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Ep 1. 요정의 숲
(6) 자기야, 이거 먹어 봐.
“진짜 쌍둥이라고?”
벌써 몇 번째 같은 걸 물어보는지 모를 아를에게 르베나는 또 한 번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아를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해갔다.
“이번엔 이거요!”
그리고 르베나의 곁에 딱 붙어 앉아 있는 투오란은 계속해서 두 가지 먹을 것을 두고 고민하는 르베나에게 그중 하나를 콕콕 집어 말해 주었다. 이번에도 요정 숲의 작고 달콤한 딸기와 블루베리를 놓고 고민하는 그녀에게 딸기를 콕 집어주듯.
르베나는 이에 눈으로 고마움을 전하며 딸기를 먹었다. 순간 아기 하나가 발을 차는지 한쪽 배에서 큰 태동이 느껴졌다.
“쌍둥이라고…….”
작게 중얼거리는 아를을 보며 오랫동안 참았던 아한이 볼멘소리를 낸 건 그때였다.
“형은 누나만 보여? 누나가 쌍둥이를 가진 것만 보이냐고? 여기 옆에 있는 나랑 형 때문에 놀라서 상처까지 난 호안 왕자님은 보이지도 않고?”
아한의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아를이 놀라 어깨를 떨더니 곧장 호안 왕자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잔뜩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정말 실례가 많았습니다. 여기 들어온 후로 하루가 멀다 하고 제 지인들 흉내를 내서 몇 번이나 속았거든요. 이번에도 그런 줄 알았어요. 그래도 너무 심하게 하면 안 됐는데.”
아를의 말에 호안 왕자가 괜찮다는 듯 웃으며 곧바로 자신의 상처를 치료했다.
“정말 괜찮습니다. 아를 경이 노려본 순간 제가 움찔하는 바람에 다친 거니까요. 그것보다 건강해 보여 좋네요.”
호안의 말에 아를 역시 그를 살펴보았다. 이제는 제법 그의 또래처럼 보이는 호안은 누가 뭐래도 부드러운 미소가 잘 어울리는 남자가 되어 있었다.
곧 시선을 돌린 아를이 아한을 바라보자 아한이 토라진 듯 휙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은 아를의 짤막한 한마디에 아한의 얼굴은 저절로 풀어지고 말았다.
“보고 싶었다, 아한. 정말로.”
아를의 그 한마디로 일행은 즐거운 얼굴로 저마다 그간의 쌓인 회포를 풀기 시작했다.
“요정의 구슬?”
조금 후. 아를의 말을 듣던 아한이 놀라 되묻자 랠리가 사람 머리만 한 구슬을 꺼내 보여 주며 말했다.
“네, 이거에요. 여기에 손을 올리고 보고 싶은 사람을 간절히 떠올리면 볼 수 있어요.”
곧 랠리가 구슬에 손을 올리자 디오니스 집무실에 모여있는 제노스와 후벤, 다한 등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아를이 르베나에게 말했다.
“랠리가 갑자기 초대한 거에 대해 한 번 더 사과할게. 그리고 내가 이걸로 자주 본 것도. 너도 아한도, 그리고 가끔 가족들도. 그래서 좀 버틸 만했지만.”
아를의 말에 르베나의 얼굴이 밝아졌다. 드래곤을 만났다는 마지막 소식을 끝으로 몇 개월. 아를이라면 무사하리라 생각은 했지만, 걱정도 많이 되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동안 드래곤과 요정의 숲에서 훈련하며 틈틈이 그들도 보았다니. 생각보다 아를이 잘 지낸 것 같아 마음이 편해졌다. 그런 르베나의 얼굴을 본 아를이 조금 풀 죽은 소리로 물었다.
“기분 나쁘지? 근데 구슬도 아무거나 보여주진 않아. 흙과 공기가 모두 있는 곳만 보여 주는 거라 보통은 너희들이 밖에 있을 때만……!”
“괜찮아, 아를. 그걸로 너에게 위안이 되었으면. 그리고 네가 남의 사생활을 훔쳐 볼 사람도 아니고.”
하지만 르베나의 그 한마디에.
“나도 괜찮아. 난 아마 멋진 거밖에 없었을 테니까. 내가 학생들 가르치는 것도 봤어, 형?”
그리고 아한의 장난스러운 한마디에 아를은 비로소 실감이 났다. 그의 사람들이 이곳에 함께 있다는 것이.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들이 있는 곳으로 한 남자가 들어섰다. 엄청난 힘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 * *
“여기… 인가요?”
스릴이 주변의 몽환적인 분위기에 빠져 조금 멍한 소리로 물었다. 칸은 몇 년 만에 온 요정의 숲이 무척 반가운지 들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구를 찾고 있었다. 요정의 숲 입구는 올 때마다 바뀌기 때문에 요정들이 춤을 추는 곳을 찾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오로지 한 명, 루드바하만이 온몸을 살짝 긴장시켜 주변을 경계하는 중이었다.
“칸님! 혹시 춤이란 게… 저건가요?”
그 순간 주변에서 겨우 눈을 뗀 스릴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으로 칸과 루드바하의 시선이 닿았다. 그리고 칸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맞습니다, 스릴 공주님! 정말 요정들이 르베나와 아한, 그리고 호안 왕자님을 데려간 것 같군요. 요정의 숲에 맞게 온 걸 보면요. 저희도 얼른 가 보죠.”
어느새 걱정은 사라지고 반가움만 가득한 칸의 말에 루드바하도 슬쩍 몸의 힘을 뺐다. 이곳에 오기 전 칸에게 요정들에 대해 들었기 때문이다.
“안타까울 정도로 악의를 갖지 못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들이 인간들과 떨어져 사는 이유 중 하나죠. 장난기가 무척 많아 르베나를 데려가는 무모한 일을 벌이긴 했지만, 그들이 데려간 게 맞다면 모두 안전할 겁니다. 그러니 너무 염려 마세요.”
잠시 그 말을 떠올린 루드바하는 스릴, 칸과 함께 서둘러 작은 요정들이 춤추는 곳으로 다가갔다.
“우와… 별 가루 같아요. 은하수 같기도 하고요!”
별을 가득 담은 것처럼 두 눈을 반짝이는 스릴의 말에 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원래 저 가루는 우연히 입구를 찾은 이들을 재우는 용도입니다. 그래서 잠든 틈을 타 이곳과 먼 곳으로 보내 버리죠.”
칸의 말에 곧바로 스릴이 자신의 코를 막았고 루드바하 역시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칸은 그런 두 사람을 보고 웃으며 무언가가 무척이나 그리운 사람처럼 말했다.
“걱정 마세요. 만약 이들이 저희를 재우려 했다면 우린 이미 잠들었을 테니 말입니다.”
칸의 말에 살짝 긴장을 푼 스릴이 그들을 조금 더 호기심 있는 눈으로 살피며 말했다.
“근데 원래 요정들이 저렇게 작아요?”
스릴이 한껏 목소리를 낮춰 말하자 그 모습이 귀여워 칸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원래 크기는 우리 인간과 비슷합니다. 이건 요정들이 만들어낸 환영 같은 거라 작은 거고요.”
칸의 대답을 듣고 이번엔 루드바하가 물어왔다.
“요정들이 마법을 씁니까?”
그러자 이때까지와는 달리 잠시 머뭇거린 칸이 말했다.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요정들은 자연의 힘을 빌리죠. 흔히들 정령이라고 하고요. 저도 몇 번 알아보려 했지만, 요정들은 자신들의 힘에 대해서 말하는 건 굉장히 꺼려 해요.”
칸의 말에 루드바하의 눈이 아주 잠시 르베나에 대한 걱정을 내려놓고 호기심으로 빛났다.
그렇게 루드바하는 환영을 만들어내는 힘을, 스릴은 작고 귀여운 요정들의 춤사위에 빠져있을 때였다.
“그런데 이상하군요. 우리가 온 걸 알 텐데 누구도 마중 나오지 않는 걸 보면 말이에요.”
칸이 예전과는 다른 상황에 의문을 표현했다. 그때 하늘을 날며 별 가루를 뿌리고 춤을 추던 요정 하나가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 춤을 따라 춰 봐. 그럼 들여보내 줄게. 키득키득.”
요정들의 장난기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 * *
“저 사람 누구야?”
아한이 경계심 어린 시선 가득 한 손에 선명한 녹색의 마력을 모으며 말했다. 호안 왕자 역시 모두의 앞에서 금빛의 환한 신력을 꺼냈고, 르베나는 마력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자신의 배를 감쌌다.
그만큼이나 들어선 남자에게서 풍기는 낯선 힘의 정체와 크기가 엄청났기 때문이다.
“어? 혹시 이라곤 님을 모르세요?”
그때 랠리가 갸우뚱한 얼굴로 묻자 아를이 서늘한 표정으로 들어선 남자를 흘낏 보며 말했다.
“이 모습으로는 처음이니까. 다들 너무 긴장하지 마. 드래곤이 인간으로 변한 모습이야.”
들려온 아를의 말에 아한과 호안의 힘이 살짝 떨려왔다. 동시에 아를이 이라곤에게 말했다.
“괜히 분위기 잡지 말고 표정 풀어. 다들 긴장하잖아.”
아를이 말을 툭 뱉은 순간 서늘한 표정의 남자가 미소 지은 것과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 풍기던 어마어마한 압박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가 곧바로 르베나에게 다가서며 웃어 보였다.
“오랜만이다, 르베나 드 디오니스.”
그의 인사에 르베나가 이미 그의 정체를 알고 있었던 듯 평이하게 답했다.
“아를이 당신을 찾았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군.”
이에 이라곤이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이쪽이 인간을 가르치는데 더 편하거든.”
아마도 아를은 원래의 목적을 달성해 드래곤한테 가르침을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를 역시 둘의 대화를 들었는지 덧붙여 설명했다.
“훈련하다가 네가 준 마석이 깨졌어. 그것 때문에 걱정할 거라고 생각을 못 했네. 미안해, 르베나.”
아를의 진심 어린 사과에 르베나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네가 무사했으면 됐어. 그나저나 그 가르침이란 건 꽤 재밌나 봐? 연락도 안 하고 집중하는 거 보면.”
다른 사람이 했다면 가시 돋친 말로 들렸을 법하지만 르베나의 성격을 아는 모든 이는 생각했다. 지금 르베나는 분명 그 가르침에 굉장한 호기심을 느끼고 있다고. 아를 역시 그런 르베나의 말에 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검기랑 달리 몸속의 마력을 아주 조금씩 모아 코어라는 걸 만들어 필요할 때 쓰는 건데. 내가 잘 배웠다가 너 아이… 낳고 나면 가르쳐 줄게.”
아를의 말에 순간 르베나와 아한, 호안 왕자의 눈까지 반짝거렸다. 마법처럼 바로바로 쓰는 게 아니라 저장이라니! 코어라니! 처음 들어보는 개념들에 모두의 호기심이 발동된 것이다.
아를은 그런 사람들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웃어 보였고 곧 이어질 어마어마한 질문 폭격을 예상하며 눈앞에 놓인 차가운 찻잔을 들었다.
“아를, 그건 차가워. 훈련하면서 땀이 많이 났을 테니 이거 마셔.”
그 순간. 랠리가 서둘러 뜨거운 차를 그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양 뺨이 붉게 물든 채 아를에게 쿠키 접시도 내밀며 말했다.
“자기야, 이거 먹어 봐.”
그 모습에 르베나와 아한이 놀란 얼굴로 아를과 랠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랠리의 다정한 행동에 조금도 정색을 표현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아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