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270화 (270/276)

외전 Ep 2. 하슈의 일기

(5) 아빠들은 왜 우리를 미워할까?

달칵.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루드바하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르베나가 모습을 보이자마자 물었다.

“하슈는 어때요? 많이 울었어요? 설명해 줬어요, 아까 들은 말은 오해라고?”

조금의 쉼표도 없이 묻는 루드바하의 모습에 르베나가 살짝 미소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꼬리가 축 늘어진 강아지 같은 얼굴로 루드바하가 말했다.

“아를 경이 얘기하자고 할 때 가면서 하자고 하지 말걸. 아니 애초에 그런 말은 하는 게 아닌데.”

루드바하는 아까 전 유안의 등장 이후 곧바로 나타난 이슈와 투오란의 말에 하늘이 샛노래지는 것만 같았다.

“아빠, 하슈가 엄청나게 울어! 아주 많이 슬프게 울고 있다고!”

“루드바하 님, 하슈가 울어요. 너무 아프게 울어서 저도 슬플 정도로요!”

두 아이의 말에 루드바하는 서둘러 정원으로 달려갔지만, 하슈는 없었다. 그래서 곧장 아이의 방으로 갔지만, 하슈는 문을 걸어 잠그고 아무도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루드바하에게도, 엄마, 아빠 다음으로 멋있다던 아를에게도, 엄마만큼 자기 마음을 잘 알아 준다던 유안에게도 말이다.

물론 문을 강제로 열 수도 있었지만, 루드바하는 하슈의 마음을 존중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방문을 사이에 두고 아까 아를과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빼놓지 않고 얘기해 주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슈는 문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저녁, 외부에서 돌아온 르베나가 팅과 함께 소식을 듣고 찾아갔을 때 닫혀 있던 하슈의 문은 겨우 열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 시간 동안 루드바하는 아이와 오랜 시간 이야기를 하고 나올 르베나만 기다린 것이다.

그런 루드바하의 얼굴을 보고 웃은 르베나가 소파에 앉았다. 고단했던 일 이후 아이와의 긴 대화까지 끝나자 긴장이 풀린 탓이었다.

“오해는 모두 풀었어요. 하슈도 이해했고요. 물론 많이 울긴 했지만요. 다만.”

다만이라는 르베나의 말에 루드바하는 그만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이제껏 루드바하를 안심시키려 옅은 미소를 유지하던 르베나의 표정도 그 순간만큼은 조금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하슈의 상처가 깊은 것 같아요. 그때그때 감정을 표현하는 이슈와는 달리 언제나 자신보다 남을 먼저 배려하고 생각하는 아이잖아요. 먼저 마음을 열어 주길 기다렸지만, 그사이 하슈의 상처가 커진 것 같아요.”

르베나는 조금 전의 하슈를 보며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는 것만 같아 아팠다. 언제나 나보다 남이 우선이었던 시간. 어린 하슈는 그때의 르베나처럼 슬퍼도 애써 웃고 있었다. 투정을 부려도 될 텐데 걱정 끼쳐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아이. 자신이 하슈에게 그런 걸 가르친 건 아닐까 싶어 마음이 무거웠던 것이다.

그 순간 루드바하가 르베나의 몸을 자신의 팔로 감쌌다. 이어서 다가온 그의 온기는 언제나처럼 르베나의 슬픈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고. 그 힘으로 르베나는 말을 이을 수 있었다.

“이슈가 검을 배우고 나서부터 하슈를 오빠라고 부르지 않았을 때, 우리가 나서야 했던 걸지도 모르겠어요. 그리고 하슈는 이슈와 달리 원하는 게 있어도 양보하고 참는 아이니까 먼저 챙겨 줬어야 했고요. 다 내 잘못 같아요.”

르베나의 말에 루드바하는 그녀를 번쩍 안아 자신의 다리 위에 앉힌 다음 꼬옥 안았다. 그리고 언젠가 르베나가 해 주었던 말을 돌려주었다.

“부모가 처음인 건 우리도 마찬가지잖아요. 그리고 이번 일은 제 잘못이에요. 제가 좀 더 하슈에게 다가갔어야 해요. 미안함에 고개 돌리지 말았어야 했어요.”

루드바하는 르베나의 품에 가만히 얼굴을 묻었다.

아팠다. 르베나에게 안정적인 마력을 물려받은 이슈와 달리 하슈에게 불안정한 신력을 준 것이.

그래서 미안했고 하슈가 자신을 원망할까 봐 무서웠다.

하슈는 서운해도 웃는 아이임을, 누구보다 가족을 사랑하는 아이임을 자신의 미안함에 가려 미처 보지 못했다. 그래서 아이를 서운하게 만들었다. 언제나 참는 그 아이가 폭발할 때까지.

그래서 루드바하는 오늘을 오래 잊지 못할 것만 같았다.

* * *

“잘 모르겠어요.”

“티~잉?”

하슈가 답하자 아이의 어깨 위에 앉은 팅도 작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날 이후 첫 번째 수업. 하슈는 부쩍 힘이 없어 보였고 언제나 자연스러웠던 미소는 평소보다 억지스러워 보였다.

유안은 그런 하슈가 안쓰러운 마음을 밀어놓고 이해하기 쉽게 조금 전 수업을 다시 설명해 주었다.

“그러니까 음… 파벤더는 분노를 키웠던 거예요. 유파시드임에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들, 가질 수 없는 것들. 이것을 제재하는 모두에게요. 자신이 지켜야 하는 생명의 무게보다 욕심이 먼저였던 거죠.”

젠에 관한 수업이 한창인 요즘 파벤더의 일은 빼놓을 수 없었다. 하슈 역시 언제나처럼 유안의 수업에 집중했지만 곧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래도 모르겠어요. 분노라는 거요. 화가 난다고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다치게 하다니요. 그런 게 사람에게 있을 수 있다니. 저는 이해가 안 돼요.”

하슈의 갸웃거림에 팅도 졸다가 서둘러 고개를 갸웃했다. 언젠가부터 자신의 대답을 따라 하는 팅을 하슈가 귀여워하자 생긴 버릇이었다. 유안은 그런 팅을 보며 웃는 아이의 붉은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누구보다 성군의 자질을 지녔지만, 악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 그래서 더 염려스러운 아이.

“분노? 그거 알아! 투오란이 다른 여자친구한테 예쁘게 웃어 주면 막 내 마음에서 불이 나는데 그거 말하는 거지?”

굉장히 신선한 방법으로 분노를 알아듣는 이슈와는 조금 다른 아이 말이다. 루드바하에게 나름의 방황을 하는 중에도 분노를 모르다니. 유안은 아이가 안쓰러운 만큼 귀여웠다.

벌컥. 하슈의 방문이 허락도 없이 열린 건 그때였다. 그리고 놀란 유안의 눈에 여느 때보다 더 귀엽게 차려입은 자신의 딸이 나타나 활짝 웃었다.

“수업 중이라길래 꽃 가져왔어요! 엄청 싱싱하고 향기가 나는 주황색 장미예요!”

“팅팅!”

지루한 수업 중에 들어온 로즈를 보고 팅이 즐겁게 인사를 전하자 로즈 역시 환하게 웃어 보였다.

“팅도 있었네! 아, 미안. 네 꽃은 다음에 줄게! 두 송이밖에 없거든.”

루안 공녀를 닮아 제비꽃을 연상시키는 눈을 반짝 빛내는 로즈의 얼굴은 다른 때보다 조금 수줍어 보였다. 하지만 유안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로즈에 다가갔다. 그리고 제법 엄한 목소리를 내었다.

“로즈, 예의도 없이 이게 뭐 하는 거냐. 다른 사람의 방에 들어오기 전에는 시종을 통해 알리라고 분명히 가르쳐 줬을 텐데.”

꽃을 보고 좋아할 거라는 생각과는 다른 유안의 모습에 로즈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하슈가 아니라 하슈 왕자님이다. 무엇보다 수업 중에는 들어오는 게 아니라고 지난번에도 말하지 않았니!”

후두둑. 유안의 말을 들은 로즈의 눈에서 그 순간 보기에도 안타까운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차가운 유안의 얼굴에 손등으로 쓱 눈물을 닦은 로즈가 작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해요. 다음부턴… 안 그럴게요, 흑.”

타다닷. 그리고는 바로 뛰어나가는 로즈의 뒷모습을 보며 유안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외가인 룩센 공작 내외와 삼촌 라파엘에게 과도한 사랑을 받아서인지 로즈는 나이에 비해 조금 철이 없었다.

그게 집에서라면 귀엽다 하겠지만 타국, 그것도 제자인 하슈 앞에서는 흉이 될 것 같아 조금 엄하게 했을 뿐인데 울다니.

유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뒤로 돌아섰다. 하지만 그 순간 언제나 예의 바른 하슈가 수업이 끝나기도 전에 일어나 있었다.

“왕자님?”

그게 의아해 유안이 부르자 하슈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얼굴로 말했다.

“너무해요, 선생님. 로즈 누나는 자기가 좋아하는 걸 아빠에게 전하고 싶었을 뿐일 텐데.”

그리고는 유안의 앞으로 다가온 하슈는 그 와중에도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먼저 일어나도 될까요? 예의가 아닌 건 알지만 조금 슬퍼서요.”

“팅!“

말을 마친 하슈는 슬픈 얼굴을 한 채 로즈가 사라진 곳을 따라 걸어갔다. 마치 하슈를 슬프게 한 것이 유안인 것처럼 팅도 그에게 으름장을 놓고는 따라갔고.

어느새 홀로 남은 방. 유안만이 외알 안경을 벗으며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 되었다.

“너무 힘들다. 육아….”

집에 가면 하슈 얘기만 늘어놓는 딸아이가 예의를 중요시하는 하슈 앞에서만이라도 그렇게 보이길 원했을 뿐인데 뭐가 잘못된 걸까. 그 순간 집에 있는 두 아들과 이제 막 루안 공녀의 배에 들어선 넷째가 생각나 유안은 잠시 울고 싶어졌다.

* * *

“흑… 흑…….”

하슈는 꼬마 궁전 정원에서 혼자 울고 있는 로즈를 발견하고 조심스레 다가갔다. 로즈가 혼나는 건 몇 번 본 적 있는데 오늘은 왜인지 더 마음이 안 좋았기 때문이다. 평소와는 달리 로즈가 울어서인 것도 같았다.

“울지마, 누나.”

“티~잉.”

그때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 때문인지 화들짝 놀란 로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는 하슈와 팅을 확인하고 다시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 아까 가져갔던 꽃을 바닥에 떨어트리며 말했다.

“꽃이 너무 예뻐서 빨리 보여주고 싶었어. 많이 꺾으면 안 된다고 해서 내 건 안 꺾고 딱 두 송이만 꺾은 건데… 흑.”

로즈의 눈물에 괜스레 마음이 안 좋아 하슈가 얼른 떨어진 꽃을 줍고는 말했다.

“정말 고마워, 누나. 사실 누나가 이거 들고 방에 들어올 때 향이 엄청 좋아서 기분도 좋았다? 근데 예쁘기까지 하네.”

하슈는 아버지가 엄마한테 하는 걸 떠올리며 제법 비슷하게 흉내를 내 보았다. 팅이 그런 하슈를 보고 잘했다는 듯 로즈에겐 안 보이게 깃털로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랬더니 로즈가 눈물을 뚝 그치고 볼을 발갛게 물들였다. 그러고는 왜인지 발끝으로 땅을 툭툭 차며 물었다.

“정말?”

아기고양이를 닮은 로즈의 새초롬한 물음에 하슈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버지가 엄마한테 하는 걸 떠올려 얼른 칭찬을 곁들였다.

“응! 그리고 누나 오늘 유난히 예뻐!”

하슈의 칭찬에 팅이 다시 한번 깃털로 머리를 쓰다듬었고 로즈는 눈물 맺힌 눈으로도 활짝 웃어 보였다.

“고마워, 하슈. 넌 정말 따뜻하고 다정한 아이야. 하지만 아빠도 좋아하면 좋았을 텐데.”

부끄러운 표정으로 말을 하다가는 이내 시무룩해진 로즈의 옆에 하슈가 앉았다. 그리고 말했다.

“그러게. 왜 좋아해 주지 않을까.”

조금 전까지 칭찬을 늘어놓던 아이는 어딜 갔는지. 왜인지 본인보다 더 시무룩한 하슈의 말에 로즈가 놀라 바라보자 하슈가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 아버지는 나보다 이슈를 더 좋아하는 거 같아서. 아니라고는 하시는데… 내가 검을 배우지 않은 이후로는 나를 오래 봐주지 않아. 잘 안아 주지도 않고.”

잠시 말을 멈춘 하슈가 눈물을 참듯 뜸을 들이다 말했다.

“그래서 여기가 아파.”

하슈가 자신의 왼쪽 가슴을 손가락으로 가르치자 로즈도 고개를 끄덕이며 화가 난 투로 말했다.

“맞아. 나도 가끔 거기가 아파. 동생들이 잘못한 건데 아빠가 나를 혼낼 때! 아빠들은 왜 우리를 미워하는 걸까?”

로즈의 말에 하슈의 눈이 먼 하늘로 향했다. 아를 경이 분명 슬플 때 하늘을 보면 괜찮아진다고 했는데.

하지만 왜 하늘을 봐도, 아빠가 날 미워하는 게 아니라는 소리를 들어도 왼쪽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느껴지는지 하슈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더불어 왜 로즈가 뺨을 붉게 물들이고 자신을 빤히 보는지도.

하슈가 지금 알 수 있는 유일한 건, 자신의 왼쪽 가슴을 감싼 팅의 온기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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