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258화 (258/276)

외전 Ep 1. 요정의 숲

(3) 요정의 숲

“르베나 일어나.”

“여긴 위험해. 어서.”

“르베나, 르베나”

윙윙- 들려오는 목소리에 르베나가 그를 불렀다.

“아를?”

하지만 그는 자신의 말만 계속했다.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그만큼 불안했고 초조했다.

“일어나, 빨리 르베나 어서!”

“누나, 일어나. 누나!!”

한순간 아를의 목소리가 아한으로 바뀌었다. 그 소리에 르베나는 번쩍 눈을 떴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자신의 배를 가리며 마력으로 온몸을 보호했다. 하지만 주위는 놀랄 만큼 조용했고 가끔씩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와 바람에 몸을 비벼대는 나뭇가지 소리만이 가득했다.

“…후원이 아니네.”

한껏 가라앉은 르베나의 목소리에 아한 역시 자신과 르베나를 한 번 더 마력으로 두르고는 말했다.

“안 일어나서 무슨 일 생긴 줄 알고 놀랐어. 그리고 여긴 디오니스도 아니야, 누나.”

아한의 말에 르베나가 가만히 마력을 배에 집중했다. 움직임은 없지만 아기들은 잠이 든 듯 무사했다. 이에 안도의 숨을 내어 쉰 르베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처음 본 광경에 넋을 잃었다.

반짝이는 빛으로 가득 찬 숲. 그곳은 그냥 숲이 아니었다. 누군가 마력이나 신력 그도 아니면 어떤 굉장한 힘을 빌려 아름다운 빛들을 모두 가져다 놓은 곳 같았다. 모든 식물과 꽃들이 환상적인 색으로 물들어 발광했고 이를 비추는 달빛은 조금 전 후원의 것보다 훨씬 밝고, 크고, 아름다웠다.

모든 것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대변하는 듯했고 코끝에 닿는 냄새조차 달콤하고 향기로운 곳.

“레리쿼스를 맡다가 잠들었더니 다른 곳이라.”

그럼에도 르베나는 그 풍경 안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녀에겐 보호해야 할 아기들이 있었고 한 나라의 왕으로서 안전하지 않은 곳에선 절대 안심할 수 없었기에.

그런 르베나의 예민함을 느낀 아한이 서둘러 말을 보태었다.

“깨어나 보니 이곳이었어. 레리쿼스에 순간이동 능력은 없는데 도대체 무슨 일인지. 그것보다 아기들은 괜찮아?”

서둘러 르베나의 상태를 살피며 묻는 아한의 질문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잠든 것 같아. 괜찮아. 하지만… 여긴 진짜 뭐지?”

르베나가 끝없이 펼쳐진 숲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결심한 듯 아한에게 말했다.

“일단은 돌아가자. 나중에 알아봐도 늦지 않으니.”

하지만 르베나의 말에 아한이 조금 곤란한 듯한 얼굴을 하며 선뜻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이상함을 느낀 르베나가 마력을 끌어올리고 순간이동 마법을 그리며 디오니스를 생각했다.

하지만 잠시 후 그녀와 아한은 여전히 숲속이었다. 르베나가 다시 한번 그리고 두 번, 세 번 순간이동을 시도했지만 그들의 몸은 이동하지 않았다. 그렇게 당혹감을 느낄 때쯤.

“누나보다 먼저 일어나서 몇 번이나 해 봤는데 안 돼. 다른 마법은 다 되는데 순간이동만.”

아한의 말에 잠시 아연함을 느낀 르베나가 차가워진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특별히 느껴지는 위협도, 힘도 없었다. 이에 잠시 생각을 거듭한 르베나가 말했다.

“일단은 여길 좀 벗어나 보자. 가다 보면 뭐라도 있겠지.”

르베나의 의견에 아한도 동의하는지 곧바로 르베나의 앞에 서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날카롭거나 위험한 가시나 덩굴을 모두 마력으로 잘라가며 아한이 걷는 덕분에 르베나는 조금 편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안 그래도 배가 나와 몸이 불편했기에 아한의 배려가 더 고마웠다. 순간 언제나 보호해 줘야 했던 아한이 자신 앞에 길을 내는 지금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그렇게 얼마나 걸음을 옮겼을까? 둘의 걸음이 일시에 멈추었다.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며 아한이 멍한 입을 열었다.

“우리 같이 꿈을 꾸는 걸까, 누나?”

르베나가 아한의 생각에 잠시 공감했지만 배 속의 아기들을 느끼며 꿈이 아님을 확신했다.

그리고 앞을 바라보며 칸의 말을 떠올렸다.

“그곳은 허락받아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란다. 누구든 그들의 허락 없이는 그곳을 볼 수고 느낄 수도 없지. 작은 요정들이 그들의 빛을 뿌리며 춤을 추는 곳. 요정 숲의 입구는 말이다.”

“이곳이구나… 요정의 숲.”

드래곤이 떠난 후 칸의 발길마저 거절하고 그대로 숨어 버린 요정의 숲. 지금 그곳이 르베나와 아한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 * *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전하와 아한이 사라졌다니!!”

예의도 잊고 쾅!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선 칸의 모습을 본 메이슨 공작이 어두운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말 그대로입니다. 밤새 전하와 아한 군이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시녀들의 말에 의하면 늦은 밤 후원에서 두 분을 보았다는데. 그 뒤로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의 말에 사색이 된 칸이 제노스를 보았다. 왕위를 르베나에게 물려주고 가르침을 주는 기간. 누구보다 곧 태어날 증손자들을 기다리던 그의 얼굴도 창백하긴 매한가지였다. 곧 칸이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메이슨 공작이 그의 의도를 알아채고는 말했다.

“루드바하 님께선 생각나는 곳마다 텔레포트로 이동해 두 분을 찾고 계십니다.

하지만 벌써 몇 시간째 전하의 마력조차 감지가 안 되고 있으니. 홀몸도 아니신데……!”

메이슨 공작의 말을 들으니 칸은 자신의 피가 모두 차갑게 식어버리는 기분이었다. ‘보토니에’가 사라졌어도 르베나를 노리는 이들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모두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르베나가, 디오니스의 왕인 그녀가, 아이를 가진 그녀가 본인의 궁 후원에서 자취를 감추었다니.

곧 칸이 제노스를 보며 말했다.

“곧장 아네벨 상회와 젠 그리고 각국에도 협조 요청을 하겠습니다. 어떻게든 찾아낼 겁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나이든 자신을 먼저 챙기는 칸의 배려에 제노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동안 나는 르베나의 일을 대신 맡고 있겠네. 그러니 꼭 찾게.”

제노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칸의 모습은 그대로 사라졌다.

그리고 디오니스 국경 밖의 시장.

“르베나!”

크게 소리치며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루드바하 때문에 주변의 사람들이 놀라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은 그의 눈은 서둘러 주변을 살피기에 바빴다.

종종 시찰을 나온 르베나가 즐거워하던 곳. 아기들을 위한 작은 장신구를 사던 곳. 하지만 이곳의 어디를 둘러보아도, 눈을 감고 집중을 해 보아도 르베나의 마력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불안했다. 초조하고 두려웠다. 사실 그의 기감을 디오니스 전역으로 확대해도 그녀의 마력이 느껴지지 않아서. 정말로 그녀가 사라졌을까 봐.

“…하!”

그답지 않게 신경질적인 한숨을 내쉰 루드바하가 다시 텔레포트로 이동하며 생각했다.

늦은 밤 갑자기 찾아온 호안 왕자와 한참을 얘기하다 들어간 침실에 르베나는 없었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으면 서재에서 책을 보거나 후원을 산책하는 그녀임을 알기에 루드바하는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서재에도, 후원에도, 그리고 궁 내에도 그녀의 마력이 느껴지지 않았을 때.

그때의 스산했던 감정은 이제 폭발하듯 그 몸집을 크게 부풀리고 있었다.

“르베나!”

그리고 또다시 이동한 그곳, 눈 앞에 펼쳐진 그들의 프러포즈 장소에도 그녀는 없었다. 언젠가 함께 갔던 바다에도, 젠의 분수대에도, 유파시드의 후원에도. 그들이 함께 다녔던 모든 곳을 수십, 수백 번 뒤져 보아도 그녀는 없었다.

털썩.

“폐하!”

젠의 후원을 수 번째 다시 왔다가 그만 휘청거리는 루드바하를 발견한 유안이 서둘러 그를 부축했다. 단시간에 수백 번의 텔레포트를 했으니 몸이 지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유안은 그보다 더 놀란 눈으로 그의 황제를 보았다.

“르베나… 르베나.”

정확히는 불안과 공포 그리고 더없는 두려움에 잠식된 황제의 눈을.

“그냥 들어가면 되는 건가?”

분명 르베나와 아한이 등장했음에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즐겁게 별 가루를 뿌리며 춤을 추는 작은 요정들을 보며 아한이 물었다. 마침 그와 같은 생각을 하던 르베나가 조금 소리 높여 말했다.

“아무래도 이제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나오시죠?”

갑작스러운 르베나의 말에 놀랄만도 한건만 아한은 마치 누가 있다는 걸 아는 사람처럼 그저 미소지을 뿐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나오는 게 없자 르베나가 한번 더 소리 높여 말했다.

“지금 안 나오면 버려두고 가겠습니다. 요정의 숲은 허락된 자들에게만 열리는 곳이니 저희가 나올 때까지 혼자 거기 있겠다면 말리진 않을게요.”

제법 단호함이 묻어나오는 르베나의 말이 끝났을 때였다. 부스럭 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모습을 나타낸 건. 하지만 르베나도 아한도 이미 그가 누구인지 아는 것처럼 따로 뒤돌아 그를 확인하지 않았다.

“그럼 들어가죠.”

르베나의 말을 선두로 아한과 뒤를 따르는 한 사람은 요정들이 춤을 추고 있는 입구로 다가갔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요정들이 투명한 날개를 팔락거리며 춤을 추는 모습은 아름답기도 했고 귀엽기도 했다.

르베나마저 그만 상황을 잊고 호기심을 담은 눈으로 그들을 살펴볼 정도로. 그리고 어느새 요정들의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보일 정도로 다가갔을 때 그들을 마중 나온 누군가가 보였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몇 년 만에 들어도 어제 들은 것처럼 익숙한 목소리. 그럼에도 실제로 듣는 건 너무 오랜만이라 르베나도 아한도. 그의 존재에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쉬이 숨기지 못하게 만드는 사람.

“…걱정했잖아.”

르베나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

“아를.”

그리고 르베나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조금 수척해진 그, 아를이 성큼성큼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아주 작게 웃으며 말했다.

“초대한 거야, 르베나.”

곧 마주한 세 사람의 얼굴에 눈물 어린 미소가 번져갔다.

루드바하와의 만남을 뒤로하고 잠시 후원에 들렀다 휘말린 상황에 당황하고 있는 그, 호안 왕자만 제외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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