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Ep 1. 요정의 숲
(7) 요정의 각인
모두의 경악 어린 표정을 알아차린 걸까. 아를이 순간 자신의 행동을 인지한 건지 조금 놀란 눈으로 르베나를 바라보았다. 그를 보고 있던 랠리도 아를을 따라 르베나를 보았다. 그러자 유일하게 평온한 표정으로 있던 르베나가 그제야 조금 당황하며 입을 뻐끔 열었다.
“아… 축하해! 아를, 너에게 연인이 생기다니 정말 기쁘다.”
둘의 시선을 축복을 바라는 의미로 알아들은 르베나가 서둘러 축하의 말을 건네자 아를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런 거 아니야! 얘가 장난친 거야. 그리고 사, 사정이 좀 있는 것뿐이고. 일단 난 좀 씻어야겠다. 여기서 쉬고들 있어.”
갑자기 허둥지둥 나가는 아를의 뒷모습을 보며 호안이 빙그레 웃었다.
“아를 경께서 부끄러워하시는 모습은 처음 봐요.”
호안의 말에 르베나가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였다. 아한이 말을 꺼낸 건.
“부끄러워하는 게 아니라 당황하는 거 아닐까요? 아를 형이 누구를 만날 리가 없는데.”
혹시나 랠리한테 실례일까 싶어 뒷말은 아주 조그맣게 덧붙인 아한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이라곤이 그들의 궁금증을 해결해 준 건.
“둘은 연인 관계가 아니다.”
그의 단호한 말에 르베나의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 조금 전 랠리는 아를에게 분명 ‘자기’라고 했고 그건 연인들 간의 호칭이 분명한데. 그런 호칭을 입에 담은 사람을 면전에 두고 연인이 아니라니. 르베나의 당황스러움이 느껴진 건지 또 다른 한 명이 이라곤의 의견을 지지했다.
“맞아요. 누나는 인간 검사의 연인이 아니에요.”
바로 투오란이었다. 그 순간에도 르베나에게 예쁜 눈웃음을 지으며 요정 특제 밀크티를 내어주는 아이의 미소가 유독 예뻤다.
하지만 그 말의 의미를 깨닫고 르베나에 이어 호안까지 당황해할 찰나, 랠리가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요정들은 존재를 숨기고 인간과 섞이지 않고 살아가죠. 그 이유를 아시나요?”
갑작스러운 랠리의 질문에 호안과 아한이 정해놓은 것처럼 르베나를 보았다. 그들의 시선에 당황하지 않은 르베나가 칸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요정들은 장난기가 많지만 순수해서 인간들과 섞여 살지 못한다고 들었어요. 인간들의 거짓말과 배신 같은 것들에 너무 잘… 속아서요.”
말하다 보니 자신과 같은 인간들이 너무 못된 거 같아 르베나의 입맛이 썼다. 그런 르베나를 본 랠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런 이유도 있죠.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어요. 예를 들면 요정들은 자연에서 힘을 빌려 써요. 그건 인간들이 쓰는 마법과는 조금 다른 이치죠. 그래서 투오란이 르베나 님의 아기들과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처럼 인간들의 상식과는 다른 능력이 생기기도 해요.”
랠리의 말을 들은 르베나의 시선이 가만히 투오란을 향했다. 자신들과 조금만 달라도 배척하고 소외시켜 버리는 인간들이 투오란의 능력을 알게 되면 어떨까?
각 왕가나 귀족들은 배 속 아이와의 대화라는 신선한 능력에 이 요정 아이를 얻으려 혈안이 될 거다. 그러다 듣고 싶지 않은 사실이라도 알게 되면 그 탓을 이 작은 요정에게 떠넘기겠지.
문득 인간의 잔악성을 떠올린 르베나는 왠지 모를 슬픔에 자신도 모르게 투오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다 실례라는 걸 깨닫고 손을 거두려 한 순간, 투오란은 기분 좋은 고양이처럼 웃으며 자신의 머리를 르베나의 손에 비벼 댔다. 손바닥에 닿는 꼬마 요정의 머릿결이 얇고 보드라워 르베나는 이 아이가 더 소중하게 여겨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작게 웃은 랠리가 이어 말했다.
“마지막 이유는 요정들의 각인 때문이에요.”
랠리의 말에 아한이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각인이요? 처음 들어봐요.”
랠리가 앞에 말한 이유는 알고 있었던 듯 반응이 없던 아한의 물음에 대한 답은 이라곤이 이어갔다.
“요정들은 예상치 못한 때에 운명이 정해 준 자신의 배우자를 각인한다. 그건 의지로 되지 않아. 그냥 운명이 정한 상대를 만나면 영혼에 그를 새기게 되는 거지.”
잠시 랠리를 바라본 그가 씁쓸한 얼굴로 쉽게 말을 잊지 못하자 랠리가 그 뒤를 이었다.
“각인된 사람이 아닌 이와는 사랑하지 못해요. 인간들의 입장에선 이해 못 하겠지만 절대로 다른 이성에게 설레거나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리고 전 아를에게… 이미 각인을 했고요.”
랠리의 말에 호안과 아한 그리고 르베나마저 크게 놀란 표정을 미처 감추지 못했다.
“…하.”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 아를이 얕은 숨을 뱉어냈다. 매일 하는 장난인 줄 알았더니 진짜 르베나라니. 그리고 쌍둥이… 를 가진 르베나라니. 왜인지 마음이 뒤숭숭했다.
르베나의 곁을 떠난 지 3년. 아를은 그동안 많은 곳을 여행했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자신이 보지 못한 수많은 인생을 보며 삶의 영역을 늘려 갔고, 오랜 여행 끝에 드래곤을 찾아 이곳에 왔다. 그리고 아주 가끔 요정 구슬로 르베나를 보며 생각했다.
완전히 잊었다고.
여자로서의 르베나는 이제 그의 마음 한쪽에 추억으로 잘 포장해 두었다고.
하지만 오늘 르베나가 진짜인 걸 알자마자,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동자를 보자마자. 마음속 포장지의 리본은 형편없이 풀려 버리고 말았다.
문제는 그런 르베나를 보며 드는 생각이었다.
“이 미친놈아. 르베나는 결혼해서 아이도 가졌어.”
이제는 이루지 못할 사랑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라 죄책감까지 드는 감정이 그를 여전히 힘들게 할 수 있다는 게 어이가 없고 놀라웠다.
끼익-! 그 순간 랠리의 생각까지 나니 머리가 복잡해져 아를은 물을 꺼 버렸다. 수증기 가득한 대형 나뭇잎 욕실 안. 거울로 무표정을 연습한 그가 빠르게 몸의 물기를 닦아냈다.
그리고 화악-! 밖으로 나오자 어느새 지는 해 때문인지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에 조금 전까지 가슴을 내리누르던 돌덩이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꺄하!”
그 순간 들려온 소리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입구?’
입구에서 요정의 웃음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온 것이다. 입구에서 거절하는 인간들은 수면 상태로 멀리 옮겨진다. 그렇지 않고 르베나처럼 초대된 손님은 요정들이 직접 마중을 나가 데려오고.
하지만 저렇게 요란한 소리가 나는데도 보이지 않는 손님이라니.
그 순간 조금 이상함을 느낀 아를이 입구 쪽을 향해 걸어갔다. 시원한 바람이 조금 젖은 그의 머리카락을 날리려 애를 쓰고, 뜨거운 물에 노곤해진 그의 몸을 깨우려는 몇 번의 노력이 오고 갔을 때. 그는 걸음을 우뚝 멈춰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믿기지 않는 광경에 두 시선을 하염없이 떨고 말았다.
“유후-! 아주 잘하는데? 더 따라 해 봐. 인간!”
신나게 춤을 추는 작은 요정이 요구하자, 누군가 그 춤을 열심히 따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이렇게? 뭔가 재밌는 거 같으면서도 굴욕적이야……. 근데 신나!!”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표정으로 요정의 화려한 발재간을 흉내 내는 사람.
“…스릴 공주님?”
순간 아를이 그녀를 부르고 스릴의 너머를 바라보았다. 화려한 발재간을 흉내 내며 굴욕과 흥미의 어딘가를 서성이는 스릴의 뒤, 애써 웃음을 참으며 어깨는 떨고 있는 칸과 무심한 표정으로 스릴을 보며 작게 입으로 스텝을 외우는 그, 루드바하를 말이다.
“근데 왜 연인 관계가 아닌 거죠? 각인을… 하셨다면서.”
호안 왕자가 요정의 각인에 대해 듣고 놀라 되물었다. 이에 랠리가 조금은 어두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요정 숲의 공주님이라 그런지 랠리는 어떤 표정을 해도 이슬처럼 맑았고 싱그러웠다.
“아를은 분명 경고했어요. 각인이 되기 전에 이미 제 마음을 알고 자신은 받아줄 수 없으니 멀어지라고. 계속 같이 있어 각인이 되는 거라면 자신이 여길 떠나겠다고요.”
랠리는 말을 하다 조금 울적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200년 만에 첫 각인이 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제가 무모한 짓을 하고 말았어요. 그대로 가면 어떻게 될 줄 알면서도 그의 곁을 맴돌았거든요. …어쩌면 받아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던 것 같아요.”
랠리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아를을 잘 아는 모두는 익히 알 수 있었다. 랠리의 각인 이후에도 아를은 쉽게 마음을 주지 않았을 거라는 걸. 거짓으로, 연민으로 누구에게 마음을 줄 아를이 아니라는 걸 말이다.
“하지만 아까 자… 기라고 불렀잖아요.”
호안이 포기하지 않고 되묻자 르베나의 접시에 예쁘게 과일을 수놓던 투오란이 답했다.
“그건 인간 검사가 조금 포기한 거예요. 윽박지르면 누나가 울고 무시하면 다른 요정들이 나쁜 인간이라고 욕하니까. 이라곤 님이 조언을 해 줬거든요. 그냥 누나가 뭘 하든 가만히만 있으라고.”
투오란의 말이 랠리한테 큰 상처일까 봐 르베나가 조마조마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하지만 랠리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말갛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아를이 아니면 누구에게도 마음을 못 주는데 그 상대가 하필 아를이라니. 아를을 잘 아는 모두는 그만 아연한 심정이 들고 말았다.
그리고 르베나는 왜인지 아주 조금 죄책감이 들었지만 금방 떨쳐내었다. 3년이나 지난 지금, 아를의 마음속에 르베나는 더 이상 없을 거라 확신했기 때문에.
그때 잠자코 듣고 있던 아한이 질문했다.
“근데 각인이라는 건 어떻게 알게 되는 거예요?”
학자답게 궁금증이 많은 아한의 질문에 투오란이 해맑게 대답했다.
“눈동자 색이 변해요. 각인된 순간, 검게요!”
아한을 보고 맑게 웃으며 대답한 투오란이 블루베리를 치우고 딸기를 르베나에게 살뜰히 건네주며 말했다. 아이의 웃음이 예뻐 딸기를 받아든 르베나가 조금 고민하다 말했다.
“투오란, 이번엔 블루베리를 먹으면 안 될까? 아까부터 딸기만 먹었더니 블루베리가 조금 먹고 싶은데.”
르베나의 말에 순간 어미 새처럼 이것저것을 주던 투오란이 멈칫했다. 그 모습을 본 랠리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르베나 님이 고민하는 것 중 하나만 집어드려? 모두 드시게 하면 좋잖아.”
랠리의 말에 투오란이 조금 머뭇거리다 말했다.
“딸기를 좋아해, 아이가.”
투오란의 말에 랠리와 모두가 고개를 갸웃하자 투오란이 작은 손을 꼼지락거리더니 말했다.
“여자아이가 딸기가 더 좋대. 그래서… 음… 딸기를 주고 싶었어.”
그 순간이었다. 투오란의 눈동자가 검게 변한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