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Ep 1. 요정의 숲
(5) 재회
르베나의 음성은 결코 고조되거나 높지 않았다. 적당한 톤으로 전해진 서늘한 물음. 하지만 그 질문 하나에 침묵은 짙어졌다. 그리고 아를의 얼굴에 못 보던 표정의 당황스러움이 어린 순간이었다. 벌컥.
“이게 무슨 짓이야.”
낮고 서늘한 목소리. 조금의 감정도 묻어나지 않는 고저 없는 어조.
“…형!”
눈앞의 아를과는 다른 진짜 아를의 등장에 아한이 벌떡 일어나 그를 불렀다. 동시에 이제 막 방으로 들어선 또 다른 아를이 당황스러운 시선으로 아한과 호안 왕자 그리고 르베나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고는 한숨을 내어 쉬며 말했다.
“이런 장난은 두 번 다시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게다가…….”
잠시 아를의 짜증 어린 눈이 르베나와 그녀의 살짝 나온 배를 향했다.
“이렇게 진짜처럼은 더욱.”
툭. 아를이 들고 있던 검을 대충 던져 놓고는 방 안의 모두를 차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때 뒤따라 들어오던 꼬마 요정, 투오란이 아를의 뒤를 졸졸 쫓아오며 말했다.
“인간 검사, 이 사람들 진짜야!”
그러더니 부지런히 걸어와 르베나의 앞에 그레이 풀로 만든 먹음직스러운 빵을 내려놓았다.
이 순간에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걸로 봐서 정말 갓 구운 빵을 가져 온 모양이었다.
아를이 두 명인 당황스러운 상황에서도 르베나가 식욕을 느낄 만큼 맛있어 보였다.
“드세요, 어서요!”
그런 르베나의 마음을 읽은 건지 투오란이 그중 하나를 들어 르베나에게 주었다. 그 순간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는 투오란과 르베나를 기가 막히다는 듯 바라본 아를이 말했다.
“이젠 연기까지 하네.”
아를의 말뜻을 정확히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르베나는 뒤늦게 들어온 그가 진짜 아를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동시에 조금 지쳐있기는 하지만 거의 다치지는 않은 그의 몸 상태도 함께.
그제야 살짝 안도감이 들어 르베나는 조금 무거운 몸으로 앉은 다음 투오란이 건넨 빵을 한입 물었다. 동시에 배에서 아기의 발차기가 확연히 느꼈다.
“맛있죠? 예쁜 아기도 그럴 거예요.”
투오란은 르베나의 태동을 다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예쁘게 웃었다. 꼬마 요정이 웃으니 그 순간 별이 반짝이는 느낌마저 들었다. 탁! 그때 탁자 위에 신경질적으로 물병을 올려놓은 아를이 온기 한 점 없는 눈으로 말했다.
“당장 그만둬, 투오란. 그리고 랠리, 너도! 너희는 도대체 할 일도 없어? 하루 이틀도 아니고 르베나, 아한, 심지어 어떨 땐 내 아버지 흉내까지 내더니. 하, 이제는 호안 왕자님까지? 도대체 저 사람은 갑자기 왜 나온 건데?”
아를의 서늘한 시선을 받은 호안 왕자는 조금 민망한 기분이 되었다. 후원으로 잠깐 발을 들인 것뿐인데 벌어진 일들이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엄청난 불청객이 되어 버린 느낌. 아마도 이들은 평소에도 아를의 지인들로 변해 아를을 놀렸던 모양이다.
“르베나.”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르베나는 순간 꿈에서 들었던 아를의 말이 혹시 이런 상황에 나온 말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정들의 변신 실력이 대단하긴 하지만 일단은 오해를 푸는 게 먼저라 생각도.
“아를, 뭔가 오해하는 거 같은데 진짜 나야.”
르베나가 조금의 민망함을 느끼며 말했다. 내가 나라고 누구를 설득하는 게 이렇게 부끄러운 일인지 미처 몰랐다. 하지만 아를은 그런 르베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정말 그리운 누군가를 떠올리듯. 그러더니 르베나 앞에 있는 그레이풀 빵을 집어 몇 번 씹더니 말했다.
“그래, 마음대로 해라.”
생각지 못한 아를의 반응에 르베나가 적잖이 당황하자 이번엔 아한이 나섰다.
“형! 진짜 우리야. 형 마석이 깨져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아한의 말에 이번에도 아를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았대? 아한이라… 진짜로 봐도 이만큼 컸으려나. 재밌네.”
그들의 존재를 믿지 못하는 아를의 반응에 이번엔 아한이 할 말을 잃자 마지막 호안 왕자가 나섰다. 불청객으로서 꼭 이번 일은 자신이 해결하리라 생각하며.
“아를 경, 진짜 저희입니다. 무슨 오해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이었다. 아를의 눈이 서릿발처럼 차가워진 것은
“적당히 해. 호안 왕자님 놀이까지 받아 줄 생각은 없으니까.”
갑자기 더해진 민망함에 호안 왕자가 손을 테이블 위로 올렸다. 그 순간 르베나가 깨트린 유리잔의 조각이 남아 있었던 건지 그의 손가락에서 붉은 선혈이 흐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아를의 시선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 * *
“이 꽃이 수면과 환각을 유도한다는 겁니까?”
루드바하가 눈앞에 놓인 노란색 꽃, 레리쿼스를 보며 묻자 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꽃잎 하나를 떼어내 투명한 유리 위에 올려놓으며 답했다.
“보통은 요정의 숲 앞에서 원하지 않는 인간들이 나타나면 이걸로 재운 다음 먼 곳으로 데려가죠. 그렇게 출입을 통제해요. 그리고 레리쿼스는 절대 요정의 숲 밖으로 나올 수 없습니다.”
꽃잎에 살짝 마력을 불어넣은 칸이 초조해하는 루드바하를 보며 이어 말했다.
“저도 상단을 운영할 때 이 꽃을 불면증약으로 쓰려 몇 번 요정들에게 말해보았지만 레리쿼스는 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죠.”
칸의 말에 루드바하가 레리쿼스 꽃잎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어째서입니까.”
“레리쿼스는 요정 숲의 땅이 아니면 한 시간도 살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칸의 말에 루드바하의 시선이 작게 빛났다.
“그런데 이건 하룻밤이 넘게 살아 있군요.”
루드바하의 말을 듣고 칸이 고개를 끄덕인 순간 꽃잎이 부르르 떨며 미약한 힘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칸과 루드바하의 시선이 밝게 빛났다.
“이건 아마 요정들이 일부러 아한의 손에 들어가게 한 것 같습니다. 그들의 흙과 함께 말입니다. 더불어…….”
순간 루드바하의 손에서 뻗어나간 금빛의 신력이 레리쿼스에 닿자 꽃이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 앞에 뻥 뚫린 공간이 나타났다. 그건 세츠와 베이라들이 흔히 말하는 텔레포트 길이었다.
“르베나와 아한을 재워 그들의 공간에 데려간 거 같군요.”
몇 년 만에 열린 요정의 숲으로 통하는 길을 보며 칸이 깊은 안도와 설렘이 뒤섞인 눈으로 말했다. 동시에 루드바하의 심장도 르베나와 그들의 아기들이 있을 그곳을 향해 세차게 박동하기 시작했다.
* * *
“그만해, 아를.”
호안 왕자의 멋쩍은 미소를 본 르베나가 아를을 보며 경고했다. 하지만 아를은 여전히 르베나의 존재를 믿지 못한다는 듯 말했다.
“너희들이야말로 그만해. 요정들의 장난이라면 이제 치가 떨리니까.”
그 순간이었다. 르베나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검붉은 색의 마력이 아를의 볼을 가볍게 두드린 건. 동시에 아를의 놀란 시선이 르베나를 향한 건.
“이런 시간 아까우니까 그만해, 아를. 오랜만에 보는 거잖아.”
그리고 르베나가 아를에게 말을 한 순간, 꽝! 소리와 함께 아를이 벌떡 일어서면서 그의 의자가 바닥에 사정없이 나뒹굴었다.
그와 동시에 성큼성큼 걸어온 아를이 르베나의 앞에 섰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정말 너야?”
그의 음성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정말 나야. 나눠 가진 마석이 깨져서 걱정했고 어쩌다 보니 여기였어.”
르베나가 웃으며 답했다. 이에 아를의 떨리는 시선이 흔들림 없는 르베나의 시선을 향하다가는 긴 손가락을 천천히 르베나의 손끝에 갖다 댔다.
그 순간 르베나의 몸에서 빠져나온 마력이 아를에게 흘러들어 자잘한 상처가 가득한 그의 손을 치료해주었다. 언제나와 같이.
따뜻하고 강인하고 흔들림 없는 힘. 그리워했고 그래서 믿기 힘든 르베나의 힘이 자신의 상처를 치료하는 모습을 아를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와락……!
그리고 르베나가 놀라지 않게 그녀를 안았다. 르베나 역시 그런 아를을 두 팔로 감싸 안았다.
“르베나.”
아를이 그녀를 불렀다.
“그래, 아를.”
그리고 들려온 르베나의 대답에 아를이 그녀를 조금 더 꽉 껴안은 순간.
“아기들이 답답하데! 이 남자 누군데 막 엄마를 안는 거냐는데!”
투오란이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으며 화가 난 듯 소리쳤다. 동시에 아를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부쩍 불러온 르베나의 배를 향했고 르베나는 조금 놀란 듯 투오란을 바라보았다.
이에 투오란이 르베나를 보며 소리쳤다.
“아빠가 절대 다른 남자는 엄마 곁에 못 오게 하라고 했데! 라고 남자아이가 꼭 전해달래.”
그 말에 르베나가 더욱 놀란 눈을 떴지만 투오란은 이번에는 아를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함부로 안고 그러지 마! 르베나 님만 있는 게 아니라 그 안에 너무 예쁘고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여자아이도 있단 말이야!”
투오란의 말에 아를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린 순간이었다.
“투오란, 앞뒤 잘라먹고 그렇게만 말하면 다들 놀라시잖아.”
이제까지 그들의 앞에 앉아있던 가짜 아를이 긴 은발에 투오란과 똑 닮은 신비스러운 녹안을 가진 여성으로 변했다. 곧 그 여성이 르베나를 보고 아름답게 웃으며 말했다.
“간혹 요정 아이들은 배 속 태아들과 대화를 할 수 있어요. 저희 마을엔 오랫동안 새 생명이 없어 몰랐는데 투오란이 그 능력을 가졌나 봐요.”
르베나를 보고 얘기하던 여성이 아차 싶은 얼굴로 곧바로 덧붙였다.
“아, 저는 투오란의 누나이자 요정 마을의 지도자, 아르샬라 님의 딸 랠리아나예요. 모두들 절 랠리라고 불러요. 그리고 제가 여러분을 초대한 방식이 인간 입장에서는 불쾌한 줄 몰랐어요. 요정들은 장난으로 그렇게 초대를 하기도 하거든요. 진심으로 사과드려요.”
랠리는 진심으로 사과를 전한 후 여전히 놀란 얼굴로 자신의 배를 한번, 투오란을 한번 바라보는 르베나를 향해 웃고는 아를을 향해 말했다.
“르베나 님이 임신 중이신 거 알고 있지? 그런데 그렇게 갑자기 힘주어 안으며 아기들이 놀라잖아. 반가운 마음은 알겠지만 조심히 대해야 해, 임산부는. 물론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자신의 초대 방식이 생각났는지 민망한 표정을 한 랠리의 충고에 아를의 혼란스러운 시선이 르베나와 그녀의 배를 향했다.
그리고 아한과 호안마저 갑자기 아름다운 요정으로 변한 아를, 아니 랠리를 보고 놀란 그때였다. 랠리가 모두를 향해 환히 웃으며 말했다.
“요정의 숲에 오신 걸 진심으로 환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