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라일락커피 사장은 아침부터 입이 댓 발 나와 있었다.
“아니, 일하다가 소주 좀 마실 수 있지. 그렇다고 빼앗냐? 새참이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해주는 동요하지 않고 사장에게서 빼앗은 텀블러를 싱크대에 기울여 안에 든 소주를 쏟아부었다.
“새참은 일 다 하고 먹는 거고요. 사장님이 마시니까 손님들도 자꾸 소주 드시려고 하잖아요. 카페인지 술집인지 모호한 거 싫다고 하셔서 겨우 카페 분위기 내 놨는데, 사장님이 이러시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요.”
“그래서 몰래 텀블러에 마시잖아.”
사장이 웅얼웅얼 변명했지만, 해주는 단호했다.
“여기 사장님 가게예요. 사장님이 열심히 안 하시면 직원도 같이 대충 할 수밖에요.”
졸지에 아르바이트생에게 혼난 사장이 잠시 꽁한 표정을 짓더니 입술을 삐죽였다.
“됐어, 됐어! 안 마셔. 안 마시면 될 거 아니야.”
오늘도 사장은 먼저 백기를 들었다.
자신도 동네에서 알아주는 깍쟁이건만, 아무리 맞는 말이라도 어쩜 그리 따박따박 해 대는지.
요즘 젊은것들은 다 이리 당돌한 건지, 아니면 해주가 유독 똑순이인지. 암튼 도무지 이길 수가 없었다.
그제야 해주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행주를 집어 들었다.
“그럼 전 테이블 좀 닦고 올게요.”
사장이 홀로 나가는 해주를 바라봤다. 언제 입술을 비죽였냐는 듯, 금세 사장의 얼굴엔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참 싹싹하고, 뭐든 열심이라니까.”
내 가게처럼 일해 주는 직원 구하기가 어디 쉽나. 특히 이런 촌구석에서 말이다. 옆 마을 치킨집에서도 탐내는 귀한 인재, 뺏기지 않으려면 사장이라도 말 잘 들어야지.
일하면서 마실 때 가장 꿀맛 같은 소주가 좀 아쉽지만, 젊은 해주랑 일하며 수다 떠는 것도 만만찮게 재밌으니 하나쯤은 양보할 만했다.
“해주, 너도 이제 스물아홉 됐잖아. 연애 안 해?”
사장이 두 개째 테이블을 닦는 중인 해주에게 물었다. 해주는 행주질을 계속하면서 대답했다.
“연애는요. 제 처지 아시면서.”
“처지가 뭐. 그러면 즐기지도 못하나? 술도 안 마셔, 남자도 안 만나, 친구도 없어. 뭔 재미로 살아?”
“돈 벌잖아요. 주말마다 아빠도 보러 가고요. 전 일하고 아빠 볼 때가 제일 재밌어요. 아! 사장님하고 수다 떠는 것도요.”
해주의 너스레에 사장은 싫지 않다는 듯 픽 웃음 지으면서 물었다.
“됐네요. 내가 괜찮은 놈 하나 소개해 주랴?”
“저 눈 높아서 웬만한 남자는 마음에 안 차요.”
“얼마나 높길래? 내 친구 조카 중에 초등학교 선생님 있어. 인물도 훤칠한데.”
“직업 보는 건 아니고…… 암튼 됐어요.”
“젊은 애가 연애를 해야지. 뭐, 전 애인한테 호되게 차이기라도 했어?”
“네, 호되게 차였네요.”
거짓을 숨기기 위해 웃음 지으며 해주는 다시 테이블을 닦는 데 집중했다.
테이블을 다 닦은 후엔 의자 등받이도 닦으며 그녀는 한 남자를 떠올렸다.
외모, 체격, 능력, 재력, 성격까지. 어느 하나 빠지는 것 없던, 해주의 인생에서 가장 완벽했던 남자.
그리고…… 2년 전 그녀가 배신한 남자.
집주인과 가사 도우미. 그 이상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꿈속에서조차 사귀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와 잠을 잤다. 하필, 배신해야 했던 그 밤에.
해주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만약, 그때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어떤 관계가 됐을까?
어차피 연인은 될 수 없었으려나. 그와는 사는 환경이 너무 달랐으니까.
“그나저나 아버지는 차도 좀 없으셔?”
문득, 사장은 어제 해주가 병원에 잠시 다녀왔던 걸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해주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여전하세요.”
때마침 마지막 테이블을 닦았던 해주는 행주를 들고 다시 카운터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더니 잠시 입을 달싹이다가 조심스럽게 사장에게 말했다.
“저 사장님, 아빠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저 일자리 소개 좀 받을 수 있을까요?”
사장의 눈이 동그래졌다.
“일자리? 왜. 카페 일 그만두려고? 내가 힘들게 한 거 있어?”
말끝에 서운함이 묻어 있는 사장의 질문에 해주는 재빨리 손을 저어 보였다.
“아뇨. 카페랑 같이 할 수 있는 일이요. 아빠 병원비 때문에 돈이 좀 더 필요해서요.”
“병원비? 어제 가서 납부하고 온 거 아니야? 다 못 냈어?”
“그건 아니고…… 신약이 나왔대요. 근육 자극에 도움이 된다는데, 임상 실험 성공한 약이래서 써 보고 싶어요. 지난번처럼 농사일 도와드리는 것도 좋아요.”
“그럼 내가 월급 가불 좀 해 줘? 일 더 하는 건 안 돼. 얼마 전에 쓰러졌으면서 무슨.”
해주를 보는 사장의 얼굴엔 걱정이 한가득했다.
젊은 애 인생이 뭐 이렇게 복잡하고 기구한 건지.
큰 빚이 있어, 아버지는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요양병원 신세를 져야 해,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쭉 서울에서 살던 애가 연고 없는 해남까지 내려와.
사장 역시 젊은 시절에 고생 꽤나 했었다. 부모님은 두 분 다 돌아가시고, 그나마 하나 있는 언니와 서로를 의지하며 친인척 하나 없는 서울로 상경해서 힘들었던 시절이 있기에 해주에게 더 마음이 쓰였다.
마음 같아선 병원비를 그냥 내 주고 싶었지만, 사장 또한 넉넉한 형편은 못 되어 미르마을 가게들 중 최고 고액 월급을 챙겨 주는 것과 가불을 해 주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해주는 고마움을 담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벌써 두 번이나 해 주셨잖아요. 아직 다 갚지도 못했는데 더 신세 질 수는 없어요. 카페 쉬는 날이나 밤중에 하는 일 있으면 그걸로 충분해요.”
카페에 취직하자마자 아빠를 해남에 있는 요양병원으로 옮기기 위해 한 번, 일한 지 1년이 다 되어 갈 때 아빠 상태가 위독해 또 한 번.
사실 말만 가불이었다.
두 번째로 가불을 받았을 땐 월급 3개월 치를 미리 받았는데, 돈 빌린 날 이듬달부터 다시 월급을 꼬박꼬박 주었으니 따지고 보면 두 달 치 월급을 그냥 선의로 빌려준 것이었다.
천천히 갚으라던 그 돈조차 다 갚지 못했는데 또 가불이라니. 미안해서 그럴 수 없었다.
서울이었으면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했을 텐데. 하다못해 취객을 상대해야 하는 대리운전이라도 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아주 구석진 시골 마을이었다. 편의점은 없었고,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사는 마을 사람들끼리 술을 마시다 보니 대리운전 기사가 필요할 리 만무했다.
“그래, 그럼. 나 오늘 머리하는 날이니까 부업거리 없는지 알아봐 줄게.”
“감사해요, 사장님.”
***
라일락커피 사장이 외출했다.
한 달에 한 번 미용실에서 동네 아주머니들과 모여 수다 떨며 파마를 하는 사장은 마감 시간이 다 돼서야 카페로 돌아오곤 했다.
손님은 없고, 해주는 무료하게 카운터 앞에 앉아 텅텅 빈 카페를 바라봤다.
아주 구석진 시골 마을에 있는 것치곤 깔끔한 편이다. 서울 개인 카페들에 비하면 올드하겠지만, 제법 도회적인 분위기를 내는 카페였다.
이곳에서 태어났지만, 젊은 시절엔 내내 서울에서 지내며 건축 일을 배웠다는 사장의 손길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나도 언젠가 내 카페 하나 차릴 수 있으려나.”
아주 작은 카페라도, 여기보다 더 시골이더라도. 아주 많이 소소해도 되지만…….
“그것도 나한텐 사치겠지.”
생각의 끝에서 해주는 결국 냉소적으로 웃었다.
카페는 무슨. 숨어 사는 주제에 꿈과 희망은 또 무슨.
그녀의 시선이 카운터 아래 놓인 미니 탁상 달력을 향했다.
3월의 끝자락. 어느덧 해남에 온 지도 2년을 꽉 채웠다. 계절을 여덟 번 보내는 동안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여전히 아빠는 아프고, 모은 돈은 없고, 죗값을 치를 능력도 당연히 없다.
예전처럼 아빠 빚도 갚아 주고, 집도 사겠다는 그런 거창한 포부가 있던 것도 아닌데. 그냥 다른 것 다 필요 없고, 단 하나, 아빠가 건강해질 수 있기만을 바랐는데 지난 2년 동안 그것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죄를 지어 이토록 인생이 안 풀리는 걸까. 죄를 지으면 업보가 언젠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는 그 말을 떠올리며, 해주는 더 깊은 생각에 빠졌다.
……강지한.
그녀는 다시금 자신이 배신한 그 남자를 떠올렸다.
찾아가서 무릎 꿇고 사죄하고 싶은 마음은 늘 굴뚝같다. 뻔뻔하게 이렇게 숨어 지내지 않고, 그를 찾아가 용서를 구하고 싶은 건 2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다만 그럴 수 없는 건, 해주에겐 아빠가 우선이니까.
해주는 이어 떠오르는 기억에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빠와 함께 타고 가던 차를 덮친 덤프트럭. 정신을 차리자마자 차에서 간신히 빠져나와 도망치는 해주를 또 한 번 덮치려던 그 순간.
그날의 꽃샘추위, 아무도 없던 삼거리, 입 안에서 느껴지던 피 맛. 공포감이 여전히 기억과 온몸 구석구석에 배어 있었다.
해주가 울렁거리는 속에 괜히 욱, 토악질을 하고 싶어질 때였다.
딸랑.
카페 출입문에 달린 종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해주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카페 손님은 대부분 동네 사람들이었다.
수다의 장이 되기도 하고, 계 모임 장소가 되기도 하고. 지금은 금지하지만, 한때는 막걸리와 소주가 테이블 가득 깔리는 술자리가 되기도 했다.
그래 봤자 동네 사람들이었다.
이따금 명절이나 주말에, 이 마을에 부모나 조부모가 사는 외지인이 오긴 해도 워낙에 인구가 많은 마을이 아니라 아주 낯선 사람은 오지 않았다.
그러니 카운터 가까이 낯선 손님이 걸어오고 있자 해주는 의아했다.
열린 카페 문 뒤로 비치는 쨍한 햇빛 때문에 손님의 실루엣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깔끔한 슈트 차림으로 보아 젊은 남자였다.
남자가 카운터 앞에 섰다. 그제야 손님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고, 이윽고 들려온 낮은 음성에 해주는 딱딱하게 굳었다.
“오랜만입니다, 윤해주 씨.”
“강지한…… 상무님?”
믿을 수 없다는 듯 해주가 눈을 크게 뜨자 그는 찬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정확히 2년 만이네요, 우리?”
지한을 생각한 순간 그가 나타났다.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손님이 없고, 햇살은 좋아 나도 모르게 선잠에 빠진 건 아닐까?
해주가 멍하니 지한을 보고 있자, 그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음 서린 미소를 지었다.
“많이 놀랐나 봐요.”
“그게…….”
“아님, 평생 찾아오지 않길 바랐는데 절망한 건가?”
“아뇨, 아니에요!”
해주가 손을 내저으며 부정하자, 지한은 눈썹을 가볍게 까딱이곤 슈트 재킷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가 신용 카드 한 장을 뽑아 해주에게 내밀었다.
“오랜만에 윤해주 씨가 내린 커피 한잔할까 하는데. 예전 그 커피로.”
해주는 물끄러미 지한이 내민 카드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눈앞에 지한이 있다는 사실이 현실감이 없었다. 하지만 그를 두고 계속 멍청하게 서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해주는 말했다.
“만들어 드릴게요. 계산은, 괜찮습니다.”
[결혼 협상]
정가 : 비매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