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맞아요.”
해주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이라도 면죄부를 받을 수 있길 바라며.
“그 부분이 핵심 자료인 줄 어떻게 알고?”
“전부 유출하는 건 곤란하실까 봐 핸드폰으로 찍을 때 몇 군데 빼 두었어요. ……핵심 자료인 줄은 지금 알았어요.”
그날 해주는 지한을 취하게 만든 뒤, 지한의 입으로 직접 들은 비밀번호를 가지고 우상전자 보안 서버에 접속해 기술 자료를 확인했다.
혹시나 지한이 깰까 봐 떨리는 손으로 자료들을 하나하나 찍던 도중에 그녀는 고민했다.
정말 전부 유출해야 할까? 아니면 위험을 감수하고 아주 조금, 티 나지 않게 빼고 찍어 갈까. 결국 그녀는 지한에 대한 죄책감으로 일말의 양심은 남겨 두기로 했다.
그게 핵심 자료인 줄은 알지 못한 채.
그 순간이었다. 해주는 번뜩, 헤드라이트를 강하게 쏘며 위협적으로 다가오던 덤프트럭을 떠올렸다.
……설마, 그래서였나? 아빠와 자신이 위협당한 게. 약속과 달리 자료를 전부 건네지 않아서 괘씸해 죽이려 했던 걸까?
아니, 아니다. 시기가 맞지 않는걸. 아빠와 자신이 죽을 뻔한 건 자료를 넘긴 이튿날이었다. 자료를 검토하고, 또 빠진 자료가 핵심 자료라는 사실을 깨닫기엔 짧은 시간이었다.
“갑자기 심각한 표정인데. 무슨 생각 합니까?”
“아뇨…… 아니에요.”
지한이 묻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해주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지한은 어쩐지 기분이 복잡해 보이는 해주를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윤해주 씨 아버지는 요양병원에 있는 것 같던데…….”
그때였다.
Rrrrr. Rrrrr.
카페 유니폼인 앞치마 주머니 안에 넣어 두었던 해주의 핸드폰에 전화벨이 울렸다. 해주가 차마 핸드폰을 꺼내지 못하고 눈치만 보니 지한은 하려던 말을 잠시 삼키고 말했다.
“받아요.”
“죄송합니다. 잠시만…….”
얼른 앞치마에서 핸드폰을 꺼낸 해주가 발신인부터 확인했다. 그다지 중요한 전화가 아니면 받지 않으려 했는데, 액정 화면 위에 ‘햇빛요양병원’이라고 저장된 이름이 떠 있었다.
센터에서 전화하는 경우는 두 경우뿐이었다.
하나는 입원비가 밀렸을 때. 또 하나는 아빠가 위독할 때.
어제 병원에 다녀오면서 밀린 병원비가 없는 걸 확인했으니 전자는 아닐 테고, 그러면…….
“여보세요?”
해주가 다급하게 전화를 받았다. 이윽고 수화기 너머 목소리에 잠시 집중하던 그녀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아, 안 돼요. 저희 아빠 좀 살려 주세요. 저 지금 갈게요! 제발, 제발 살려 주세요!”
마지막엔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로 말을 내지른 해주가 정신 빠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서둘러 카운터로 달려가 지갑을 챙겼다.
그리고 곧장 위태로운 걸음으로 카페 출입문을 향하려고 하는데, 그녀의 손목을 지한이 잡아챘다.
“무슨 일입니까?”
해주는 그 손을 떼 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죄송해요. 죄송한데, 제가 지금 가 봐야 해요. 금방 다녀올게요. 손 좀, 제발 놔주세요!”
정신이 반쯤 나간 듯한 해주의 표정을 보며 지한은 연약한 손목을 더 강하게 쥐었다.
“무슨 일인지 말해요.”
팔에 가해지는 압박에 해주가 눈물 차오른 눈을 들었다.
“아빠 있는 요양병원인데요. 아빠가 안 좋대요. 많이 위독하시대요. 그래서 죄송한데,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제발 놔주세요.”
볼을 타고 흐른 눈물이 파르르 떨리는 입술까지 적셨다.
지한은 그런 그녀를 잠시 내려다보곤 침착하게 물었다.
“햇빛요양병원 맞아요? 어떻게 갈 건데요?”
아빠가 있는 요양병원 이름은 또 어떻게 알았을까. 하지만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버스로…… 아니, 택시로요.”
“그럼 가죠. 데려다줄게요.”
“……네?”
“대중교통보단 내 차가 빠릅니다.”
해주가 거절할 새 없이, 지한은 그녀를 데리고서 뛰듯이 출입문으로 향했다.
아주 잠시 신세를 져도 되는 걸까 싶었지만, 지금은 찬물 더운물 가릴 때가 아니었다. 해주는 서둘러 그를 따랐다.
“햇빛요양병원으로 가.”
해주를 뒷좌석에 앉힌 지한이 조수석 문을 열며 말했다.
“네?”
차에서 대기하고 있던 윤이 당황하며 묻자 지한은 재차 말했다.
“햇빛요양병원. 서둘러.”
“아, 네!”
두 번의 의문은 없었다.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찍은 윤이 차를 출발시켰고, 서두르라는 말대로 빠르게 차를 출발시켰다.
초조해 떨리는 두 손을 맞잡고서 해주는 기도하듯 눈을 감았다.
아빠가 잘못되면 난 어쩌지?
하필 지한이 찾아온 날이라니. 죄를 저지른 벌을 받는 건가?
그 죄를 받아야 한다면 차라리 자신이 받는 게 낫다. 아빠가 없으면 세상에 살 이유도 없으니까…….
해주가 사는 미르마을에서 아빠가 입원해 있는 햇빛요양병원까지는 보통 30분이 걸린다.
하나, 오늘은 그 길을 단 15분 만에 도착했다.
“다 왔어요.”
“감사합니다.”
지한의 말에 해주는 급한 말투로 감사 인사를 한 뒤, 차에서 뛰쳐나가려고 했다.
그 순간, 그녀가 손에 든 핸드폰에 다시 전화가 울렸다. 요양병원이었다.
차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전화를 받은 해주가 불안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세요?”
-윤진섭 환자 보호자님 맞으시죠? 환자분 안정되셨어요. 혈압, 심장 박동수 전부 정상 수치고요, 센터로 오고 계시죠? 자세한 건 오시면 담당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실 겁니다.
한순간, 해주는 맥이 탁 풀렸다. 눈으로 보기 전까진 완전히 안심할 수 없겠지만, 한시름 놨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갑작스러운 발작이었습니다. 작년 3월에도 같은 증상이 있었는데, 교통사고도 3월에 났다고 하셨으니 환자분의 심리적인 요인으로 발작이 일어났을 수도 있습니다.’
담당의는 해주에게 물었다.
‘신약 사용은 결정 내리셨나요? 말씀드렸다시피 위험한 약물 아니고, 근육에 미세한 자극을 주는 주사약이라 안전한 편이고, 임상 실험 결과도 아주 좋습니다.’
지쳤는지 잠든 아빠, 진섭을 내려다보며 해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가격이 비싸 선뜻 대답하지 못해 가슴이 아팠는데, 핼쑥한 진섭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더 착잡해졌다.
“아빠. 언제까지 아플 거야? 이제 그만 낫고 나랑 집으로 가자. 응?”
대답 없이 곤한 숨소리만을 내는 진섭을 보며 해주는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얼굴 보면서 대화도 하고 싶어. 눈 뜨면 나 보면서 웃어 주면 안 돼? 왔냐고, 반겨 주면 안 돼?”
진섭은 알까. 일주일에 한 번씩, 해주가 요양병원에 찾아온다는 걸. 매일 이렇게 그리워만 하다 간다는 것을.
덤프트럭 사고로 인해 혼수상태에 빠졌던 진섭은 이틀 후 깨어났지만 다리를 쓰지 못했고, 실어증에 빠졌다.
병원에선 사고 후유증이라고 말했다.
나아야겠다는 환자의 의지가 중요한데, 환자에겐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고. 따님께서 다양한 자극을 줘서라도 의지를 찾아 주셔야 한다고.
해주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아주 간절하게.
그 뒤, 요양병원으로 옮긴 지 2년.
1년쯤 전부턴 말은 하지 않아도 곧잘 웃기는 한다는데, 해주는 아빠가 웃는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덤프트럭이 처음 아빠 차를 덮쳤을 때, 그때 아빠는 핸들에 머리를 강하게 박아 얼굴이 피범벅이 됐음에도 끝까지 눈으로 해주를 좇았다.
그리고 보았다.
본능적으로 살기 위해 차에서 빠져나간 해주를 정확하게 노리던 덤프트럭을.
아빠의 목숨을 위협하던 사채업자 중 한 명이었던 트럭 운전자를.
사랑하는 딸을 위험한 상황에 빠뜨린 게 자신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심한 죄책감으로 마음의 병을 얻은 아빠는 입을 닫았고, 병원에 해주가 오면 고집스럽게 벽만 보고 누워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그뿐인가. 해주가 다녀가면 일주일은 앓아눕는다고 간병인이 말했다.
그 뒤로 해주는 아빠가 깊이 낮잠 자는 점심시간에만 잠깐 다녀가곤 했고, 혹여라도 깨어 있다면 멀리서 얼굴만 보았다.
자신을 보면서 밝게 웃어 주던 아빠가 너무도 그리워서, 해주는 잠시 아빠 품에 머리를 기대 눈을 감았다.
***
다시 센터를 나오니 마당 벤치에 지한과 윤이 앉아 있었다.
해주를 본 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어라 말하는 지한의 지시에 윤은 멀리서 해주에게 고개만 꾸벅 숙여 인사하곤 곧장 차로 향했다.
마찬가지로 윤에게 고갯짓으로 인사한 해주는 이내 지한의 앞으로 다가섰다.
걸음을 멈춰 선 그녀가 벤치에 앉아 있는 그를 향해 허리를 숙이고 인사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 상태는 어떱니까?”
“덕분에 안정하셨어요.”
“다행이네요.”
지한은 진심을 담아 얘기하며 해주를 바라봤다. 얼굴이 창백했고, 몸엔 힘이 없어 보였다.
이어 그는 왼팔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2시. 시간이 많지 않았다. 대화를 강행해도 될까, 생각하던 그의 미간이 좁혀진 것은 그때였다.
“뭐 합니까.”
말릴 새도 없이, 지한의 앞에 해주가 무릎 꿇었다.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세요.”
“일어나요.”
지한이 차갑게 말했지만, 해주는 무릎 위에 올려 둔 손을 꽉 주먹 쥐며 간절히 말했다.
“시간을 좀 주세요. 저 상무님…… 아니. 전무님께 지은 죗값 꼭 갚을게요. 오늘 신세 진 것도 함께 갚을게요.”
지한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 헛웃음 지었다.
“정말 많이 변했네요, 윤해주 씨. 늘 당당하던 사람이 아주 볼품없어졌어요.”
해주는 처연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 정도 비난은 달게 듣겠다는 듯.
그런 그녀를 보며 지한은 무릎 꿇은 해주를 일으키는 것을 포기했다. 그 대신 다리를 꼬고 팔짱을 꼈다.
“한데, 갚을 수 있겠어요? 난 10억은 받아야 할 것 같은데.”
“……10억이요?”
해주가 저도 모르게 다시 고개를 들었다. 선연히 떨리는 눈빛을 보며 지한은 말했다.
“회사 손해액이 그 정도는 됩니다. 이자 같은 거 받을 생각은 없는데, 그래도 원금은 받아야 윤해주 씨가 죗값을 치렀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어요?”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억울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지?
지한에게 억울한 건 아니었다. 단지, 해주는 제 상황이 참 분했다.
아빠 빚을 갚기 위해 일을 시작한 게 문제였을까? 빨리 갚고자 욕심내며 재벌 집에 가사 도우미로 취직한 게 문제였나? 아니면 이 모든 원흉의 시작인 엄마한테서 애초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나?
해주가 쓰게 웃었다.
최악이네. 이 순간 아빠가 무사한 것만으로도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철저한 피해자인 지한을 앞에 두고 자기 연민에 빠져 있다니 말이다.
저지른 잘못을 해결할 생각만 해도 모자랄 판에, 참 잘하는 짓이다, 윤해주.
“물론 못 갚겠죠. 무슨 능력이 있다고.”
“…….”
“그만 일어나요.”
착각일까. 어쩐지 마지막 말은 묘하게 너그러워진 목소리 같았다.
해주가 의아함에 고개를 들었다. 다시 그는 말했다.
“윤해주 씨 무릎 꿇고 앉는다고 해결되는 일 아니고, 보는 나도 썩 유쾌하진 않으니까 볼썽사납게 그러고 있지 말고.”
그럼에도 해주는 차마 일어서지 못하고 고개를 들어 지한을 쳐다만 봤다,
그 눈을 바라보며 지한은 스스로가 낯설게 느껴졌다. 정확히는, 윤해주를 떠올릴 때면 늘 자신이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곤 했다.
언제부터 그렇게 너그러운 사람이었다고.
특히 그가 우상전자 대표 자리에 오르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에겐 관용 따위 베풀지 않았었다.
어떻게 우상전자 상무 자리까지 올라갔는데.
정말 잠자리를 한 사이라 그런가. 잊지 못할 그날 때문에?
그러나 그날의 기억은 윤해주가 한순간에 망쳐 놓았다. 보통의 지한 같았으면 이미 2년 전에 처분을 결정했어야 했는데, 스스로 이해할 수 없게도 여기까지 끌고 왔다.
그리고 결국 죗값으로 받으려는 건…….
지한이 저를 올려다보는 해주의 눈을 뚜렷이 마주치며 말했다.
“결혼합시다.”
[결혼 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