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267화 (267/276)

외전 Ep 2. 하슈의 일기

(2) 이슈가 싫은 두 번째 이유

아버지의 등장에 이슈는 곧바로 아버지께 달려갔다. 그러자 아버지는 환하게 웃으시며 이슈를 번쩍 안아 들어주셨다. 그 순간 내 안의 구름들이 진한 붉은 색이 되어 여기저기를 마구 움직이기 시작했다. 덩달아 의자에 조금 떠 있던 내 발도 같이 움직였다. 팅도 내 기분을 느꼈는지 슈크림 범벅인 몸을 내 뺨에 살짝 비볐다.

“오랜만이구나, 우리 이슈!”

아버지가 이슈를 안아 빙빙 돌려주자 이슈의 큰 웃음소리가 후원을 가득 채웠다. 그러고 나서 아버지는 곧장 누군가를 찾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곧 엄마와 눈이 마주치자 아버지는 반짝이는 눈으로 예쁘게 웃어 주셨다.

그다음…! 아버지가 다시 누군가를 찾듯 후원을 둘러보셨다. 내 안의 구름들이 터질 듯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내 발도 덩달아 땅에 닿을 듯 말 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팅이 묻힌 슈크림의 달콤한 냄새도 진하게 올라와 기분이 더 좋았다.

그리고 드디어! 아버지가 날 찾으셨다. 나와 눈이 마주치고 아버지가 웃어 주신 순간 나는 곧바로 뛰어나갈 준비를 했다. 나도 이슈처럼 빙빙 돌리기를 당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와 아버지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이슈가 아버지께 물었다.

“아빠! 타르타로의 뿔 두 개 맞지?”

아버지는 그대로 나와 맞추었던 시선을 이슈에게 돌렸다. 그리고 이슈가 만들어놓은 이상한 모양에게 다가가 웃으며 말했다.

“아, 이게 타르타로였구나! 아빠는 지난번처럼 응가를 만든 줄 알았어. 하지만 이슈. 타르타로의 뿔은 한 개야. 자 봐 봐.”

점점 아버지의 좋은 목소리가 안 들리기 시작했다. 내 안의 구름들도 죄다 쪼그라들며 먹구름으로 변해 가기 시작했고 마구잡이로 허공을 젓던 내 발도 덩달아 멈추었다. 난 가만히 이슈가 만든 뿔을 하나로 만드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빠, 저번에 만든 것도 타르타로였어! 어? 한 개로 만드니까 진짜 타르타로 같다! 와!”

그렇게 아버지와 이슈를 바라보던 나는 다시 책을 집어 올렸다. 하지만 책의 글자는 좀처럼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고 이상하게 더 무겁게만 느껴졌다. 자꾸만 들리는 이슈와 아버지의 목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왔기 때문일까?

나는 역시 이슈가 싫다. 날 오빠로 인정하지 않는 것도.

“꺄! 우리 아빠 최고!”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도. 그 순간 내 마음속 구름들이 슬픈 색으로 가득 차 미운 모양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화가 났다.

그래서 나를 바라보는 엄마의 걱정스러운 시선도 알아채지 못했다. 이슈가 미워서. 아주 많이 미워서. 그리고 내 동생을 미워하는 내가… 너무 미워서.

“티~잉.”

그 순간만큼은 팅이 전하는 온기도 따뜻하지가 않았다.

* * *

“보고 싶었어요, 르베나.”

다 함께 오랜만의 저녁 식사를 하고 수다에 지친 아이들을 재우고 겨우 단둘이 있게 된 밤. 루드바하는 서둘러 르베나를 안고는 슬그머니 침대로 향했다. 부드러운 침대의 감촉과 그보다 더 애타게 그리웠던 르베나가 닿은 순간. 탁!

르베나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향하던 그의 손을 기분 나쁘지 않게 쳐냈다. 그리고 눈을 마주보며 물었다.

“타르타로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해 주기로 했잖아요.”

르베나의 말에 루드바하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그건 아는데 우리 요즘 함께 잠든 시간이 거의 없잖아요. 그러니까 르베나랑 사랑도 많이 하고 우리 이야기도 잔뜩 하고 그다음에… 하면 안 돼요?”

르베나가 루드바하를 살짝 노려보았다. 최근 타르타로의 일로 바쁜 그는 만나기만 하면 이런 패턴이었다. 물론 르베나도 좋았다. 오랜만에 본 그와 뜨거운 온기를 나누고 밤새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하지만 계속되는 루드바하의 행동에 이제는 의심의 싹이 피기 시작한 것이다. 르베나가 곧장 자세를 바로 하며 물었다.

“솔직히 말해요. 지능을 가지고 있고 인간들을 죽이길 좋아하는 성질, 그 이상이 있는 거죠?”

르베나의 눈이 붉게 빛나고 있다. 그 순간 루드바하는 더는 이야기를 미룰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실 미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르베나와 함께하는 시간이 좋아서였지만.

원대한 계획을 포기한 루드바하는 어느새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부부 침실에 있는 와인 보관함을 열어 르베나가 좋아하는 와인과 잔을 가져와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그의 모습을 본 르베나가 둘만의 테이블에 자리하자 루드바하가 그녀의 눈만큼이나 붉은 와인을 따라주며 말했다.

“가스트, 아한과 함께 세우는 마법학원은 사실상 완공이에요.”

유파시드의 자리를 호안에게 넘겨주고 루드바하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 그것은 모든 베이라와 세츠 아이들이 마법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실전 연습을 할 수 있는 학원을 만드는 일이었다.

실전이 주요 과목인 만큼 큰 부지와 실력이 좋은 마법사들을 섭외하고 여러 환경의 연습장을 만드는 데만 꼬박 3년. 드디어 건물은 완공되었다. 그러나 이건 이미 르베나도 잘 아는 일이었다. 왜 그렇지 않을까. 그것이 세워진 땅이 바로 디오니스인데.

곧 루드바하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오늘…. 타르타로를 그 마법학원 지하에 데려와 가뒀어요.”

하지만 이어진 루드바하의 이야기에 르베나는 놀라 눈을 크게 뜬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뭐든 상의가 먼저인 그가 타르타로를 디오니스로 데려오는 일을 르베나와 상의하지 않다니.

불쾌함에 앞서 알 수 없는 불길함이 먼저 그녀의 전신을 덮치기 시작했다.

* * *

“얍! 합!”

도서관에 가는 길. 나는 익숙한 기합 소리에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왜 나랑 이슈의 전용 도서관을 이곳을 통해야 갈 수 있는 곳으로 바꾸었는지 모르겠다.

타다닷!

“이얍!”

가볍고 빠른 발걸음 소리와 함께 목검을 든 이슈가 아를 경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내려친 목검은 아를 경의 목검에 간단히 막히고 말았다.

“아! 아쉬워!!!”

큰 목검의 힘에 밀려 넘어질 뻔한 이슈를 가볍게 한쪽 팔로 받은 아를 경이 잘했다며 칭찬해주었다. 그때부터 아를 경은 웃으며 이슈를 바라보았고 이슈는 뭐라 뭐라 말을 하기 시작했다.

잘 관리된 잔디와 여기저기 널브러진 작은 목검, 그리고 아를 경. 나는 왠지 기분이 조금 가라앉았다.

팅도 마력 충전을 위해 엄마와 함께 있어야 해서인지 기분이 더 좋지 않았다. 그래서 서둘러 도서관으로 몸을 돌렸다. 그곳에 가면 왜인지 혼자가 아닌 것 같으니까.

“하슈 왕자님?”

그때였다. 아를 경이 나를 발견한 건. 그리고 이슈를 내려놓은 그가 내게 다가온 건 말이다. 나는 언제나처럼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솔직히 말하면 아를 경이 먼저 아는 척을 해줘서 너무 기뻤다.

“안녕하세요, 아를 경.”

나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지만, 아를 경은 엄마만큼이나 애정이 가득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랠리 누나가 왜 아를 경한테 반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아를 경은 멋있다. 외모도 그렇지만 대륙 최초의 소드 마스터라는 대단한 검사가 되었으니 더욱 말이다.

“도서관에 가시는 길입니까?”

다정한 미소로 묻는 아를 경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무장 안에서 이슈가 나를 보는 게 느껴졌지만 나는 굳이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이슈는 미우니까. 그때 아를 경이 내게 물었다.

“하슈 왕자님도 공주님과 함께 검을 배우는 건 어때요?”

그 질문에 나도 모르게 내 몸이 움찔 떨렸다. 동시에 내 눈이 연무장과 목검들 그리고 이슈를 향했다. 그 순간 이슈의 검에서 작은 마력이 피어올랐다. 파란색의 불꽃처럼 크고 멋있게.

“아니에요. 전 검에 취미가 없어요.”

내 대답에 아를 경의 얼굴이 사뭇 어두워진 것 같았다. 나는 그게 싫어 얼른 다음에 보자고 손을 휘저으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사실 엄마로부터 안정적인 마력을 물려받은 이슈와 달리 나는 불안정한 신력을 받았다. 그래서 위험한 상황이 생기면 나도 모르게 폭주할 수 있고 어린 신력의 폭주는 위험하다고 한다.

그래서 난 이슈처럼 검을 배울 수가 없다. 같이 배우기로 한 검을 혼자만 배우게 되고 나서 이슈는 나를 오빠라고 부르지 않기 시작했다. 검을 배우지 않으면 오빠가 아닌 걸까?

아니, 다 필요 없다. 난 그저 책이 더 좋다. 검은 싫다. 그거뿐이다.

* * *

“사부! 뭐 하는 거예요?”

가만히 멀어져 가는 하슈에게 시선을 고정한 아를에게 이슈가 다가와 물었다. 아를이 그런 이슈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사부라니요. 그런 단어는 공주님께 안 어울려요.”

아를의 말에 이슈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멋있잖아요! 사부라는 말! 헤헤.”

르베나가 티 없이 자랐으면 딱 이슈로벨 같았을까? 아를은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웃은 다음 한층 더 다정하게 말했다.

“그것보다 오전 훈련은 이제 충분하니 가서 씻고 점심 드시고 낮잠 주무세요, 공주님.”

아를의 말에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이슈가 때마침 데리러 온 시녀의 손을 잡고 사라졌다. 오늘은 사나가 놀러 오는 날이라 그런지 이슈의 발걸음이 평소보다 더 가벼워 보였다. 아를의 눈 역시 깊은 따뜻함을 간직하고 이슈와 부쩍 멀어진 하슈를 번갈아 보았다.

“아를, 이거 마셔.”

그때 그의 앞으로 누군가 시원한 얼음물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게 누구인지 보지 않아도 아는 아를은 선뜻 물을 받지 않고 돌아서며 말했다.

“분명히 말했을 텐데. 함께 지내는 건 친구로서일 뿐이라고. 그러니까 너도 거리를 좀 둬.”

함께 인간 세상에 온 지 7년. 하지만 랠리는 요정 마을에서 벗어나길 싫어했던 과거와는 다르게 그 시간을 온전히 아를에게 쏟아부었다.

보답할 수 없는 마음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 아를은 랠리를 보며 자신의 마음이 르베나에게 이랬을까 싶어 조금 착잡해졌다. 하지만 랠리는 언제나처럼 오늘도 바라는 게 없었다.

“알아. 나도 친구로서 주는 거야!”

생긋 웃는 랠리의 미소가 왜인지 아를은 불편했다. 아마도 랠리의 말이 너무 거짓말임이 티 나서일까. 랠리 역시 불편한 아를의 기색을 읽은 건지 서둘러 말을 돌렸다.

“아,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랠리의 질문에 아를이 그녀를 바라보자 잠시의 망설임 끝에 그녀가 붉은 입술을 열었다.

“왜 이렇게 하슈로트 왕자님과 이슈로벨 공주님에게 마음을 써? 단순히 스승 혹은 어머니의 지인이라기엔 너무 헌신적이잖아. 어릴 때부터 한시도 안 떨어지고. 어떨 때는 과잉보호도 하고. 사실 이슈로벨 공주님 목검 쓸 단계는 지났다면서.”

조금도 보답받지 못하는 사람에게 헌신적인 요정에게 그런 말을 듣는 게 아를은 조금 우스웠다. 하지만 아를은 대답을 피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이 진심이야말로 랠리가 마음을 접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했기 때문에.

“내 인생의 두 번째 목표거든.”

이 순간만큼은 아를도 랠리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의 눈에 가득 담긴 진심이 그녀에게 부디 아프지 않게 전해지기를 바라며.

“내 인생 첫 번째 목표가 전하의 곁에서 등을 맞대고 언제까지나 검을 휘두르는 지지자가 되는 거였다면 두 번째는.”

잠시 말을 멈춘 아를의 모습에 불안함을 감지한 듯 랠리의 투명한 눈이 흔들렸다. 그래서 아를은 더 흔들림 없이 자신의 결심을 전했다.

“전하의 아이들인 왕자님과 공주님을 위해 내 남은 시간을 모두 받치는 거야. 그분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지켜드릴 거고. 성인이 되어 각자의 자리에서 뜻을 펼칠 수 있도록 도울 거야. 그게 남은 내 인생 목표의 전부야, 랠리.”

아를의 말을 듣고 나자 결국 랠리의 눈에 눈물이 고이고야 말았다. 봐도 봐도 신비스러운 요정의 눈은 고이는 눈물마저 아름다웠다.

하지만 아를은 그 아름다움에 마음을 내어 주지 못했다. 그건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룬이 그에게 물었었다.

저렇게 아름다운 요정이 모든 것을 다해 사랑하는데 어떻게 흔들리지 않을 수가 있냐고. 아를도 답을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그가 아는 건 자신이 이성에게 줄 수 있는 마음은 모두 한 사람의 것이라는 거였고, 그 사람을 더는 욕심내지 못한다고 해도 이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아를이 아픈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랠리가 서둘러 눈물을 닦고는 말했다.

“잘 알아들었어. 아, 난 이제 가봐야겠다. 투오란에게 정령술 가르쳐 주기로 했거든. 이따 저녁 때 봐.”

100년을 기다려도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에 마음이 아플 텐데도 애써 웃으며 뒤돌아 걷는 랠리의 뒷모습에 아를의 시선이 깊숙이 박혀 들었다. 보답받지 못하는 마음이 보답할 수 없는 마음을 만나는 것만큼 큰 비극이 있을까?

하지만 그것도 잠시. 머지않아 그의 시선은 하슈가 들어선 도서관으로 다시 돌아갔다. 작은 어깨가 부쩍 외롭던 아이가 혼자 있는 그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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