에 있을 줄 알았다. 아버지 빚이 남아 있는 한은.

감정의 동요가 큰 편은 아니지만, 하필 감정이 커진 그 순간 뒤통수를 맞았다는 사실에 헛웃음이 나왔었다.

자신을 배신하고 아버지 빚을 갚았다는 소식에 애초에 그 목적으로 일부러 접근한 건가 싶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목숨까지 위협을 받았을 줄은 몰랐는데. 나름 궁지에 몰렸던가.

물론 그렇대도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합당한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환자 기록을 지울 수는 없어도, 요양병원으로 경호원은 붙여 주죠. 이름 있는 업체이니 아버지 안전은 보장해요.”

“감사합니다.”

“감사할 필요 없어요. 이 모든 건 계약 사항이니까. 결혼은 빠르면 한 달 내로 하게 될 겁니다.”

“한 달…… 준비가 가능한가요?”

너무도 짧은 준비 기간에 해주가 당황스러워하며 물었다.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일은 없죠. 모든 건 우리 쪽에서 준비합니다. 결혼하는 데 윤해주 씨가 신경 쓸 건 없어요. 신혼집은 내 집이 될 거고, 아.”

지한이 중요한 말이라는 듯 눈썹을 까딱였다.

“업무차 드나드는 사람이 많아요. 애정 없는 결혼 소문낼 순 없으니 결혼식 이후부턴 방은 같이 사용할 겁니다.”

한 침실을 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해주가 당황했다. 그러나 그녀는 금세 납득했다.

“네. 알겠습니다.”

부부가 결혼 초부터 각방을 쓴다면 많은 추측을 자아내겠지.

불편하겠지만, 어차피 일 년 남짓이다.

게다가 진작 감옥에서 썩었어야 할 인생, 좋은 한남동 저택에서 지내게 됐으면 그 정도 불편함은 기꺼이 감수해야 했다.

다만, 해주는 이어지는 지한의 말에 다시 당황해야 했다.

“그리고 내일 아버지 만나러 갈 겁니다.”

[결혼 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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