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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협상-4화 (4/68)

4화.

지한이 카운터 가장 가까운 자리에 의자를 빼 앉았다.

그가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고 카운터를 응시하자, 해주는 현실감 없는 기분으로 커피 머신 앞에 섰다.

역시 정말 꿈이 아닐까. 오늘 햇살이 아주 포근했으니까, 나도 모르게 단잠에 빠져 꿈을 꾸는 중인 게 아닐까?

그러나 몇 번이나 눈을 들어 흘끔대 봐도 지한이었다. 이목구비 하나하나, 그가 아닐 수 없었다.

여전했다. 잘생긴 외모도, 서늘한 분위기도.

2년 만의 재회에도 지한은 예전처럼 당당하고 빛이 났다.

아주 초라해진 자신과는 다르게.

이내 에스프레소가 다 내려졌다. 해주는 미리 컵에 담아 준비한 얼음물 속에 에스프레소를 부은 뒤, 컵 뚜껑을 닫고 빨대를 꽂았다. 그러곤 잠시 갈팡질팡하다가 설탕 두 봉지를 챙겨 그가 앉은 테이블로 다가갔다.

“커피 드세요. 설탕은…… 여전히 넣어 드시는지 몰라서 따로 가져왔어요.”

해주가 커피와 함께 조심스럽게 설탕을 내밀며 말하자, 지한은 대답 대신 그것들을 집어 한꺼번에 봉지를 잡아 뜯고는 그대로 커피 속에 부었다.

지한은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시원하면서도 씁쓸한 맛 뒤에 딸려 온 달달함을 느끼며 그가 말했다.

“신기하단 말이에요. 내가 내리면 이 맛이 아니던데. 윤해주 씨 커피는 여전히 맛있네.”

지한이 싱긋 웃었다.

분명 웃고 있지만 서늘한 기운이 서려 있는 표정에 해주는 긴장했다.

“얼음을 많이 넣으셨어야 할 거예요. 조금 넣으면 금방 녹아서 밍밍해지거든요…….”

지한이 시답지 않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커피가 맛있다고 말한 게 아니란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뭐라고 입을 열지 않으면 테이블 위가 지독하게 고요해져 숨 막히는 기분이 들 것 같아서, 해주는 필사적으로 대답했다.

“아. 얼음 많이. 그걸 몰랐네요.”

가볍게 대꾸한 지한이 맞은편 자리를 꽤나 정중한 손짓으로 가리켰다.

“앉아요. 오랜만에 얘기 좀 나누게. 아, 사장님께 허락받아야 하나. 퇴근이 몇 시예요?”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지한이 왼팔을 들어 손목시계를 바라보자, 해주는 얼른 대답했다.

“지금, 괜찮아요. 이 시간에 손님 잘 안 오세요.”

해주가 조심스럽게 의자를 빼내곤 지한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눈꺼풀을 살짝 내려 그의 가슴팍에 시선을 두었다.

넓은 가슴을 따라 딱 벌어져 있는 감색 슈트를 바라보며, 또 은근하게 풍겨 오는 그의 남성미 짙은 향수 냄새를 맡으며, 해주는 불안한 마음에 테이블 밑에서 손가락을 가만히 두지 못했다.

2년을 묵혀 온 죗값이 얼마나 무거울까. 고소를 당할까, 아니면 피해 금액을 보상해야 할까.

돈은 드릴 수 없는데…… 당장 구속되면 어쩌지? 아직 아빠에게 신약도 써 보지 못했는데. 아빠가 걸을 수 있을 때까지만 봐달라고 빌면, 들어주시지 않겠지.

병원비를 낼 수 없게 된다면 아빠는 어떻게 될까.

염치없지만 사장님께 아빠를 부탁해야 할까. 하지만 사장님께 그런 짐을 지워 드릴 수는 없는데.

“아쉽겠어요. 내가 못 찾길 바랐을 텐데.”

잠시 해주를 빤하게 바라보던 지한이 냉소적으로 말했다. 해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상무님이라면 절 더 일찍 찾으실 줄 알았어요.”

“그래요? 그럼 내가 찾아올 걸 각오는 했겠네요.”

“네…… 언젠가 오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먼저 찾아올 생각은 안 하고서 말이죠?”

“……죄송합니다.”

해주는 다시금 고개를 푹 숙였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간 해주에게는 무수히 많은 사건과 불행들이 있었지만, 지한의 앞에선 다 변명이 될 뿐이었다.

지한은 차마 자신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해주를 가만히 바라봤다.

2년 새 참 많이도 변했다. 자꾸만 눈길이 가는 단정한 얼굴은 그대로지만, 매사 당당했던 윤해주는 이제 주눅 든 태도가 더 익숙해 보였다.

보기 좋진 않았다. 봐주고 싶어지는 저 처연함 따위.

“내가 참 묻고 싶은 게 많아요. 듣고 싶은 말도 많고. 한데, 안타깝게도 시간이 별로 없어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지한이 말했다. 그 뒤, 그는 슈트 재킷 앞주머니에서 검지와 중지로 지갑 속에 넣어 둔 사진을 빼내 해주의 앞에 내밀었다.

해주의 시야에 사진 한 장이 들어왔다. 그녀는 눈치 보며 흘끗, 지한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사진을 집어 들었다.

“아.”

그리고 다음 순간, 해주는 놀랐다.

사진 속 인물 때문에.

라일락커피 건물 앞을 청소 중인 자신이었다.

헤어스타일이 어깨를 가볍게 스치는 중단발이다. 지금 해주의 머리카락은 날갯죽지 정도 오는 긴 머리. 그러니까, 이건 2년 전 사진이었다.

당황해 잠시 아무 말도 못 하던 해주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저 여기 있는 거 알고 계셨어요?”

“요즘 사람 찾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서.”

지한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곤 말을 덧붙였다.

“아버지 빚은 잘 갚았어요? 2억이던가.”

“그걸 어떻게…….”

“고작 2억 때문에 그 짓을 벌였다니 얼마나 기가 찼는지.”

지한은 다시 생각해도 기가 막혔다. 그 일로 회사는 큰 손해를 입었고, 자신은 프로젝트 책임자로서 모든 것을 내려놔야 했다.

한데, 그 대범한 짓을 하고 해결한 빚이 고작 2억이라니.

대기업 기술 자료를 빼 갔으면 경쟁 회사에 서울 집 한 채 값 정도는 받고 넘겼어야지. 정확히 빚만 갚고 다시 빈털터리로 전라남도 해남까지 내려와 카페 아르바이트나 하며 사는 꼴이 이해 가지 않았다.

“알고 계셨으면서 왜…… 안 찾아오셨어요?”

이 순간, 상대방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해주도 마찬가지였다.

안 그래도 늘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대기업인 우상그룹 회장의 외아들인 지한이, 아무리 땅끝 마을 어딘가에 숨었다고 해도 자신 하나를 못 찾는다니.

생각만큼 사람 찾는 일이 그리 쉬운 건 아닌가? 아니면 내가 정말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은 걸까? 생각했는데 다 착각이었다.

“신고도 안 하신 것 같던데…….”

이상한 점은 또 있었다.

사소한 기삿거리라도 놓칠 리 없는 언론에서, 우상그룹 기술 유출 범인에 대한 정보는 단 한 마디, 단 한 줄도 읊지 않았다.

어떻게 유출됐는지 미스터리라는 얘기뿐이었고, 책임자인 지한이 모든 책임을 안고 우상그룹 상무 자리에서 내려와 우상그룹 계열사 중 가장 성장이 더딘 호텔 쪽으로 내려간다는 말뿐이었다.

“글쎄. 왜 안 했을 것 같아요?”

지한은 물었다.

그러게. 정말 왜 아무 행동도 안 하셨을까?

해주가 고민하며 대답하지 못하고 있자, 지한은 말해 보라는 듯 눈썹을 까딱였다.

결국 그녀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혹시…… 그날 잠자리 때문인가요?”

혹시, 그날의 몸정 때문에 봐주신 건 아닌지.

자신처럼 지한도 그날 밤을 잊지 못한 건 아닌지.

말도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그를 다시 마주하게 된 순간부터 요동치는 마음에 해주는 저도 모르게 기대감을 갖고 물었다.

그런 해주를 비웃듯 지한은 픽, 냉기가 서린 미소를 지었다.

“설마. 그깟 하룻밤이 뭐라고.”

해주에게는 생생한 그날 밤 일은 역시 지한에겐 떠올릴 가치도 없는 날인 모양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지한은 그날 배신을 당했으니까.

“실수였는데, 안 그래요?”

다시 지한이 말했고, 해주는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실수라……. 그랬구나. 상무님에겐 실수였구나. 최악의 날로 기억되는 것보단 실수가 나을까?

해주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지한은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

“처음엔 고민 좀 했어요. 바로 찾아가서 죗값을 물게 할까, 아니면 정말 내 자리가 위태할 때 터뜨릴까.”

술김에 몸을 섞고, 해주가 도망가고 열흘 뒤. 지한은 심부름업체가 찍어 온 해주의 사진을 보며 그녀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자신을 속이고 기술 자료를 훔친 게 괘씸하니 바로 잡아 올까, 아니면 괘씸한 만큼 더 크게 이용할까.

“가령 회사에 수습하기 힘든 사고가 터졌을 때, 과거 우상전자 기술 유출 사건의 범인이 사실은 가사 도우미였다, 하는. 윤해주 씨한테 모든 시선이 쏠리게 할까, 하고 말이에요.”

물론 일을 크게 만들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그 사건이 제 흠을 드러내는 멍청한 짓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방심한 건 지한 자신의 실수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굳이 그 얘기까지 해주에게 하진 않았다.

지한은 해주에게 제안할 일이 있었고, 큰 계약을 앞두고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는 건 현명한 짓이 아니었다.

해주는 그가 당연히 후자를 선택했겠구나, 생각했다. 이제야 찾아온 걸 보면.

아, 그럼 회사에 큰일이 생긴 건가? 난 그 일을 덮기 위해 사용되는 걸까?

크게 주목받게 될까? 많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당할까? 해주가 두려워하는데, 다시 지한이 말했다.

“한데, 아직 결정도 못 하고 여기까지 왔네요. 누구 때문에 좀 바빴거든.”

지한 스스로 윤해주 처리 하나 결정하지 못한 게 웃기지만, 사실이었다.

그동안 지한은 몸이 열 개라도, 하루가 이틀이래도 부족할 만큼 정말 바쁘게 일했다.

중요한 자료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책임을 지고 우상그룹 대표 사업장인 우상전자에서 성장이 더딘 WS호텔&리조트로 좌천된 그는 작년까지 WS호텔 사업에 집중하며 호텔 가치를 끌어올리느라 모든 시간을 써야 했다. 그리고 이제는 리조트 사업까지.

모든 건 우상전자로 돌아가기 위한 노력이었다.

지한에겐 해주에 대한 처벌을 결정하는 것보다 언젠가 우상전자 대표가 되겠다는 결심이 더 중요했고, 때문에 일에만 전념하다 보니 어느덧 2년이란 시간이 지나 있었다.

지한은 제 앞의 커피를 바라보았다.

참 웃긴 일은, 해주 때문에 피곤한 삶을 살고 있는데, 매일 피곤한 그에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만들어 주었던 커피만이 피로 회복제가 되어 주었다는 점이었다.

“한 가지 궁금했는데.”

“네?”

“그때 유출한 기술 자료. 가장 중요한 부분은 유출되지 않은 것 같더라고. DF에서 내놓은 신상이 허술한 거 보니. 일부러 그랬어요?”

지한이 묻고 싶었던 것 하나.

2년 전, DF전자에서 새 TV 모델을 출시했다. 전문 용어를 곁들인 홍보엔 홈 시어터와 흡사한 음향 장치를 탑재해, 영화, 콘서트, 각종 스포츠 경기를 시청하면 마치 현장에서 즐기는 기분을 누릴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그 순간 지한은 바로 알아챘다.

윤해주가 기술 자료를 빼내 유출한 곳이 어디인지를.

하지만 어딘가 부족했다. 우상전자에서 준비하던 새 TV가 전 모델과 비교했을 때 음향 장치 기술이 업그레이드된 건 맞지만, 진짜 핵심은 전보다 업그레이드된 기술이 장착된 디스플레이였다.

디스플레이 자료를 받았다면 DF전자에서 그걸 놓칠 리 없다고 생각하던 지한은 문득 생각에 잠겼다.

아. 윤해주가 그건 넘기지 않았나?

기술 자료를 유출당한 건 사실이니 지한은 책임자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지만, 핵심 자료는 유출당하지 않은 덕분에 우상전자는 야심 차게 준비한 새 TV를 예정했던 날짜보다 조금 늦게나마 출시할 수 있었다.

지한에게 중요한 건 그것이었다. 팀원들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느냐 아니냐. 결국 노력은 큰 결실을 얻었고, 그건 지한이 해주에게 2년이라는 시간을 주게 된 이유가 되기도 했다.

[결혼 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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