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Ep 1. 요정의 숲
(1) 불길한 진동
새벽의 어스름이 무르익은 시간. 모두가 조용히 잠든 시간조차 깨어 있는 한 사람이 깊은 고민에 빠진 듯 흔들의자에 몸을 맡겼다. 부드럽게 흔들리는 의자의 움직임에 따라 앞뒤로 오가는 몸의 진동이 이제는 제법 익숙했다. 그리고 그 순간에 맞춰 조심스럽게 그녀의 몸을 덮어오는 담요의 따스함도.
“오늘도 잠이 안 와요?”
어느덧 잠에서 깨어 옆에 자리한 루드바하의 얼굴을 보며 르베나가 작게 웃어 보였다.
“내가 못 자도 루드는 자라고 했잖아요.”
르베나의 말에 루드바하가 그녀의 몸을 조심스레 안아 긴 소파에 편히 누이고 자신은 그녀의 발치에 앉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르베나의 발을 주무르며 말했다.
“르베나가 옆에 없으면 잠이 안 와요. 그대 없이 잠든 그동안의 밤이 신기할 정도로.”
루드바하의 큰 손이 부드럽게 발을 주무르자 익숙한 편안함에 몸을 맡기며 르베나가 물었다.
“호안 왕자님은 여전한가요?”
르베나의 말에 루드바하가 작게 미소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통 받아들일 생각을 안 하네요. 벌써 3년이나 지났는데 말이에요.”
딱히 답이 없자 르베나가 잠들었는지 확인하던 루드바하의 시선이 그녀의 눈과 마주쳤다. 이에 루드바하가 자연스레 그녀의 발에 입 맞추자 조금 민망하다는 듯 웃어 보인 르베나가 다시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누구라도 갑자기 유파시드가 되라는 말을 들으면 그럴 거예요. 게다가 자신보다 더 강한 현재의 유파시드가 멀쩡히 살아 있잖아요.”
르베나가 잠시 루드바하를 흘겨보고는 이어 말했다.
“아내를 왕위에 올리기 위해 황제를 포기하는 남자가 있을 줄이야.”
르베나의 타박을 가볍게 모른 척한 루드바하가 그녀의 발을 지나 종아리를 주무르며 말했다.
조금 부은 르베나의 종아리가 괜히 안쓰러운 마음을 잠시 눌러놓은 채.
“르베나에게 청혼할 때 약속했잖아요. 그게 뭐든 그대가 포기할 일은 없을 거라고. 그리고 젠에는 변화가 필요해요.”
지나간 일들을 회상하듯 그의 입은 잠시 움직임을 멈췄지만 르베나의 다리를 주무르는 손만은 여전히 부지런했다.
“가장 강한 젠의 세츠. 그가 유파시드가 되고 젠의 황제가 되면 젠의 세츠들에겐 좋겠죠.”
천천히 종아리를 주무르는 루드바하의 손은 살짝 열감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나라의 세츠들은 보호받을 수 없어요. 계속해서 아사벨과 같은 희생양이 나올지 모르죠. 게다가 힘만으로 선출된 유파시드 중 파벤더처럼 오만한 자가 또 나오지 말란 법도 없고요.”
잠시 말을 쉬어가는 틈에 루드바하는 침대만큼 큰 소파에 자신도 몸을 누였다. 그리고 르베나를 품에 끌어안고는 그녀의 향긋한 체향을 맡으며 이어 말했다.
“나라에 제한을 두지 않고 모두를 살필 줄 아는 세츠. 강하지만 현명한 세츠. 이제는 그런 사람이 유파시드가 될 거예요. 이번에는 저의 지목이었지만 다음부턴 모두가 납득할 만한 선출 방법도 유안이 다른 이들과 함께 고민 중이고요.”
르베나가 자신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자 루드바하가 그녀의 머리에 얼굴을 깊숙이 묻으며 말했다. 도통 질리지 않는 르베나의 온기가 못 견디게 좋았다.
“무엇보다 난 사랑하는 르베나 왕 옆에서 열심히 외조하고 육아할 거라고요.”
루드바하의 말에 푸스스 웃은 르베나의 눈이 등 뒤에 닿아오는 그의 온기에 서서히 감겨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새 그녀의 숨소리가 쌔근쌔근 고르게 들려오자 루드바하가 그녀를 품에 더 깊이 끌어안았다.
팔 안 가득 느껴지는 그녀의 몸과 따뜻함. 그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이내 루드바하가 자신의 오른손으로 르베나의 배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조용히 속삭였다.
“내일부턴 조금 일찍 잠들어 주렴. 너희 노느라 엄마 힘들게 하지 말고.”
순간 그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느껴진 활기찬 움직임에 루드바하의 얼굴에 더없이 행복한 미소가 차올랐다.
* * *
“교수님, 저 이 마법해석이 너무 헷갈려요!”
“야, 너 그거 어제 풀었잖아. 교수님 전 이 마법의 역사가 너무 어려워요.”
“야, 비켜! 오늘 내 차례거든?”
초록의 잔디가 끝없이 펼쳐진 젠의 마법 학교 정원. 그곳에서 수많은 여학생들이 앞다투어 누군가의 앞을 가리고 섰다.
교수의 목소리를 듣고 그와 눈이라도 한번 마주치고 싶어 하는 수줍은 마음들이 정원을 스치는 바람만큼이나 살랑였다. 그리고 그들의 위로 훌쩍 보이는 깨끗하고 반듯한 얼굴에도 미약한 미소가 어렸다.
“뭐가 좋다고 웃고 난리야?”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의 얼굴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스릴이 미간을 한번 찌푸리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이러다 늦겠어요, 아한 교수님!”
불만으로 가득한 스릴의 목소리에 아차 싶었는지 아한이 서둘러 학생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아, 미안해요. 오늘 물어 본 건 모두 다음 수업 끝나고 보도록 하죠. 제가 일이 있어서.”
그 순간 아쉬워하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왔지만 아한은 긴 다리를 성큼성큼 움직여 스릴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자석에 이끌리듯 스릴의 눈은 그런 아한에게 떨어질 줄을 몰랐다.
대전쟁이 끝나고 어느새 3년. 어디에서도 절대 빠지지 않는 큰 키와 수려한 얼굴, 아벨디온과 틈틈이 함께하며 단단해진 몸, 거기다 최연소 마법 학교 교수 임명이라는 타이틀까지.
뭐 하나 빠지지 않는 아한의 인기가 좋은 건 당연했다. 그리고 그런 그를 자신의 마음에 담은 스릴의 짜증이 매일같이 반복되는 이유 또한.
“곧 언니 올 시간인데 뭐 하는 거야!”
어느새 다가온 아한을 보며 스릴이 신경질적으로 묻자 그가 웃으며 답했다.
“안 그래도 적당히 자르려고 했어. 그리고 스릴, 항상 말하지만 교수가 적성에 안 맞으면 빨리 그만둬. 너 짜증이 정말 많이 늘어난 것 같아.”
“…뭐?”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이렇게 짜증을 내는데. 왜 굳이 마법 학교 교수가 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는데!
아한의 말에 기가 막혀 어버버거리던 스릴이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래도 노력하는 너는 언제나 멋있어.”
그 순간 자신을 보며 미소 짓는 아한의 얼굴에 하늘까지 치솟던 짜증은 금방 자취를 감춰 버렸다.
아한은 언제나 이런 식이다. 자신을 질투에 눈먼 여자처럼 만들었다가도 간단한 말 한마디로 다시 웃게 만들어 버리는 사람.
“…하, 짜증 나.”
아한에게 들리지 않게 작게 중얼거린 스릴이 반대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오늘도 역시 짝사랑의 길은 고단하다 느끼며. 그럼에도 곁에서 느껴지는 아한의 존재감이 너무 커 스릴은 평소처럼 시원스러운 보폭으로 걷지도 못했다.
사실 이런 자신의 모습이 이제는 제법 익숙하기도 했다. 유안과 루안 공녀의 결혼식에서 느낀 설렘을 부정했던 것도 잠시, 어느새 스릴은 자신의 마음이 아한을 향하고 있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표현조차 할 수 없는 짝사랑은 생각보다 힘들고 아팠다. 게다가 상대방이 다른 사람을 보고 있다면 더욱.
하지만 스릴에게 포기는 없었다. 그런 건 죽은 다음에 떠올리는 거라고 르베나가 말했으니.
그래서 다시 한번 예쁜 미소를 만들고 미간의 찌푸림을 가까스로 풀어낸 스릴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이 이곳의 누구보다 수줍고 사랑스러워 보이길 바라며.
“학교 근처에 예쁜 카페가 생겼다던데 같이 가 볼래? …아한?”
순간 심장이 터지도록 느껴진 설렘이 무색하게도 대답 없는 아한을 향해 스릴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스릴의 녹안은 사정없이 떨리고 말았다. 그의 미소를 보았기 때문에.
몇 년 전 마를한의 정원, 주변의 만발한 장미보다 아름답고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요정을 떠오르게 했던 그때보다 훨씬 화사하고 아름다워진 미소를, 여전히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향하고 있는 그 미소를 말이다.
욱신. 스릴의 심장이 이제는 익숙해진 통증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누나!”
그와 동시에 멀리서 보이기 시작한 르베나를 발견하고 소리 높여 부른 아한의 목소리가 가득 들려왔다. 스릴은 이 순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빠르게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도. 더불어 르베나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리는 멍청한 제 얼굴의 미소도. 무엇보다 잠시나마 르베나를 질투한 자신의 마음이.
“호안 왕자님이 또 도망가셨다고요?”
놀란 스릴 공주의 물음에 루드바하가 조금 어색하게 웃었고 답변은 아한이 대신했다.
“나라고 해도 갑자기 젠의 황제가 되라고 하면 도망만 다닐 거야. 게다가 현 유파시드가 버젓이 살아 있는데.”
아한의 답변에 스릴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물었다.
“그렇지만 3년 동안 도망만 다니는 건 너무 한 거 아니야? 이미 켄느에서는 아사벨 공주님이 왕위를 이어받기로 했다면서. 호안 왕자님답지 않아.”
스릴 공주의 말에 모두가 호안을 떠올리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3년간 반복된 일에 더 이상의 신선한 반응은 없었다. 그렇게 모두가 아한의 연구실에서 잠깐의 티 타임을 가지던 중 루드바하가 르베나를 보며 말했다.
“르베나, 아무래도 호안 왕자님이 여기 어디 있는 거 같아요. 좀 살펴보고 올게요. 혼자 있을 수 있죠?”
최강의 베이라에게 혼자 있을 수 있냐니. 하지만 그의 질문을 비웃는 사람은 없었다. 르베나 역시 그런 그의 마음을 헤아리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루드바하는 아한과 스릴을 보며 유난스럽게 부탁했다.
“금방 다녀올 테니 르베나 좀 부탁할게.”
그의 말에 아한과 스릴이 선뜻 고개를 끄덕이자 루드바하가 곧바로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잠시의 적막이 지난 후 아한이 르베나의 배를 보며 말했다. 정확히 말하면 제법 슬림한 드레스 라인 아래로 볼록 나와 보이는 곳을 향해.
“이제 제법… 나왔네?”
아한의 목소리에 감도는 씁쓸함은 스릴만이 느낀걸까. 르베나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자신의 배에 가만히 손을 대고는 웃었다.
“응. 이제 6개월 정도라니까. 슬슬 눈에 띄게 나오네.”
하지만 르베나의 미소에는 전염력이라도 있는 건지, 아한은 언제 그랬냐는 듯 진심으로 행복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그 모습이 괜히 꼴 보기 싫어 고개를 돌린 스릴이 신경을 돌리려는 듯 서둘러 르베나를 향해 물었다.
“쌍둥이라고 해서 전 언니 배가 훨씬 더 나왔을 줄 알았어요.”
스릴의 말에 르베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답했다.
“원래는 조금 더 나와야 한다는데 내가 잘 못 먹어서 그런지 아기들이 작은가 봐.”
안 그래도 그 문제로 지금 칸과 제노스, 루시드와 그의 아내 아드리안까지. 티는 안 내지만 모두가 걱정을 하고 있었다.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임신한 르베나가 통 음식을 먹지 못하고 잠을 못 자기 때문에.
그러나 곧 아한이 르베나에게 편안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다독였다.
“아기들은 건강하다니까 너무 걱정 마. 그리고 나도 계속 공부하고 있어. 루드바하 님께서 제국이 떠들썩하도록 입덧은 다 해 놓고 왜 막상 누나가 먹지 못하는지 말이야.”
아주 조금 놀리는 의미가 깃든 아한의 말에 르베나가 기분 좋게 웃어 버리고 말았다. 아한의 말대로 루드바하는 르베나 대신 입덧을 아주 거하게 해 한때 제국의 의사들이 모두 난리가 났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소소한 웃음과 즐거운 대화가 오가는 사이 아한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리고 약간의 망설임 후 아한이 어렵게 르베나에게 물어왔다.
“아를 형은… 그 뒤로 연락 없는 거지?”
그 순간 손에 잡은 포크를 흠칫 멈춘 르베나가 아한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 속에 아한 자신보다 큰 걱정과 불안이 새겨져 있는 게 또렷하게 보았다.
“응. 드래곤을 만났다는 마지막 서신 이후 몇 개월째 연락이 없네. 하지만 아버지가 상단을 풀어 알아보고 계시니 곧 소식이 올 거야. 너무 걱정 마. 아한.”
분명 르베나가 잠을 못 이루는 이유 중 아를의 문제가 있을 텐데도 그녀는 여전히 주위 사람들의 걱정을 혼자만 짊어지려 한다. 그런 르베나가 안쓰럽고 여전히 좋은 아한의 눈이 복잡한 시선으로 르베나의 배를 향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위잉----위잉------ 아를하고 나누었던 보석이 제 몸을 간절하게 울려 댄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