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257화 (257/276)

외전 Ep 1. 요정의 숲

(2) 레리쿼스의 유혹

“공작님, 이번 아네벨 상회 무역 거래장부입니다. 지금 보시겠습니까?”

드넓은 집무실 안. 두꺼운 장부를 선뜻 건네는 이를 보며 디오니스의 벨모린 공작으로 돌아온 칸이 말했다.

“나중에 보도록 하지. 그거보다 정말 룩센 공작가를 잇지 않을 생각인 건가, 라피엘?”

칸의 질문에 루안이라는 이름을 버린 라피엘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버님께서 많이 괴롭히시나 보네요.”

조금 짓궂은 미소가 어린 라피엘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칸이 피곤하다는 듯 말했다.

“아주 많이. 너에게 직접적으로 말을 못 하니 나에게 난리를 치는구나.”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막역한 사이가 된 아버지 룩센 공작과 칸을 떠올린 라피엘이 애써 미소를 감추고는 말했다.

“공작님하고 어릴 때부터 많은 곳을 다녀서인지 가만히 앉아 업무를 배우는 건 못 하겠어요. 전 이대로 아네벨을 관리하다 공작님께 전부 넘겨받을 생각인걸요.”

포부가 넘치는 라피엘의 말에 칸이 아주 잠깐 놀라 하다가는 시원하게 웃어 보였다.

“하하. 네 말을 들으니 거기에 내 책임이 없진 않구나. 그래, 지금처럼만 잘하면 아네벨은 너에게 넘길 테니 열심히 해주렴. 나도 그걸 생각하며 룩센 공작 그 친구의 괴롭힘을 좀 더 참아봐야겠구나.”

칸이 르베나의 곁에 서기 위해 준비해왔던 아네벨 상회. 그런 걸 자신에게 선뜻 넘겨 주겠다 말하는 칸과 그런 자신을 존중하면서도 옆에 두고 싶어 하는 룩센 공작의 마음이 따뜻해 라피엘은 잠시 웃어 보였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노크를 하며 소식을 전한 건.

“공작님,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칸의 하나뿐인 딸이자 디오니스의 왕이 방문했다는 소식에 칸과 라피엘은 기쁜 미소로 서둘러 방을 나섰다.

“저를 부르시지 않고요, 폐하.”

르베나만을 위한 접객실로 따로 마련해 둔 방으로 들어서며 칸이 말했다. 말을 하는 도중에도 그의 얼굴에는 좀처럼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그런 칸의 말에 잠시 민망한 미소를 지어 보인 르베나가 앞에 놓인 그레이풀 라떼를 내려 놓으며 말했다.

“우리끼리 있을 땐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벨모린 공작님.”

그의 호칭을 딱딱하게 부르는 르베나의 말에 칸이 작게 웃고는 라피엘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장난 좀 쳐 보았단다. 그것보다 나를 부르란 소리는 진짜였는데.

몸도 무거운데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을 것 같아서 말이다.”

한결 편해진 칸의 말투에 르베나가 느긋하게 소파에 몸을 묻으며 말했다.

“좀 급한 일이라 그럴 여유가 없었어요.”

들려온 르베나의 말에 칸과 라피엘이 놀라 벌떡 일어나더니 걱정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혹시 어디가 아픈 거니? 아니면 아기들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야?”

“의사를 부를까요? 아니 바로 궁으로 모실까요?”

저마다 호들갑을 피우는 이들을 본 르베나가 작게 한숨을 내어 쉬며 유난히 입맛에 맞는

그레이풀 라떼를 홀짝이자 그 옆에 있던 아한이 대신해 말을 전했다.

“아기들은 모두 건강하니 걱정 마세요.”

곧 문을 열어젖히려던 칸과 라피엘이 아한의 말에 문득 동작을 멈추었다. 그리고 민망한 얼굴로 다시 자리에 앉자 아한이 르베나를 한 번 바라본 후 용건을 꺼냈다.

“조금 전, 누나가 아를 형과 나눠 가진 마석이 진동하다 깨졌어요.”

이어진 아한의 말을 듣고 다시 한번 놀란 칸과 라피엘이 르베나를 보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아무래도 지나치게 큰 힘이 작용한 거 같은데 불안해요. 혹시 저번에 부탁드린 이후로 아를의 행방은 여전히 소식이 없나요?”

르베나의 말에 순간 얼굴이 어두워진 칸이 답했다.

“거기서 마지막으로 보았다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이후로는 우리 쪽 사람들도 쉽게 찾지 못하는구나. 아를 경이 너에게 연락을 할 정도면 꽤나 위험하다는 걸 텐데. 큰일이군.”

칸의 말을 들은 라피엘이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 자리에서 급히 일어나며 말했다.

“아무래도 젠 쪽에도 다시 한번 물어봐야겠어요. 룩센 공작가를 통해 다른 쪽도 알아보라 일러뒀거든요.”

말을 마친 라피엘이 르베나와 칸에게 양해를 구한 후 서둘러 사라졌다. 그리고 남은 세 사람이 잠시의 적막에 젖어 들었다.

그렇게 얼마쯤 말을 아꼈을까. 아한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아를 형이니까. 어디서든 분명 무사할 거야, 누나.”

아한의 말에도 르베나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선뜻 감추지 못하자 칸 역시 부드러운 어조로 임신한 딸을 다독였다.

“우리 쪽에서도 열심히 알아보고 있으니 너무 걱정 마라. 내일 아침에 어떤 소식이든 반드시 전해 줄 테니. 오늘은 이만 궁으로 가서 쉬도록 하고.”

안 그래도 쌍둥이를 임신한 데다 도통 제대로 먹지를 못해 눈에 띄게 야윈 딸의 모습이 안쓰러운 칸이 아한을 보며 말했다.

“괜찮으면 전하를 궁으로 모셔 주겠나? 나는 아를 경의 행방에 대해 더 알아볼 테니.”

칸의 부탁에 아한 역시 걱정스러운 기색을 겨우 지워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저무는 해가 어두운 자신의 표정을 가려주어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 * *

“르베나 너무 걱정 마요. 아를 경은 강한 사람이니까. 그리고 칸님이나 젠에서 뭐라고 소식이 오면 제가 바로 갈게요.”

끊임없이 르베나를 달래는 루드바하의 얼굴엔 언제나와 같은 부드러운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그걸 보자 배 속의 아기들도 아빠를 알아본 듯 마구 발을 차기 시작했다. 그 느낌이 걱정스러운 순간에조차 사랑스러워 르베나는 루드바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루드. 그리고 당신도 오늘 호안 왕자님 설득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걱정 끼쳐 미안해요.”

잠시 호안 왕자의 얘기를 들으니 머리가 다시 아파 오는 것 같았지만 루드바하는 티 내지 않고 르베나의 옆에서 소리 내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젠에서 임산부를 진료하는 저명한 의사가 추천해 준 불면증에 좋은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효과가 있었던 걸까? 두꺼운 책의 초입을 채 지나기 전에 르베나의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조심스레 이불을 올려 덮어준 루드바하가 침대 옆 창으로 가 환한 달을 올려다보았다.

“어디 있는 겁니까, 아를 경.”

르베나에게는 미처 티 내지 못한 한 자락 걱정을 내비치면서.

“르베나.”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아직 죽고 싶지 않아.”

메아리처럼 울려오는 목소리. 애절하게 때로는 분노에 가득 찬 채로. 또 어떨 때는 힘겹게 들려오는 목소리. 익숙하고 그리운 그래서 절대 잊을 수 없는 목소리.

“…아를!”

르베나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벌떡 일어났다. 갑자기 일어난 탓인지 순간 배가 땡기는 느낌에 미간을 찌푸린 르베나가 배를 살살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놀라게 해서 미안.”

잠시 그렇게 있으니 마치 괜찮다는 것처럼 아기들의 태동이 작게 느껴졌다. 이에 안도의 한숨을 쉰 르베나가 조금 전 꿈을 떠올리며 가까스로 불길함을 떨쳐냈다. 그리고 문득 느껴지는 허전함에 옆을 보니 그곳에 잠들어 있어야 할 루드바하가 보이지 않았다.

“또 일하러 갔나 보네.”

최근 호안 왕자에게 유파시드의 자리를 넘기려는 루드바하의 노력과는 다르게 호안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낮에는 호안을 찾아 설득하고 밤에는 밀린 황제의 업무를 타국 디오니스에서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고 만 거다.

늦은 밤, 일을 하는 루드바하에게 간식을 가져다줄까 싶기도 했지만, 굳이 그의 집중을 깨트리기 싫어 르베나는 두꺼운 가운을 입고 밖으로 향했다.

르베나가 지내던 별궁을 두 사람을 위한 침실로 꾸민 탓에 익숙하게 1층으로 내려간 르베나는 망설임 없이 후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루드바하의 추진력으로 훨씬 커지고 아름다워진 후원 산책은 임신 후 부쩍 잠이 없어진 르베나의 소소한 일과 중 하나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좋으니?”

밖으로 나와 여러 나무와 꽃향기를 맡으니 꿈틀대는 아기들의 움직임에 어느새 르베나의 얼굴에도 부드러운 미소가 어렸다. 아기들이 좋아한다고 생각하니 밤새 이곳에 있고 싶다는 엉뚱한 생각과 함께.

그렇게 르베나는 환희 달 아래를 한동안 걸었다. 밤이 전해 주는 공기의 깨끗한 냄새가 폐부를 가득 채워주는 기분이 좋았다. 그러다 어느새 후원의 깊은 곳, 커다란 아름드리나무가 있는 곳에 도착했을 때 르베나는 그를 발견했다.

어느새 훌쩍 커버려 이젠 어리게만 볼 수 없는 이. 그럼에도 종종 르베나가 좋아하는 이곳에 와 밤새 특별한 선물을 놔두고 가는 이.

“오늘은 레리쿼스야?”

르베나의 목소리에 놀란 것도 잠시. 아한이 식물을 심느라 흙이 잔뜩 묻은 손을 털고는 일어났다. 그리고는 르베나와 샛노란 색의 아름다운 식물을 번갈아 보며 씨익 웃었다.

“들켰네. 얼른 심고 가려고 했는데.”

르베나의 불면증을 알고 아한은 종종 이렇게 밤에 와 예쁜 것들을 심어놓고는 젠의 마법학교로 돌아갔다. 피곤하니 그러지 말라고 몇 번을 얘기해도 고집이 센 그는 듣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샌가 르베나 역시 아한의 선물이 기다려지기도 했다. 늦은 밤의 산책 중 이곳을 들린 오늘처럼.

“레리쿼스는 요정의 숲에만 자라는 거 아니야?”

언젠가 칸에게 들은 식물의 특성을 떠올리며 르베나가 묻자 아한이 식물에 마력을 넣으며 말했다.

“응. 우연한 기회에 얻었어. 듣기로는 마력을 주면 성질이 변하면서 공기 중에 수면 성분을 뿌린데.”

우연이라고 하기엔 억만금을 주어도 구하지 못할 것이 바로 요정의 숲에서 나는 것들이다.

게다가 수면에 좋은 성분을 뿌린다니. 누가 봐도 르베나를 위해 아한이 고생해서 얻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 배려와 노력이 고마워 르베나가 가만히 아한의 곁에 섰다. 그리고 가만히 신비한 레리쿼스를 들여다보았다. 달이 떠오른 밤에만 만개하는 꽃. 요정의 숲에서는 온갖 달콤한 냄새들을 뿜어 그곳에 들어선 인간들을 유혹해 다른 곳으로 유인하는 꽃.

그 신비로운 꽃이 지금 달빛을 받아 만개하기 시작했다. 샛노란 꽃잎 가운데 아름다운 수술들은 여러 가지 색을 띠고 바람에 제 몸을 맡겼다. 그리고 그것이 뿜어 내는 향기는 몸이 가볍게 느껴질 만큼 부드럽고 상큼했다. 보기만 해도 황홀하리만치 아름다운 꽃.

“예쁘다, 아한.”

르베나가 짤막한 감상을 전하자 아한 역시 부드러운 미소로 르베나와 꽃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흣!”

순간 르베나가 이제까지와 다르게 거칠게 느껴지는 태동을 느낀 것이다. 그런 르베나를 본 아한이 놀라 그녀를 부축했다. 그리고 그 순간 더욱 크게 만개한 꽃에서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뿌려져 후원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뭐야, 이게!”

갑작스럽게 뿌려진 과하게 달콤한 향을 맡은 아한이 서둘러 꽃을 잡아챘다. 레리쿼스는 밤마다 만개해 요정의 숲을 지키기 위해 사람을 홀리는 향을 뿌려 댄다. 하지만 보름 이상 마력을 머금으면 그 성분이 수면제로 바뀐다고 했다.

아한은 안전하게 한 달간 마력을 주었고 이 꽃이 수면 성분을 뿜어 내는 것까지 확인하고 가져와 심었다. 하지만 이 달콤한 향은… 취할 만큼 달콤한 이 향은…….

“누나, 코 막아!!”

툭. 르베나에게 말을 전하던 아한이 그대로 쓰러졌다. 그리고 곧바로 코를 막으려던 르베나의 몸도 스르륵 아한의 옆에 충격도 없이 스러졌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두 사람의 모습은 디오니스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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