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Ep 2. 하슈의 일기
(1) 이슈가 싫은 첫 번째 이유
내 이름은 하슈로트 드 디오니스.
디오니스 왕이자 최강의 베이라 칭호를 가진 세상에서 제일 예쁜 르베나 드 디오니스와 최초로 살아 있는 전대 유파시드, ‘비바시드’ 칭호를 얻은 위대하고 멋있는 루드바하 라 비바시드의 아들이다. 물론 아벨디온과 마법사의 왕국, 디오니스의 왕자이기도 하고.
지금 난 선생님과의 수업을 마치고 엄마가 계실 후원으로 가고 있는 중. 엄마와는 거의 매일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는데 이건 내가 하루 중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다!
“팅!”
내 가장 친한 친구인 팅과 함께 말이다. 팅은 원래 엄마의 친구인데 내가 태어난 후로는 항상 내 옆에 있어 주었고 우린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난 이제 팅 없이는 하루도 살 수가 없다. 내 볼을 비비는 팅과 함께 푹신하게 깔린 붉은색의 카펫을 밟으니 괜히 내 마음속 구름이 몽글몽글 커지는 것 같았다.
이건 비밀인데 내 마음속에는 아주 많은 색과 모양의 구름이 산다.
“거기 조심해!”
그 순간이었다. 어느 시종이 내게 다가오는 시녀를 향해 소리친 건. 그리고 때마침 내 옷에 차가운 밀크티 몇 방울이 튄 것은 말이다.
“맙소사! 왕자님 괜찮으세요?”
“팅팅!!!”
나보다 키가 큰 시녀가 얼른 바닥에 무릎을 대고 내 옷을 살폈다. 잠시 한눈을 팔았는지 아직 키가 작은 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부딪힌 모양이었다. 팅 역시 깜짝 놀라 나와 시녀 주위를 날아다니며 계속 소리를 내었다.
“죄송해요. 왕자님 서재에 들어가기 전에 리본을 바로 한다는 게 그만 앞을 살피지 못했어요.”
당황한 채로 내 옷의 얼룩을 지우며 울상짓는 시녀를 본 나는 밀크티를 살폈다. 다행히 나랑 부딪히며 몇 방울 튄 것뿐인지 유리잔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어느새 팅은 내 어깨에 앉아 그 시녀를 노려보고 있었고 말이다.
“내 서재에 오는 길이었어요?”
그때 내가 건넨 말에 시녀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마구 숙였다.
“어찌 존대하세요. 저 같은 시녀에게!”
마음에 이상한 색의 구름이 피어날 정도로 고개를 숙이는 시녀의 모습이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슈, 실수는 용서해야 하고 잘못은 바로잡아야 해.”
엄마가 해 준 얘기가 생각나서일까? 팅도 내 마음을 알았는지 내가 괜찮은 걸 확인하자 시녀를 노려보던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나는 당황해하는 시녀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아버지도 하는걸요.”
내 말에도 불구하고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는 시녀에게 난 이어서 말했다.
“아마 내 수업이 안 끝난 줄 알고 가져다주려던 것 같은데 수업은 이미 끝났어요. 그리고 실수니까 너무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다만 위험할 수 있으니 다음엔 주위를 살피며 걷는 게 좋겠어요.”
내가 웃으며 말을 하자 시녀가 가만히 나를 보더니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꼭 그러도록 할게요, 왕자님.”
나는 시녀가 다치지 않았나 확인하고는 일어나 다시 가던 길을 걸어갔다. 팅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내 어깨에 올라 부드러운 털을 비볐다.
“늦은 건 아니겠지?”
업무가 바쁜 엄마가 우리와 함께 보내는 티 타임은 길지 않았다. 그래서 난 서두르기 위해 후원으로 곧장 이어진 문을 향해 돌아섰다. 그때 복도에 남아있던 시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어쩜 우리 왕자님은 비바시드 님처럼 부드러우시고 우리 폐하처럼 마음이 깊으실까!
너무 멋진 왕자님이셔.”
“멋진… 왕자님”
나는 잠시 발을 멈추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다음 시녀의 말을 한 번 따라 해 보았다.
“팅팅!”
팅도 시녀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웃어 보였다.
“헤, 고마워.”
나는 팅의 머리를 조심히 쓰다듬어 주었다. 그 순간 내 마음속 구름은 점점 분홍색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막 일곱 살이 된 나는 여섯 살 때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래 맞다. 나는 여섯 살 때보다 더 멋지고 훌륭한 왕자님이 되고 있었다. 우리 엄마처럼!
* * *
르베나의 후원. 해맑은 웃음소리를 내며 노는 딸 이슈로벨과 루안 공녀의 딸, 로즈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진한 미소가 번져 갔다.
“이슈 공주님은 날이 갈수록 귀여워지네요.”
젠과의 직통 텔레포트가 생긴 후로 자주 티 타임에 찾아오는 루안 공녀의 말에 르베나는 그저 웃어 보였다. 아이들이 태어난 지 어느새 7년. 날마다 부쩍 자라나는 쌍둥이를 보는 재미에 그녀의 시간은 빠르게만 지나는 것 같았다.
햇볕에 반짝이는 딸 이슈의 검은 머리카락과 루드바하를 똑 닮아 항상 기쁨으로 반짝이는 눈이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그 순간 르베나의 눈이 더욱 다정하게 휘어지며 이제 막 후원으로 들어오는 아이를 향했다.
“왔니, 하슈.”
르베나는 사랑스러운 아들의 기척이 나자마자 인사를 건네었다. 그녀의 인사에 루드바하를 닮은 다정한 미소로 하슈로트가 다가와 공손히 인사했다.
“네. 수업이 끝나고 바로 온 건데 조금 늦은 건 아닐까 조금 걱정했어요.”
“팅!”
그 순간 팅도 하슈와 함께 인사를 건넸다. 르베나가 웃으며 이슈보다 부쩍 의젓한 아들을 가만히 품에 안고 팅의 털을 쓰다듬어 주었다. 아직도 아기 냄새가 나는 것만 같은 하슈의 향이 참 좋았다. 그런데 그때 뭔가 축축한 느낌에 르베나의 시선이 하슈의 옷에 고정되었다.
“하슈, 뭘 쏟은 거니?”
나이에 비해 실수라고는 없는 아이인데 뭘 쏟았다니. 르베나가 의아해 묻자 아이는 여전히 다정한 미소를 담은 얼굴로 말했다.
“복도에서 만난 시녀랑 잠시 부딪혀 밀크티가 조금 튀었어요.”
“맙소사. 그런 일이 있었나요?”
하슈의 말에 르베나의 옆에서 차를 마시던 루안 공녀가 놀라 물었다. 하슈는 그런 루안 공녀에게도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한 후 마저 답했다.
“네. 하지만 실수이니 괜찮아요.”
어린아이임에도 배려심 넘치는 하슈의 모습에 루안 공녀가 대견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어쩜 하슈로트 왕자님은 우리 로즈보다 세 살이나 어린데 이렇게 어른스러울까요. 폐하께선 이렇게 의젓한 아드님이 계셔 정말 좋으시겠어요.”
루안 공녀의 말에 하슈의 다정한 눈이 작게 반짝이며 기쁨에 차는 모습을 르베나는 놓치지 않았다. 어른스러워 보여도 칭찬과 다정한 스킨십을 좋아하는 아들의 모습은 이 순간에도 귀엽기만 했다.
아마 자기 전 굿나잇 키스를 하며 물어보면 분명히 이 순간 하슈는 마음속 구름이 잔뜩 커져 붉은색으로 변했다고 말할 것이다.
“하슈, 저기 이슈와 로즈가 있는데 가서 같이 놀래?”
그때 들려온 루안 공녀의 질문에 하슈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에 르베나의 표정에도 안쓰러움과 염려가 함께 새겨졌다.
마침 엄마의 말을 들었는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로즈가 이슈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네 오빠 왔어, 이슈!”
로즈의 말에 이슈가 작은 목검으로 무엇인가를 만들다 말고는 휙! 하슈를 쳐다보았다. 루드바하의 미소를 빼어 닮은 하슈와는 달리, 새초롬한 표정만 짓는 탓에 사람들은 간혹 이슈가 차가워 보인다고 했다.
하지만 르베나에게는 모든 것이 아기 새처럼 사랑스러운 딸일 뿐.
“팅!”
그 순간 팅도 이슈가 반가운지 하슈의 어깨에서 신나게 인사를 건넸다. 그때 이슈가 다시 고개를 돌리며 로즈에게 샐쭉한 얼굴로 말했다.
“오빠 아니야! 쌍둥이인데 왜 하슈가 내 오빠야?”
그렇게 외친 이슈는 하슈를 한 번 더 흘낏 보더니 다시 놀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에 르베나가 조금 염려스러운 눈으로 하슈를 바라볼 때.
어느새 다시 예쁜 미소를 지어 보인 하슈가 말했다.
“전 그냥 책을 읽고 싶어요, 엄마.”
하슈의 말에 르베나는 잠시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다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좋지 않을 텐데도 웃는 아이가 예쁘고 안쓰러운 마음은 잠시 덮어 두기로 하고.
* * *
사람들은 이슈가 가끔 차가워 보인다고 한다. 난 그 사람들에게 꼭 말해 주고 싶다. 그건 거짓말이라고. 이슈는 매일, 언제나, 항상 차갑다고 말이다!
내가 오빠임을 부정하는 이슈의 말 때문에 내 마음속 구름은 어느새 회색으로 뒤덮였다. 하지만 엄마가 슬퍼할까 봐 애써 웃은 다음 테이블을 본 순간, 내 구름은 다시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미 내가 뭘 할지 아셨는지 내 키에 맞는 의자와 내가 좋아하는 슈크림 빵이 가득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팅팅!”
팅도 슈크림을 좋아해 신이 나 날개를 파닥이며 나를 보았다. 이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팅이 곧바로 슈크림으로 돌진했다. 그 모습이 귀여워 내가 작게 미소 지었을 때였다.
“어머 하슈로트 왕자님이 아직도 폐하를 엄마라고 부르네요?”
의자로 향하던 내 몸이 멈칫한 건.
실수했다! 멋지고 의젓한 내가 실수라니!
나는 곧바로 불안한 마음이 되어 엄마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엄마는 다정한 미소로 나를 보시고 나서 루안 공녀님께 말했다.
“제가 그러라고 했어요. 물론 가까운 사람들과 있을 때만요. 아이가 크는 게 너무 빠른 것만 같아서요.”
엄마는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은 가족끼리 있을 때만이었다. 맙소사, 난 내 실수를 믿을 수가 없었다.
“하긴, 저도 로즈가 예법 수업 후 어머니라 부르는 걸 듣고 마음이 이상했으니까요! 거리감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다행인지 그 뒤로 공녀님은 로즈 누나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고 엄마는 가만히 들어주셨다.
그러면서도 나를 보며 웃어 주시는 걸 잊지 않는 우리 엄마! 역시 난 우리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다.
조금 안심이 된 나는 그제야 의자에 앉아 책을 펼쳤다. 후원 가득 쏟아지는 햇살에 공녀님과 대화하며 잠깐씩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가 너무 좋았다. 어느새 슈크림 범벅이 되어 테이블 한쪽을 뒹구는 팅의 모습도.
그렇게 한참 책을 읽고 있을 때였다.
“타르타로의 뿔이 몇 개지?”
이슈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온 건. 아 이슈는 원래 목소리가 좀 크긴 하다.
“두 개인가? 하나인가?”
그리고 계속 들려오는 이슈의 고민스러운 목소리에 난 잠시 생각했다. 아마도 선생님의 똑똑하다는 칭찬은 내게만 해당되는 거 같다고.
몇 년 전 처음 나타나 인간들을 공격하는 몬스터, 타르타로의 뿔은 정확히 한 개인데 그걸 헷갈리다니.
“아 두 개!”
확실히 이슈는 똑똑하지는 않은 것 같다. 소리를 치더니 곧바로 자신의 목검 수십 개를 이은 이상한 모양 위에 목검 하나를 더 꽂았다. 마치 똥을 연상시키는 모양 위에 목검 두 개를 꽂고 타르타로라고 우기는 모양이었다.
나는 오늘도 시시한 이슈의 놀이에서 눈을 돌렸다. 솔직히 난 쌍둥이 동생인 이슈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보다 똑똑하지도 않으면서 나를 오빠라고 인정하지 않기 시작한 날부터.
“아빠!”
하지만 그 다음 이슈의 부름에 난 놀라 그만 책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최근 타르타로의 문제로 젠에 갔던 아버지가 며칠 만에 돌아왔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후원에 들어서자 내 구름들이 둥둥둥- 마구 떠다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