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263화 (263/276)

외전 Ep 1. 요정의 숲

(8) 드래곤이다, 임마.

투오란의 눈빛이 검게 변한 순간 르베나가 흠칫 놀라 서둘러 아이를 살폈다. 하지만 그보다 빠르게 랠리의 손이 투오란을 잡아챘다.

“맙소사, 투오란!”

비명 같은 랠리의 목소리에 투오란이 누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누나, 이게 각인이야?”

해맑기만 한 투오란의 물음에 랠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르베나도 이라곤도. 아한과 호안까지.

“맙소사, 그럴 리 없어! 넌 이제 50살밖에 안 된 아이인데 각인이라니!”

순간 랠리의 말을 들은 아한이 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이라곤이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요정들의 평균 수명은 1,000년이란다. 그러니 50살이면 인간 나이로 다섯 살 남짓이지.”

이라곤의 말을 이해하려 고개를 끄덕인 아한이 그에게 다시 물었다.

“아니, 그건 그렇다 치고 투오란이 도대체 누구한테 각인을 한 거예요, 지금? 르베나 누나한테? 일단 나이로만 치면 누나가 연하이긴 한데… 누가봐도 투오란은 아이이고… 너무 혼란스러운데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면서도 자신을 살짝 노려보는 아한의 말을 들은 건지 투오란이 해맑게 대답했다.

“르베나 님이 아니고 르베나 님의 사랑스러운 따님에게요!”

그 말을 듣고 아한이 놀라 저도 모르게 헤- 입을 벌렸고 르베나마저 당황스러워 이라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라곤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요정들의 각인은 운명이야. 언제든 만날 이에게 발현되지. 하지만 희한하군. 보통은 같은 요정들끼리 각인하는 법이건만 랠리도 투오란도 모두 인간에게 되다니. 게다가 너의 아이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이라곤조차 이 일이 이상한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그의 말을 들은 르베나 역시 묘한 기분으로 자신의 배를 바라보았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딸이, 실제로는 50살이지만 겉으론 다섯 살 꼬마 요정에게 각인되었다니. 뭔가 웃기기도 하고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 순간이었다.

“정신 차려! 너까지 나처럼 만들 순 없으니까!”

아를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웃던 랠리가 무섭게 투오란을 다그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랠리의 모습을 처음 봤는지 투오란도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채 소리쳤다.

“각인은 운명이야!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고!”

투오란의 말에 랠리가 투오란의 엉덩이를 찰싹 가볍게 치며 화를 냈다.

“거짓말 하지 마! 뭔가 설렘이 좋으니까 너도 르베나 님 곁에 있던 거잖아!”

랠리의 말에 투오란이 엉엉 울며 소리쳤다.

“그런 거 몰라. 이제 50살밖에 안됐는데 내가 그런걸 어떻게 알아. 그냥 르베나 님을 보자마자 좋았어. 르베나 님의 눈길도, 손길도, 힘도 모두! 그러다 아이들이 말을 거는 게 신기했고 재밌었을 뿐이란 말야.”

투오란이 소리친 순간 르베나는 뭔가 이상한 걸 깨달았다.

아까부터 두 개의 음식을 놓고 고민하면 꼭 한 개를 짚어주던 투오란. 분명 아기들의 말을 들을 수 있어 르베나가 먹고 싶은 것과 아기들이 먹고 싶은 것 중 후자를 알려주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너 혹시 네 각인… 아니, 누나의 딸이 먹고 싶은 것만 고른 거야?”

르베나와 같은 생각을 한 건지 아한이 묻자 투오란이 눈물을 잔뜩 흘린 흰 얼굴을 고집스레 굳히고는 입을 닫았다. 그 모습에 랠리가 소리쳤다.

“인간은 안 돼! 누나를 보고도 몰라?”

랠리의 외침에 제법 고집스러운 얼굴이 된 투오란이 말했다.

“어차피 각인 상대와 멀어지면 100년 만에 다시 돌아온다며! 평생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야!”

투오란의 말에 랠리가 다시 소리쳤다.

“아무리 100년이 짧다 해도 네가 살아야 하는 시간이야. 그 시간 동안 얼마나 괴롭겠어!”

아직 어린 투오란은 랠리의 말을 선뜻 이해하지 못하는 듯 울먹이며 말했다.

“하지만 착한 아이란 말이야. 자기들 힘이 너무 강해서 많이 먹으면 르베나 님이 나중에 자기들 태어날 때 힘들어진다고 먹고 싶은 것도 참는 아이들인데… 그런 아이한테 각인됐는데 왜 내가 괴로워!”

투오란의 말에 순간 르베나의 시선이 흔들렸다. 하지만 랠리는 더욱 속상해하며 소리쳤다.

“안 되겠다. 당장 방에 들어가서 나오지 마. 르베나 님이 가실 때까지야!”

랠리의 역정에 투오란이 이슬같은 눈물을 떨어트렸다. 하지만 그 순간에 호안도 아한도 르베나마저 그들의 이야기를 쫓아가지 못해 차마 말리지 못했다.

100년 만에 다시 돌아온다, 100년이란 짧은 시간.

그런 말들이 인간인 그들로서는 선뜻 이해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투오란이 엉엉 울며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르베나를 보며 말했다.

“가지 말래, 엉엉. 자기랑 놀아달래……!! 어어엉!”

투오란이 계속 고집을 부리자 랠리가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크게 소리치며 투오란을 혼냈다.

“그러다 너는 평생 르베나 님의 따님 옆에서 살아야 해! 그 인간의 마음을 얻으려 노력하면서!!”

그때였다.

“감히 누가 태어나지도 않은 내 딸의 마음을 얻는다는 거지.”

서릿발처럼 차가운 그, 루드바하의 목소리가 닿아 온 것은.

* * *

조금 전 요정 마을 입구.

“…스릴 공주님?”

누군가 자신을 부르자 스릴이 가까스로 발의 움직임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몇 년만에 보는 아를의 떨리는 시선에 스릴은 그만 폭삭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너무… 수치스러워. 그래도… 반가워요, 아를 경.”

기어들어 갈 만큼 작은 스릴의 목소리에 아를이 이로 입술을 꽉 물었다. 웃지 않기 위한 최선의 노력이었다. 하지만 그 이상의 노력은 굳이 필요하지 않아 보였다.

“오랜만이군, 아를 경.”

아버지보다 더 아버지 같은 미소로 자신을 바라보는 칸과.

“무사했군.”

짤막하지만 누구보다 반가운 눈빛을 보내는 그, 루드바하를 보니 아를도 모르는 환한 미소가 그의 얼굴을 다시 채워 갔기 때문에.

그 길로 아를은 장난스러운 요정을 가볍게 손봐 준 후 모두를 데리고 마을로 들어섰다. 스릴과 계속 춤을 추고 싶다며 우는 요정을 떼어내는 건 조금 힘들었지만 말이다.

“정말 오랜만이군.”

아를을 따라 마을로 들어선 칸이 오랜 추억을 그리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루드바하는 크게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요정들의 실체를 직접 보는 것에 큰 흥미를 느끼는 듯했다. 그리고 스릴은.

“요정들이 다 저렇게 예뻐요?”

“저 예쁜 요정들하고 아한이 지금 같이 있다고요?”

“아한이 혹시 조금 부끄러워했어요? 요정 언니들 보고?”

이해할 수 없는 질문들을 쉴 새 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칸과 루드바하는 간혹 스릴의 질문에 웃기도 하는 걸로 봐서 의미를 아는 것도 같았다. 그렇게 스릴이 만들어 낸 오랜만의 시끌벅적함에 아를도 어느새 미소 지을 찰나.

“오! 카라기!”

칸이 오랜 요정 친구를 발견했는지 곧바로 그와 함께 사라져버렸다. 그 모습에 잠시 당황한

스릴이 루드바하에게 조그맣게 속삭였다.

“칸 님은 언니가 걱정 안 되나 봐요? 아를 경께 언니 여기 있다는 소리 듣고 나서부터는 표정이 엄청 밝으셨잖아요. 심지어 사라지시다니.”

스릴의 말에 대한 답은 아를이 대신했다.

“요정들을 잘 아시니까 그러실 거예요. 요정들이 장난기가 좀 많기는 하지만… 큽.”

순간 조금 전 열정적으로 춤을 추던 스릴이 떠올랐는지 아를이 말을 하다 말고 웃음을 꾹 참으려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스릴이 벌게진 얼굴로 루드바하를 보았다. 그 역시 먼 곳을 바라보며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요정들 짱 싫어!”

그들의 얼굴에 조금 전 자신이 부끄러운 스릴의 큰 목소리가 요정 마을을 가득 채운 순간, 그들은 어느새 르베나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스릴은 입구에서 춘 춤에 대한 수치심과 아한에 대한 알 수 없는 불안을 품고, 루드바하는 르베나에 대한 초조함과 걱정을 품고 문에 다가간 순간.

“그러다 너는 평생 르베나 님의 따님 옆에서 살아야 해. 그 인간의 마음을 얻으려 노력하면서.”

안에서 어느 여성이 소리치는 소리와 함께 어린아이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루드바하의 전신에서 매서운 신력이 휘몰아치고 그보다 시린 목소리가 안으로 들어섰다.

“누가 감히 태어나지도 않은 내 딸의 마음을 얻는다는 거지?”

루드바하의 서릿발 같은 시선이 랠리와 투오란을 향하자마자 르베나의 목소리가 그들을 가르며 들려왔다.

“내가 설명할게요, 루드. 그러니 이곳의 누구에게도 화내지 말아요.”

그 순간 루드바하의 전신에 휘몰아치던 신력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가 곧바로 르베나에게 달려갔기 때문이다.

“괜찮아요, 르베나? 어디 다친 곳은 없고요? 불편하거나 아픈 곳은요?”

분명 조금 전까지 태어나지도 않은 딸의 일로 그렇게 화를 내놓고선 이젠 아이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르베나만 살피는 루드바하. 그런 루드바하를 보며 르베나가 차분하게 말했다.

“다친 곳은 없어요. 요정들의 장난에 살짝 놀라긴 했지만 보다시피 잘 대접받고 있었고요.”

르베나의 말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몸을 여기저기 한참 살핀 후에야 루드바하가 안심한 듯 물었다.

“쌍둥이도 괜찮은 거죠?”

조금 늦은 질문이긴 했지만 르베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랠리는 투오란을 보며 다시 소리쳤다.

“얼른 방으로 들어가! 앞으로 넌 외출 금지야!”

랠리의 말에 투오란이 잔뜩 겁먹은 얼굴로 르베나를 바라보았다. 맑고 신비로운 아이의 눈동자가 두려움으로 번지자 르베나의 마음이 지끈 아파 왔다. 그래서 무언가 말을 보태려던 순간, 이라곤이 나섰다.

“아를, 투오란이 각인을 했다. 르베나의 아이에게.”

이라곤의 말에 아를은 크게 놀랐지만, 스릴과 루드바하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 제각각 아한과 르베나를 보며 설명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라곤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너희에게 설명은 랠리가 해 줄 거다. 그리고 아를, 넌 투오란이 많이 놀랐으니 데리고 나가 달래 주렴. 르베나. 넌 나와 잠시 얘기를 좀 하자꾸나.”

이라곤의 말에 르베나가 루드바하와 시선을 맞추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괜찮으니 안심하라는 표현이 분명했다. 루드바하 역시 르베나의 그 동작 하나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제껏 초조했던 마음을 겨우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래도 궁금한 건 남아 있어 르베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저 남자는 누구길래 겁도 없이 내 앞에서 내 아내를 따로 불러내는 걸까요, 르베나?”

웃고 있지만 잔뜩 날이 서 있는 모습. 소유욕과 질투에 잔뜩 젖어있는 루드바하의 모습을 본 이라곤이 르베나를 대신해 답했다.

“드래곤이다, 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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