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Ep 1. 요정의 숲
(10) 새로운 결심을 하려면
아한이 당황한 듯 눈동자를 돌렸다. 하지만 스릴은 아직 할 말이 남았다는 듯 계속 말을 이었다.
“내가 요정이라면 나도 너한테 각인 됐나봐. 아무리 노력해도 마음이 작아지지 않아. 아니 오히려 계속 커지기만 해. 아한… 흑… 나, 네가 너무 좋아… 흑…….”
굉장히 뜨거운 스릴의 고백에 잠시 멈춰있던 아한의 눈에 엄청난 양의 눈물을 흘리며 훌쩍이는 스릴이 들어섰다.
“나도 몰라. 네가 이상한 베이라 놈한테 내가 맞지 않고 감싸주던 그때였는지… 흑, 아니면 마를한의 그 정원이었는지… 그때 네가… 흑… 진짜 요정 같았는데… 요정 마을에서 고백할 줄이야… 아흑, 나 왜 이렇게 눈물이, 흑… 나지…….”
그 순간 상황도 잊고 아한은 그만 웃고 말았다. 그걸 느낀 건지 스릴이 별안간 더 크게 울며 소리쳤다.
“야! 너는 고백하는 사람 앞에서 흑, 웃으면… 흐윽… 어떡해!! 으앙… 창피하잖아!!”
그렇게 소리치며 아한을 때리는 스릴의 손이 그에게 붙잡힌 건 순식간이었다. 부드럽게 자신의 손목을 잡아챈 아한의 행동에 스릴이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살짝 웃어 보인 아한이 입을 열었다. 그 순간조차 아한이 멋있어 보여 설레는 자신이 스릴은 조금 많이 미웠다.
“미안해, 그런데 네가 우는 게 너무 귀엽잖아.”
그리고 아한의 말을 듣자 이제는 스릴의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귀엽다니, 귀엽다니……!
더 벌겋게 달아오른 스릴을 보며 아한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날 좋아해 줘서, 스릴. 용기 있는 고백도 진심으로 고마워. 그러니 나도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볼게. 내가 생각할 수 있게 조금만… 기다려 줄래?”
곧바로 거절을 당할 줄 알았는데 생각해 본다는 아한의 답변이 너무 반가워 스릴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한 여섯 번쯤 끄덕였을까. 아한이 스릴의 눈물을 닦아 주며 말했다.
“그리고 내가 누나를 좋아하는 건 맞지만. 내 첫사랑은 누나의 결혼식 날 끝났어. 이건… 말해 놔야 할 것 같아서.”
이윽고 마지막 아한의 말에 스릴의 울음은 다시 터지고야 말았다. 훗날 그가 자신의 고백을 거절한다 해도 스릴에게도 이미 생겨 버린 것 같아서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요정들의 각인이.
“정말 안 갈 거냐?”
이라곤의 말에 랠리가 휙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저뿐만 아니라 투오란도 100년을 기다려야 해요. 근데 그들의 곁에 있으라고요? 여길 나가서 전 아를의 곁에, 투오란은 곧 태어날 아이의 곁에요? 그러다간 각인의 기간만 길어질 거라고요! 그러니 절대 안 가요!”
랠리의 고집에 이라곤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다리는 르베나 일행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모든 대륙이 르베나와 아한, 호안 왕자의 문제로 시끄러운 탓에 일행은 여기 더 머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랠리와 투오란에게 함께 갈 것을 청했지만 랠리는 완강했다. 아를마저도 마침 배우고자 한 기술을 완전히 습득해 함께 떠나기로 했는데 랠리는 여전히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요정들은 순수하지만, 고집만큼은 누구보다 강하단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라곤에게 완강하게 뜻을 전하는 랠리를 보며 칸이 말했다. 그리고 일행 모두가 그들의 모습을 바라볼 때 호안 왕자가 잠시 얼굴을 어둡게 물들이며 말했다.
“고집이라기보단 두려움 아닐까요. 내가 살아가던 방식과는 전혀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부담감에 투오란이란 소중한 생명을 책임져야 하잖아요. 랠리 님께는 그 모든 게 큰 두려움일 것 같아서요.”
그의 말에 루드바하의 시선이 가만히 그를 향했다.
3년간 유파시드가 되길 청했지만 계속 도망만 다니던 호안 왕자. 지금 랠리를 보는 그의 시선은 마치 그녀에게 자신을 투영한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르베나가 이라곤과 말다툼을 하는 랠리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랠리의 두려움은 누구도 감당해 주지도, 책임져 주지도 못하죠. 그러니 우린 그녀의 선택을 존중해야만 하고요.”
르베나의 말에 호안의 얼굴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호안이 유파시드의 자리를 거절하는 이유가 그 모든 책임을 온전히 져야 하기 때문임을, 그것에 많은 이들의 생명이 달린 까닭임을 그가 르베나의 말로 다시 한번 상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알아 줬으면 좋겠네요.”
그 순간 르베나가 시선을 돌려 호안과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르베나의 붉은 눈동자가 부드럽게 빛나는 이 순간이 호안에게 왜인지 영원할 것만 같았다.
“그녀의 책임과 두려움은 그녀만의 것이지만. 그 모든 길을 기꺼이 함께 걸어 줄 사람들도 있다는 걸 말이에요.”
르베나의 말은 분명 랠리를 향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들은 순간 호안 왕자의 마음속 커다란 무엇이 부서지는 느낌이 났다. 그건 견고하고 부피가 큰 덩어리. 어떤 때에는 공포, 어떤 때에는 책임, 그리고 어떤 때는 해야만 하는 일을 앞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실패에 대한 강한 두려움이었다.
* * *
“닫힌다고요?”
눈이 퉁퉁 부은 스릴이 놀라 되묻자 이라곤이 답했다.
“‘보토니에’가 사라진 후 많은 존재들이 나를 인식했다. 그러니 내가 요정의 숲에 있다는 걸 알면 이곳도 위험해져. 그래서 칸의 방문도 막은 거였고.”
이라곤의 말에 칸이 놀라 물었다.
“드래곤 당신은 신의 대리자가 아닌가. 그런데 누가 감히 당신을 노린다는 거지?”
칸의 물음에 이라곤이 쓰게 웃으며 답했다.
“모든 생명은 항상 자신보다 더 위에 있는 걸 쓰러트리고 싶어 하지. 그리고 그런 존재들은 많고. 그러니 이제 너희들이 요정의 숲에 올 일은 없을 거다. 이곳의 입구는 닫을 예정이니.”
이라곤의 말에 아를의 얼굴이 사뭇 어두워졌다. 그런 아를의 표정을 본 르베나가 그를 대신해 물었다.
“그럼 랠리와 투오란도… 영영 못 보는 건가?”
르베나의 물음에 이라곤이 요정 마을을 뒤돌아보며 말했다.
“그렇겠지. 우는 투오란까지 가둬 두고 인사도 안 할 정도면. 랠리 저 아이도 마음을 단단히 먹은 모양이니 말이야.”
이라곤의 말에 모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요정 각인의 무게. 그걸 지고 살아가야 하는 랠리와 투오란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기 때문이다.
“곧 문이 닫힐 거다. 그러니 모두 조심히 가라.”
그때, 이어진 이라곤의 말에 모두 무거운 발을 뗄 수밖에 없었다. 이라곤의 힘으로 연 텔레포트 문이 조금씩 작아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눈이 퉁퉁 부은 스릴이 그런 자신을 보고 계속 웃는 아한과 티격태격하며 먼저 문으로 다가갔다. 이어 아라곤과 길게 눈을 맞춘 르베나와 그 옆을 지키는 루드바하가, 마지막으로 아를이 그에게 까닥 고개를 숙이고는 말했다.
“고마웠다, 스승. 언젠가 또 보게 되길 바라지. 그리고… 이거.”
아를이 그에게 무엇인가를 전해 주었다. 그건 요정들의 좋아하는 긴 잎사귀로 만든 팔찌였다. 보통 우정의 의미로 교환하는.
“원하는 걸 주지는 못하지만 여기 있는 동안, 그리고 앞으로도 좋은 친구가 되어 줘서 고맙다고… 전해 줘.”
아를의 말에 이라곤이 웃으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 모습에 르베나 역시 그에게 다시 다가가 자신의 품에서 붉은 마석을 꺼내 건네며 말했다.
“나중에 투오란이 완전히 성장해 인간 세상으로 오고 싶다면 이걸 부수라고 전해줘. 그땐 내가 데리러 온다고. 그리고 너무 울지 않게 달래 주고.”
어린 투오란의 눈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마음이 안 좋은지 르베나의 얼굴이 조금 어두웠다. 그 모습에 이라곤이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지막.
“저는 용기를 내어 보기로 했습니다. 무섭고 두렵지만 제 자리에만 있으면 무엇도 얻지 못할 테니까요. 결정을 내린 지금도 전 두렵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이라곤에게 말을 전하는 호안 왕자가 르베나와 루드바하. 그리고 아를과 아한, 스릴 공주를 보며 말했다.
“언제나 제 곁에 함께해 줄 사람들을 믿는 힘으로 나아가 보려고요.”
곧 호안 왕자가 이라곤을 향해 이어 말했다.
“이렇게 랠리 님에게 전해 주시겠습니까?”
호안 왕자의 말에 이라곤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말했다.
“인간, 너는 루드바하의 뒤를 이어 훌륭한 유파시드가 될 거다.”
그의 말에 환히 웃은 호안 왕자가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모두가 문에 다가서자 이라곤이 웃으며 그의 힘으로 연 문을 닫기 시작했다.
그들의 주위로 퍼져 있던 오묘한 힘이 전신을 감싸기 시작했고, 레리쿼스를 통해 왔을 때보다 강하고 안정된 힘이 그들 모두를 보호했다.
“인간들의 세상에 신의 가호가 함께하길.”
이라곤의 말을 끝으로 그의 힘이 그들을 원래의 세상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작용했다. 그 순간 르베나가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조금 전 그가 해 준 말을 떠올렸다.
“인간들의 세상에 앞으로 어떤 시련이 다가온다면 그건 다음 세대의 존재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 이를 위해 너는 너의 아이들을, 그리고 인간의 아이들을 더 강한 존재로 키워야 할 의무가 있다, 르베나 드 디오니스.”
이윽고 르베나의 붉은 시선이 이라곤을 향하자 그가 갑자기 웃어 보였다.
그의 웃음에 르베나의 시선이 잘게 흔들린 순간.
“저기!”
스릴의 외침과 함께 요정 마을의 입구가 열리기 시작했다.
“이라곤, 잠깐만요!”
이어진 아한의 외침에 이라곤의 미소가 더 진해졌다. 르베나는 그 순간 그녀와 아를이 전한 선물이 어느새 이라곤의 손에서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마법, 그것의 힘으로 이라곤이 그들의 선물과 말을 랠리에게 곧바로 전한 것일까?
“빨리, 빨리요!”
다급한 스릴의 외침과 함께 크고 작은 인영이 요정 마을을 떠나 그들이 서 있는 문으로 뛰어오기 시작했다. 점점 그들이 다가와 얼굴이 보이기 시작하자 일행 모두의 얼굴에 완연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들이 다가오는 도중 멀리 요정 마을의 문은 다시 닫혔고 그들이 일행과 손을 마주 잡자 텔레포트의 문도 비로소 닫혔다. 그렇게 르베나 일행이 사라진 숲속.
양쪽에서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본 이라곤은 웃으며 작게 속삭였다.
“이는 너희가 새롭게 맞이하게 될 세상의 인사. 그 안에서 모두가 행복하길.”
그 순간 말을 끝낸 이라곤의 모습이 요정 마을의 입구, 오묘한 숲과 함께 거짓말처럼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