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264화 (264/276)

외전 Ep 1. 요정의 숲

(9) 널 좋아해

조금 시끌벅적한 곳을 떠나 르베나는 드래곤 이라곤과 함께 걸었다. 걷는 동안 퍼져오는 은은한 꽃향기와 풀 내음이 조금 남아 있던 긴장을 풀어줬고 아름다운 요정들의 미소는 마음을 가볍게 만들어주었다.

“투오란의 일로 많이 놀랐겠군. 어쩌면 불쾌했을 수도 있고.”

이라곤의 말에 르베나가 조금 전 일을 떠올렸다. 당황스러움과 낯선 감정에 대한 경계심이 마음을 어지럽혔던 그때로.

“처음에는 조금. 만일 50살 먹은 인간이 내 배 속의 아이를 두고 반려니 어쩌니 지껄였다면 당장 죽여 버렸을 거야. 하지만…….”

르베나는 계속 자신의 옆에 붙어 맑은 눈동자로 웃던 어린아이, 투오란을 생각했다. 조막만 한 손으로 블루베리를 가리키며 짓던 미소도, 르베나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 해맑게 내던 아이의 소리도 모두.

“그건 인간의 기준일 뿐이니까. 네 말에 따르면 투오란은 이제 겨우 다섯 살 정도의 아이에다 요정의 각인도 뜻대로 되는 게 아니라며. 그러니 불쾌하지는 않아.”

르베나의 말에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인 이라곤이 말했다.

“보통 인간들은 생각은 그렇게 해도 불쾌해하기 마련인데 역시 너는 언제나 내 예상을 벗어나. 그리고 혹시라도 걱정하지 말아라. 자신의 감정을 앞세워 타인을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 건 인간만 하는 짓일 뿐이니.”

이라곤이 아름드리나무 위에서 다정하게 지저귀는 새를 보며 말을 이었다.

“요정들은 그런 감정을 모른다. 내가 좋아하고 각인된 상대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는 하지만, 상대가 거절한다고 해서 좌절하고 그 사람을 탓하고 망치는 일 따윈 하지 않아. 그러니 투오란도 그렇게 되진 않을 거다.”

이라곤의 말에 르베나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애당초 요정 마을에서 살아가야 하는 투오란이 평생 못 볼 자신의 딸에게 각인이 된 게 안타까울 뿐이니까.

그러다 조금 전 투오란의 말이 생각났다.

“각인은 없어지지 않는 건가?”

금방 르베나의 말뜻을 이해한 이라곤이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라. 신은 요정에게 가혹하지 않으니. 각인된 상대와 100년쯤 떨어져 지내면 각인은 사라지고 또 다른 이에게 각인이 가능해진다.”

이라곤의 말에 르베나는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지 조금 당황했다. 사람에게 100년은 일평생이니까. 하지만 요정의 수명으로 빗대어 보면 결국 10년인가. 그것도 짧지는 않다는 생각에 르베나는 괜히 어린 투오란이 가여웠다. 원래 아이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긴 했지만 유독 임신을 한 후로는 아이들을 보면 가엾고 사랑스러운 감정이 넘쳐흘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르베나가 자신의 감정을 헤아리는 잠깐의 시간은 이라곤의 다음 말에 의해 말끔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난 네가 투오란과 랠리를 인간들의 세상에 데려갔으면 한다.”

이라곤의 말에 놀란 르베나가 바라보자 그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말했다.

“요정들은 인간에게 각인되지 않아. 이제껏 그런 요정은 본 적이 없다. 너의 친부인 칸도 멋진 외모와 성품을 가지고 있지만 어떤 요정도 그에게 각인되지 않았어.”

르베나는 이라곤의 말을 경청했다. 왜인지 불길한 예감이 그녀의 전신을 휘감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를이 몇 년 만에 나를 찾은 게 마침 이곳이었고. 우습게도 요정들이 예고도 없이 온 그를 들여보내 랠리가 각인을 했지. 그리고 네가 준 아를의 마석이 그도 모르는 새 깨져 너는 그를 걱정했고 랠리는 요정 구슬을 통해 그런 널 보고 안심시켜주고 싶은 마음에 이곳으로 불러들였다.”

이라곤의 말을 르베나가 이어 나갔다.

“그리고 이곳에 온 나를 통해 투오란이 내 아이...에게 각인됐지.”

르베나가 부드럽게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자 아이가 대답이라도 하듯 빵빵! 배를 찼다. 이에 살며시 미소짓는 르베나를 보며 이라곤이 말했다.

“우연이 겹치면 그건 강력한 힘을 갖은 운명이 된다. 르베나 드 디오니스. 네가 너의 소원을 위해 날 불렀지만. 사실 세상은 ‘보토니에’의 처단을 원하고 있었고 우연히도 그 순간 루드바하가 생명을 다해 널 지켜냄으로써 이 세상이 구원받은 것처럼.”

이라곤의 말에 르베나의 눈동자가 거센 바람을 맞은 나무의 가지들처럼 흔들렸다. 쏴아—! 그리고 때마침 그들의 주위로 바람이 불어왔다. 그것은 마치 큰 태풍이 오기 전의 예고처럼 조금 강하게도, 때론 부드러운 무엇인가를 물어 불어오고 있었다.

“무엇인가가 오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랠리와 투오란이 인간에게 각인되게 만들었어.”

이라곤의 말에 르베나가 그를 직시하며 물었다.

“내 아이들에게… 위험이 온다는 소리인가?”

그녀가 묻는 잠깐의 사이 르베나의 분노를 담은 마력이 거칠게 요동쳤다. 그러자 이라곤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도 모른다. 그건 너의 아이들을 향한 것일 수도 있지만. 네 아이들이 살아가는 세상에 오는 시련일지도 모르지. 그러니 랠리와 투오란을 꼭 데려가라. 그것이 운명이 가리키는 방향이니.”

자박자박. 루드바하는 랠리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그곳을 나왔다. 요정의 나이가 인간과 다르다고는 들었지만.

“태어난 지 50살이나 된 주제에 내 딸, 그것도 배 속에 있는 아이에게 각인이라고?”

엄청난 분노와 살의가 그의 전신을 지배했다. 아까 아를이 데려나간 그 요정이 각인을 했다니.

“요정 아이들은 태어나 50년 정도는 이슬만 먹어요. 그래야 요정의 생명력과 힘을 얻을 수 있거든요. 그 말은, 그 아이들의 50년은 인간 아이들의 5년보다 순수하다는 거예요.”

좀처럼 이해가 안 되는 랠리의 말이 그의 머릿속을 헤집었지만 루드바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아를이 데려간 투오란을 찾기 시작했다. 왜인지는 몰랐다. 그냥 그 요정을 지금 당장 봐야만 할 것 같았다.

“폐하?”

그 순간 아를이 그를 발견하고 부르자, 루드바하의 시선은 아를이 아니라 그가 데리고 있는 요정에게로 향했다. 아를 역시 루드바하의 전신에서 뿜어나오는 한기를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 순간 둘을 떼어 놓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아를은 그를 믿었다. 루드바하는 절대 순수한 아이를 해할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투오란, 저분은 인간 세계의 왕이자 르베나의 남편. 그러니까 네가 각인된 아이의 아버지야.”

아를의 설명에 투오란의 눈이 루드바하를 향했다. 은하수를 그대로 담아놓은 것 같은 은발과 생명력이 가득한 초록 잎사귀의 생생함을 담아놓은 눈. 그 눈이 말갛게 자신을 향했다.

“안녕하세요, 투오란이에요.”

투오란이 먼저 생긋 웃으며 인사를 했다. 조금 전 운 것 때문인지 붉게 물든 아이의 눈가마저 작고 사랑스러웠다. 그래서일까. 그 순간 루드바하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아이는 태어난 지 50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작았다. 정말 인간으로 치자면 이제 4살인 유안의 딸보다도 작아 보였던 것이다. 게다가…….

“꽤 귀엽군.”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루드바하가 흠칫했고 투오란은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성큼 다가왔다.

“감사해요! 아저씨도 진짜 멋있어요! 아니, 형인가? 우리 마을에 사는 라오란 형보다 멋있거든요!”

라오란이 누군지는 몰라도 아마 아이의 눈에 꽤 멋진 요정인가 보다. 루드바하는 순간 조금 전까지의 분노가 사르르 녹는 걸 느끼며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투오란과 시선을 맞추었다.

해맑은 아이의 눈동자는 그렇게 한참을 자신의 눈과 마주했다. 순수함. 깨끗함. 거짓이라고는 조금도 묻어있지 않는 싱그러움. 루드바하는 아이에게서 느껴지는 것들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혹시… 화나셨어요?”

그 순간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루드바하의 시선에서 뭘 느낀 건지 투오란이 동그란 머리를 푹 숙였다. 그리고 우물쭈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각인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누나가 인간들은 기분 나쁠 수 있다고 예전에 말해 줬어요. 미안해요.”

동그란 머리통에서도 아이의 진심이 느껴져 루드바하는 가만히 미소 지었다. 그걸 모르는 투오란은 계속 말을 이었다.

“처음엔 엄마 아빠 자랑을 하는 게 재밌어서 옆에 있었던 건데 저도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그런데요, 아저씨.”

순간 투오란이 머리를 들고 루드바하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말을 하는 아이의 얼굴에 더해진 순수한 미소가 소중해 보였다.

“저는 각인된 아이를 소중하게 생각해요. 그리고 전 어차피 요정 마을을 벗어날 수 없어요. 그러니까 각인이 사라지는 100년 동안 아이의 행복을 기도할게요, 여기서. 그러니까… 혹시라도 저 미워하지 마세요. 미움은 마음을 잡아먹는 몬스터라고 했거든요.”

50살이라는 어린 요정이 어떻게 자신이 산 날의 두 배나 되는 100년 동안 각인된 상대의 행복만을 기도하겠다는 말을, 어떻게 하면 웃으면서 할 수 있는 건지. 그 의미가 뭔지는 아는 건지.

그리고… 미워하지 말라는 말에 어리는 눈물은 왜 아이가 먹는다는 요정의 이슬처럼 맑은 건지.

그 순간 루드바하는 투오란을 제 품에 조심히 안았다. 안으니 더욱 작은 아이라서 괜히 조금 전의 자신이 많이 부끄러웠다.

“널 미워하지 않아. 그냥… 미안할 뿐이야.”

루드바하의 따뜻한 품과 목소리에 투오란은 가만히 웃으며 그에게 머리를 기대었다. 그리고 아를은 그런 둘을 조금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투오란의 100년이 랠리의 100년과 같을 것임을 알기에.

“그러니까 저 랠리라는 요정이 아를 경한테 100년 동안 반해 있어야 한다는 거야?”

조금 새롭지만 딱히 틀리지 않은 스릴의 해석에 아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드바하가 투오란을 찾아 나서자, 걱정스러워 보이는 랠리에게 따로 가 보라고 말한 아한도 스릴과 그곳을 나와 나란히 걷던 중이었다.

그때 지나가는 여자 요정들이 아한을 보고 맑게 미소 지었다. 사실 요정은 남녀노소 누구를 봐도 미소 짓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스릴은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너 여기 와서 랠리라는 요정분 말고 다른 요정들도 만났어?”

갑작스러운 스릴의 질문에 아한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스쳐 지나긴 것도 만난 거라면 만났지. 하지만 대화를 해본 건 랠리 님과 투오란 뿐이야.”

아한의 대답이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스릴이 살짝 웃으며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아한이 멀리서 보이는 르베나를 보고는 미소 지은 건.

아마도 그래서 스릴은 계획하지 않은 말을 꺼내게 되어 버린 것 같다.

“좋아해, 아한.”

갑작스러운 스릴의 고백에 아한의 놀란 눈동자가 돌아왔다. 까무잡잡한 피부가 걱정스러울 정도로 벌겋게 달아오른 스릴이 아한을 마주 보며 다시 말했다.

“언제부터인지는 나도 몰라. 그런데 널 좋아해. 그래서 맞지도 않는 교수가 됐어. 네 옆에 있고 싶어서. 그리고 네가… 네가 언니를 그런 눈으로 볼 때마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아.”

조금은 격렬한 목소리가 점점 빠르게 뱉어지기 시작했다.

“나도 언니를 너무 좋아해서 절대 미워할 수 없는데. 네가 언니를 그렇게… 볼 때마다 언니를 질투하는 내가 너무 싫어.”

그렇게 쉴 새도 없이 갑작스러운 스릴의 고백은 계속 이어졌다. 아한의 눈동자는 그때마다 둘 곳 없이 여기저기를 서성이게 되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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