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Ep 1. 요정의 숲
(4) 너 누구야
“대륙에서는 볼 수 없는 희귀한 색상의 꽃들이 정말 많단다. 거기에다 반짝이는 별 가루가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지.”
“아, 그들이 여기저기 뿌리는 가루가 별처럼 아름다워 별 가루라고 부르는데 사실 약간의 환각효과가 있어 인간들을 쫓기 위해 뿌리는 거란다. 레리쿼스의 꽃에서 추출한 거라고 하더구나. 그리고 요정들의 외모도 하나같이 아름답지. 물론 그들은 아름다운 걸 좋아하기도 해.”
“이렇게 얘기하다 보니 꼭 보여 주고 싶구나. 갑자기 나를 거부하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기회가 되면 꼭 같이 가 보자, 르베나. 그때는 쌍둥이들도 데리고 말이다.”
칸의 바람이 이렇게 빨리 이루어질지 르베나는 미처 몰랐다. 동시에 르베나는 지금 그의 이야기에 하나의 거짓도 없었음을 확인하고 있었다. 아를을 따라 걸어 들어가는 동안 몇 번이나 꿈을 꾸는 게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르베나뿐만 아니라 아한과 호안 왕자 모두 정신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구경에 빠져있는 걸 보면 모두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때 아를의 다리가 드디어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한눈에 보이는 여러 요정들의 모습에 세 사람 모두 놀란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크기가……!”
먼저 아한이 놀라 묻자 호안 왕자가 그의 말을 받아 감탄했다.
“아니 어째서 크기가……!!”
르베나 역시 그들의 말에 동의하며 아를을 바라보자 그가 씩 웃으며 말했다.
“입구의 요정들은 그들이 만들어 낸 거야. 실제 요정들은 사실 우리랑 크기가 비슷해.”
아를은 분명 그들과 같은 인간인데 요정에 대해 설명하니 뭔가 기분이 묘했다. 하지만 르베나와 아한, 호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따라 마을로 더 들어섰다. 아름드리나무와 그 나무로 지은 크고 작은 집들이 끝없이 펼쳐진 마을에는 넋이 나갈 만큼 아름다운 요정들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하늘거리는 옷을 입고 있었고 입구로 들어서는 아를과 일행을 환영하듯 미소지었다. 이윽고 아를이 좀 더 깊이 들어서자 한 요정이 나와 반갑게 인사하며말했다.
“환영해요, 르베나 님, 아한 님. 그리고 호안 님.”
어떻게 그들의 이름을 알고 있는지. 순간 당황스러웠지만 세 사람 모두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나무로 만든 테이블에 앉아 차를 대접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뭔가에 홀린 듯한 기분이 이런 걸까? 르베나는 그 기분이 썩 좋지 않아 몸 안에 살짝 마력을 흘리며 아를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된 거야?. 한동안 연락도 없고 마석도 깨지고.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르베나의 물음이 제법 매서웠음에도 아를은 보기 드문 편안한 얼굴로 말했다.
“아 사정이 좀 있었어.”
짤막한 그의 답변에 르베나가 말없이 아를을 바라보았다. 그 어색한 분위기를 못 이긴 아한이 아를을 타박하기 시작했다.
“누나랑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고작 그게 답이야? 그리고 초대라니? 레리쿼스에 그런 능력이 있다는 말은 못 들었다고!”
말을 하다 보니 열 받는지 아한의 언성이 그답지 않게 높아졌다.
“그리고 누나 지금 임신 중이야. 문제라도 생겼으면 어쩔 뻔했어! 형답지 않게 왜 이렇게 자기 멋대로야?”
아한이 아를에게 화내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모습에 르베나마저 조금 놀란 표정으로 아한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를은 달랐다.
“일단 레리쿼스는 요정들의 전유물이라 조금 애쓰면 초대도 가능해. 그리고 안전하다는 보장이 있으니까 데려온 거야. 그러니까 너무 흥분하지 마, 아한.”
태평하기 그지없는 아를의 답변에 당황한 아한이 입을 뻐끔거렸다. 놀라기는 르베나도 매한가지였다. 아를이 이렇게 길게 말하는 건 처음 들었다. 그리고 하나하나 조목조목 따져서 얘기하는 것도, 심지어 그답지 않은 초대 방식마저 모두 조금 생소하게 느껴졌다.
그 순간 테이블 위로 차가운 적막이 흘렀다. 오랜만에 아를을 만난 건데도 기쁨에 앞서 드는 이상한 감각이 불쾌했기 때문에. 르베나는 이를 떨쳐내려 앞에 있는 음료 잔을 들었다.
하지만 딴생각에 젖어 있어서였는지 그녀답지 않게 잔을 놓쳤고 쨍그랑! 소리와 함께 유리잔은 깨져 버렸다.
“……!”
그리고 깨진 파편이 르베나의 손을 휙 긋고 떨어지고 말았다. 투두둑. 그 바람에 손가락에서 흘러내리는 르베나의 피를 보고 아한과 호안이 놀라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그보다 느리게 아를이 천천히 흰 천을 내밀며 말했다.
“괜찮아? 일단 이걸로 닦아.”
태연하기 그지없는 그의 태도에 아한의 눈이 차갑게 변해 가기 시작했다.
* * *
“켄느와 자칸, 마를한에도 폐하의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급히 전보를 들고 온 다한의 보고에 루드바하와 제노스, 칸과 후벤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럼 도대체 어디 있다는 거야!”
쾅. 그 순간 루드바하가 내려친 힘에 앞에 있던 테이블이 힘없이 부서지고 말았다. 루드바하의 그런 모습을 처음 본 모두는 속으로 굉장히 놀랐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모른 척하기로 했다.
쌍둥이를 가진 아내가, 그것도 최강의 베이라인 그의 아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게다가 유파시드인 그가 그녀의 흔적조차 찾지 못하는 상황. 여기 있는 모두가 그와 같은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켄느와 마법 학교에서는 별다른 소식이 없나?”
힘겹게 침착함을 새긴 칸의 말에 다한이 고개를 저었다.
“그쪽도 지금 호안 왕자님과 아한 님을 찾느라 난리가 난 모양입니다. 하지만 이렇다 할……!”
“…아한, 언니!”
그 순간이었다. 다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디오니스의 접견실 문이 벌컥 열린 건.
그리고 머리가 잔뜩 헝클어진 스릴이 눈물도 닦지 못한 얼굴로 들어선 건.
“스릴 공주님?”
그녀의 모습에 놀란 후벤이 스릴을 불렀지만 그녀의 귀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언니랑 아한이 사라졌다니요! 흔적도 없다니요!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아흑…….”
부들부들 온몸을 떠는 스릴의 모습은 큰 충격에 잠긴 것 같았다. 이에 다한이 즉시 스릴을 부축하며 푹신한 소파에 조심스레 앉혔다.
하지만 그도 선뜻 위로의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디오니스의 왕인 르베나, 켄느의 왕자이자 곧 루드바하의 뒤를 이어 유파시드가 될 호안. 그리고 마법 학교에서 가장 유능한 교수인 아한. 이 세 사람이 몇 시간 만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일로 지금 온 대륙이 뒤집혔기 때문이다.
“모든 왕국과 제국이 움직여도 흔적조차 찾지 못한다니”
스릴의 외침에 칸과 제노스마저 실의에 빠져 수척해진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리고 그 순간 접견실의 문이 또 한 번 열리며 사나가 들어섰다. 그녀 역시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손에 든 무언가를 내밀며 다급하게 말했다.
“후원을 둘러보다 이 꽃을 발견했는데 뭔가 이상해요. 처음엔 아한 님이 새벽에 심어 놓은 건가 했는데 보세요.”
사나가 톡, 노란 꽃봉오리를 건드리자 그 순간 꽃이 저항하듯 봉오리를 흔들어 댔다. 이에 모든 사람이 조금 놀란 눈으로 그걸 바라보았고,
오직 한 사람, 칸만이 깜짝 놀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리쿼스!”
곧 그의 얼굴이 어둠 속 작은 빛을 발견한 사람처럼 환해지기 시작했다.
“뭘 그렇게 노려봐. 오랜만에 만나서.”
아한의 눈을 보고 민망하다는 듯 웃어 보인 아를이 곧 그들의 재회를 위해 잠시 자리를 비켰던 요정 하나를 불렀다.
“투오란, 지혈제랑 약 좀 가져다줄래.”
아를의 말에 곧 요정 하나가 들어왔다. 빛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믿을 만큼 반짝이는 은빛의 머리카락에 투명하리만치 아름다운 연두색의 눈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싱그러움을 한데 담은 듯 보였다. 아직 어린아이로 보임에도 침착하고 차분한 분위기마저 더 시선이 가게 만드는 아이.
“손 좀 주세요.”
아이답지 않은 차분한 말투가 귀여워 르베나가 가만히 다친 손을 주었다. 그러자 아이가 하나의 막힘도 없이 르베나의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바르고 녹색의 잎사귀 같은 것을 감아주었다.
“마력으로 바로 낫게 할 수 있겠지만 가벼운 상처는 저절로 낫게 두세요. 그래야 면역력이 생겨서 아기들한테도 도움이 돼요.”
예상치 못한 아이의 말에 르베나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 역시 신비스러운 눈으로 르베나를 한번, 조금 부른 배를 한번 보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레이풀로 만든 빵이 있는데 드셔 보실래요?”
그레이풀이 요정들의 열매인 만큼 그들은 그걸로 더 다양한 음식을 해 먹는다는 얘기를 칸에게 듣긴 했다. 최근 입맛이 없긴 했지만 어린 요정의 성의를 무시하기는 싫어 르베나는 작은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이가 주변이 밝아질 만큼 환하게 웃으며 곧장 뛰어나갔다.
“귀엽네, 이름이 투오란이야?”
아이가 나간 자리를 보고 작게 웃으며 전한 르베나의 물음에 아를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응. 진짜 귀엽지?”
그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주변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은 건.
동시에 아한과 호안의 손에서 각자의 마력과 신력이 매섭게 튀어나오고 르베나의 시선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를 본 아를이 그들에게 물었다.
“뭐 하는 짓이야?”
하지만 아한과 호안은 흔들리지 않고 르베나의 양옆을 지키듯 서 그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아를을 바라보던 르베나 역시 그를 한참 바라보다 아이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자 방문을 마력으로 틀어막았다. 그리고 당황해하는 아를을 보며 말했다.
“아를은 말을 거칠게 하지만 배려가 있어. 그는 기사거든.”
르베나의 말에 아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르베나는 그런 아를을 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안전이 보장되어 있다고 해도 상대방이 불쾌하거나 불안해할 만한 일을 하지는 않는다는 거야. 나랑 아한을 말도 없이 갑자기 이곳으로 데려올 만큼 충동적이지도 않고.”
아한의 손에서 뻗어나온 마력이 아를의 지척까지 다가갔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에는 사과가 먼저인 사람이지. 너처럼 요정들의 꽃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하는 인간이기도 하고.”
르베나의 말에 아를의 표정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이를 확인한 아한이 이어 말했다.
“그리고 르베나 누나가 다치면 누구보다 빠르게 반응하고 누나보다 더 아파할 사람이 형이야. 누나의 임신 얘기에 누구보다 크게 축하부터 할 사람이기도 해. 무엇보다 형은…….”
아한이 떨리는 시선으로 방금 나간 투오란을 떠올리며 말했다.
“어떻게 웃어도 차가워 보여. 그렇게 예쁘게 웃는 사람이 아니라고!!!”
그 순간 아한과 호안의 힘이 아를의 몸을 구속했다. 동시에 르베나가 그를 보며 물었다.
“그러니 묻지. 넌 누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