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269화 (269/276)

외전 Ep 2. 하슈의 일기

(4) 마음에 구멍이 뚫렸어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의젓한 왕자는 이렇게 울면 안 되는데 내 마음이 자꾸만 아팠다. 여섯 살 때 이슈와 놀다 넘어져 다리에 피가 아주 많이 났던 때보다도 아팠다. 동생인 이슈를 아프게 해서 미안했고 아버지한테 소리쳐서 죄송했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도 내 마음, 그 깊숙한 안쪽이 너무너무 아파 나는 결국 눈물을 멈추지 못한 채 내 방으로 달려왔다.

“하슈로트 왕자님?”

그 순간 내 방 앞에서 날 기다리던 선생님이 날 불렀다.

“스승… 흑… 스승님!!”

나는 그대로 선생님에게 달려갔다. 선생님은 그런 날 보고 무척이나 놀라셨지만 얼른 나와 키를 맞추고는 안아주셨다. 선생님이 날 안아주니 아버지의 품이 생각나 나는 더 크게 울고 말았다.

“으앙-! 제가 흑, 제가… 훌쩍, 이슈를… 밀고 아버지한테, 흐읍… 소리질렀… 흡! 어요…….”

나는 최대한 나의 잘못을 선생님께 말하려고 노력했다. 왜인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울음이 더 크게 나와서 선생님이 알아들으셨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선생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나를 안아주셨다. 그래서 나는 용기를 내어 더 말했다.

“검을… 흑… 만졌는데, 엉--! 나도, 스승님 갖고 싶… 은데… 흑, 이슈만… 아버지가… 흡, 크흡…….”

나는 그렇게 모든 상황을 설명했다. 이렇게 말을 해야 내 마음이 덜 무겁고 덜 아플 것 같기도 했다.

근데 선생님이 잘 알아들으셨을까? 무척 똑똑하시니까 알아들으셨겠지? 그때 선생님이 나를 번쩍 안고 눈을 마주치며 말씀하셨다. 선생님의 푸른 눈은 오늘따라 따뜻해 보였다.

“왕자님께서 허락 없이 이슈 공주님의 검을 만지셨군요. 그래서 공주님께선 화를 내셨을 거고, 또 왕자님께 오빠가 아니라고 했나요?”

선생님의 말에 내가 마구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선생님은 진짜 똑똑하시다. 그러자 선생님께서 다시 물으셨다.

“하슈 왕자님은 검도 배우고 싶고 아를 경 같은 스승님도 갖고 싶으셨군요. 그래서 평소엔 선생님이라 부르던 제게 스승님이라… 큽, 부르셨고요. 그러다 화가 나서 공주님을 밀쳤는데…….”

선생님이 중간에 웃는 것 같았는데 기분 탓이겠지? 이후로도 선생님은 마치 그곳에 계셨던 것처럼 이런 일들이 있었냐 물어보셨고 나는 너무 신기해 고개를 계속 끄덕였다. 그러다 그만 울음마저 멈추고 말았고.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선생님이 내 눈을 가만히 바라보셨다. 사람들은 내 선생님이 차갑다고 했지만, 특히 아버지는 언제나 그렇게 말했지만 난 찬성하지 않는다. 선생님은 내게 많은 걸 가르쳐 주시고 내 마음을 우리 엄마만큼 잘 알아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많이 속상하셨겠네요. 이슈 공주님이 요즘 왕자님한테 자꾸 오빠가 아니라고 해서. 그리고 루드바하 님께서 왕자님만 안아 주지 않으셔서.”

나는 선생님의 말에 다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선생님은 내가 다시 울 틈을 주지 않고 이어 말했다.

“하지만 그래도 하슈로트 님은 디오니스의 왕자님이고 이슈로벨 공주님의 오빠예요. 그건 변하지 않아요. 그리고 문제를 폭력으로 해결하는 옳지 않다고 말씀드렸죠?”

나는 선생님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이슈를 민 건 잘못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자 주변이 반짝일 만큼 환하게 웃어준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우리 공주님께 사과하러 갈까요? 혼자 가기 힘드시면 제가 함께 갈게요.”

혼자 가기 힘든 걸 어떻게 아셨지? 나는 놀라움을 감추고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아버지한테도 사과드려야 하는데….”

선생님은 나를 보고 더욱 환하게 웃으시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루드바하 님께는 그럴 만했으니 사과 안 하셔도 됩니다. 이슈 공주님을 한번 안아주셨으면 당연히 왕자님도 안아 주셨어야 하니까요.”

언제나 예의를 최고로 생각하시는 선생님께서 안 해도 된다니. 나는 그게 이상해 조금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곧 크고 따뜻한 손으로 내 손을 잡아 주시는 선생님의 온기에 나는 웃으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이슈와 내가 사는 궁은 3층짜리 꼬마 궁전인데 1층은 사용인들이, 2층은 이슈가 그리고 3층은 내가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슈한테 사과하러 가는 계단이 오늘따라 아주아주 길게만 느껴졌지만, 계속 내 손을 잡아 주는 선생님이 계셔 나는 힘이 났다. 그렇게 계단을 내려가 아래층에 도착했을 때였다.

“아를 경의 마음은 잘 알겠지만 안 됩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린 건.

아버지가 왜 아래층 계단에 있는 거지? 선생님도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셨는지 잠시 걸음을 멈추셨다. 달팽이처럼 생긴 계단을 내려다보니 우리 아버지와 아를 경의 머리가 살짝 보였다.

“하슈는 이슈처럼 누구와도 잘 어울리고 사랑을 받는 아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쿵. 갑자기 들려온 아버지의 말에 오늘따라 변화가 심한 내 구름들이 하나둘 터지기 시작했다. 이슈처럼 사랑을 받는 아이가 아니라니. 아버지가 날 그렇게 생각하셨다니!

나는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 순간 선생님이 아래로 내려가려고 해 나는 반사적으로 선생님을 잡았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비밀로 해 주세요. 헤-!”

선생님이 내 말에 대답하기도 전, 나는 억지로 웃으며 곧바로 다시 위로 뛰어 올라갔다. 상대방의 대답을 듣지도 않는 건 아주 예의 없고 의젓하지 않은 행동이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난 의젓할 수가 없었다. 내 마음속 구름들이 모두 터져나간 마음이 너무너무 아팠기 때문에.

* * *

유안은 눈 깜짝할 새에 빠져나간 아이의 빈자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른에게 예의 바르고 아랫사람에게는 사려가 깊은 아이. 언제나 엄마를 닮았다고 말하지만, 루드바하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는 세상의 모든 별을 모아놓은 듯 눈을 반짝이는 아이. 칭찬받기를 좋아하지만, 티 내지 않는 아이. 사랑이 많지만, 표현에 서툰 아이.

하슈로트는 마치 어릴 적 루드바하를 보는 것과 똑 닮아 있었다. 그래서 더 눈길이 가고 사랑스러운 아이이기도 했고. 젠에서 디오니스까지 오가며 왕자의 선생을 자처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루드바하가 자신의 아이에게, 자신을 똑 닮아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아이에게 상처를 주다니. 유안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루드바하의 말이 아래층 계단에서 이어진 건.

“이슈는 표현에 부끄러움이 없어 곧잘 사랑을 표현하고 사랑받길 좋아하죠. 그러나 하슈는 모두에게 친절하고 배려가 깊은 만큼 소수의 사람에게 깊은 정을 느끼는 아이입니다. 이슈와는 달리 벌써 사랑보다는 존중을 받는 아이이기도 하죠.”

목소리만 들어도 자식 사랑이 넘쳐흐르는 루드바하의 말에 유안은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그게 하슈 왕자님이 이슈 공주님과 검을 함께 배우면 안 되는 이유인가요?”

들려온 아를의 물음에 루드바하가 살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아이가 함께 배우면 경쟁심이 생길 텐데 이슈는 그걸 원동력으로 더 노력할 겁니다. 더 관심받고 싶어 하고 사랑받고 싶어 하는 아이라서요. 하지만 소수에게 깊은 정을 느끼는 하슈는 동생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만으로 죄책감을 느낄 거예요. 무엇보다 하슈는.”

순간 루드바하의 전신에서 포근한 신력이 그도 모르게 새어 나와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배려가 깊고 존중을 중요시하는 아이라 일부러 이슈에게 져 주기도 할 겁니다. 그러니 만약 하슈가 검을 배우게 된다면 이슈와는 따로 배우게 하고 싶어요. 검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것이지 배려로 져 주는 것이 되면 안 되니까요. 무엇보다 신력이 안정된 다음에요.”

루드바하의 말에 아를이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 하슈에게 사과를 하러 간다는 루드바하의 말을 듣고 아를은 그를 따라왔다.

태어날 때부터 한시도 눈을 떼지 않은 아이들. 그래서 이젠 아를의 인생 그 무엇보다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존재가 된 아이들.

하물며 하슈가 그렇게 울며 소리치는 건 처음 있는 일이라 그도 하슈의 마음을 함께 달래주고 싶었다.

그에 더해 하슈가 검을 배우고 싶어 하니 혹시 둘을 함께 가르치면 안 되겠냐 묻고 싶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하슈의 방을 바로 위에 두고 그 대답을 이렇게 오래 들을 줄은 몰랐다. 누가 보면 팔불출이라고 할 만한 답. 하지만 아를은 그마저도 좋았다. 그에게도 소중한 아이들이 부모에게 사랑받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좋았으니까.

그러나 둘의 걸음은 2층에서 3층으로 올라가는 초입에서 곧바로 막혀 버리고 말았다.

“굉장히 즐거운 대화를 하셨나 봅니다.”

단단히 얼어버린 차가운 눈을 빛내는 그, 유안에 의해 말이다. 그의 말에 루드바하와 아를은 서로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이어진 유안의 말에 둘의 시선은 곧장 떨리고야 말았다.

“저와 하슈 왕자님이 여기에 있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요.”

차가운 표정의 유안, 함께 있었다지만 지금은 없는 하슈. 하슈가 둘의 어떤 대화를 들었는지… 아니, 어디까지만 들었는지 알아 버렸기 때문에.

* * *

나는 헐떡이는 숨을 눈물과 함께 내뱉으며 다시 3층으로 올라왔다가는 복도 끝에 연결된 계단을 통해 뛰어내려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내가 사는 꼬마 궁궐의 뒤편, 이슈와 나를 위한 정원으로 달려갔다.

팅이 없는 지금, 그곳에서 자주 시간을 보내는 또 다른 내 친구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내 말을 잘 들어주고 누구보다 다정한 내 친구를 말이다.

그리고 정원에 도착하자마자 난 투오란을 발견했다. 내 친구. 언제나 따뜻하고 사려 깊은 내 요정 친구를.

“투오란……!”

하지만 내가 투오란을 부르려는 순간, 투오란은 랠리 누나를 닮은 얼굴로 예쁘게 웃으며 말했다.

“이슈 이거 널 닮았어, 아니 너보다 예쁜 건 이 세상에 없지만.”

“뭐야, 투오란. 그런 말 랠리 언니가 하지 말라고 했잖아!”

어디선가 들려온 이슈의 대답에 투오란은 예쁘게 웃으며 작은 꽃 하나를 이슈의 귀 옆에 꽂아주었다.

이제까지 나무에 가려져 있던 이슈의 뒤통수가 그제야 살짝 보였다. 마치 랠리 누나가 아를 경을 볼 때와 같은 눈으로 투오란이 이슈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내 눈엔 그래. 이슈 네가 제일 예쁘고 제일 소중해.”

툭. 투두둑. 왜 이럴까. 투오란은 항상 이슈에게 저렇게 말하는데. 투오란은 너무 다정한 아이라서. 그리고 이슈가 투오란의 각인 상대라서 그런 건데. 그런데 왜 오늘은 저 얘기가 이렇게 나 슬플까.

“하슈는 이슈처럼 누구와도 잘 어울리고 사랑을 받는 아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조금 전 들었던 아버지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투투둑. 그러니 더 많은 눈물이 내 뺨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도 투오란이 제일 좋아. 헤헤- 아, 우리 엄마, 아빠는 빼고!”

이어진 이슈의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에는 더 큰 구멍이 뚫린 것만 같았다.

아버지도 내 친구 투오란도 모두 나보다 이슈를 더 좋아한다. 그리고 이슈는 나보다 투오란을 더 좋아한다.

내 동생이 좋아하는 사람들. 엄마와 아빠와 투오란. 거기에 나는 없었다.

그 생각이 들자 내 마음의 구멍은 걷잡을 수 없이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숨을 쉴 수 없을 만큼의 눈물도 함께 떨어졌다.

“흑… 흑흑…….”

참으려 해도 눈물은 계속 나왔다. 마법학원에 간 엄마와 마력 충전을 위해 따라간 팅이 너무나 보고 싶은 만큼. 아버지와 이슈를 떠올리면 서러움에 마음이 너무나 아플 만큼, 눈앞이 뿌옇게 변하고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우는 날 발견한 투오란이 놀라 내 이름을 부르고, 투오란의 앞에 있던 이슈가 놀라 벌떡 일어날 때까지도.

나는 눈물을 그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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