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제4장. 르베이나 (74)
모두가 둘러앉은 응접실의 테이블은 지나치게 크지 않았다. 그 덕에 사람들은 서로의 미소를 조금 더 가까이에서 살필 수 있을 만한 거리에서 그동안 쌓인 담소를 주고받았다.
시종, 시녀들이 정성껏 준비한 각종 차와 가벼운 디저트들이 그들 사이의 미소를 더 달콤하게 만든 늦은 저녁 시간. 르베나의 시선 역시 깊은 온기를 담고 그곳의 모두에게로 향했다. 결혼식을 앞두고 자신을 찾아온 이들. 그들이 무엇을 위해 오늘 그녀를 찾은 건지 르베나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 이후 몇 개월의 시간이 지날 동안 누구도 묻지 않았던 것. 아마도 르베나가 먼저 얘기해주기를 지금조차 침묵으로 기다려주는 그녀의 사람들. 르베나는 오랫동안 혼자 간직한 그 이야기를 이제 더는 미룰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르베나의 붉은 입술이 열리는 순간, 응접실 모두의 시선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녀를 향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 한 번도 이 얘기를 하게 될 거라 생각한 적이 없어서. 그래서 조금 두서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천천히 얘기해 볼게요.”
르베나는 그렇게 짧은 서두를 마치고 자신만이 아는 시간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조곤조곤 시작된 이야기는 어린 시절의 학대가 이번 삶보다는 조금 더 심했었다는 시작 부분에서부터 살짝 떨려왔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손으로 온기를 전해 주는 루드바하 덕분에 르베나는 조금 더 자신 있게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르베나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누군가는 참지 못한 눈물에 얼굴을 온통 적셨고, 누군가는 이기지 못한 분노를 억누르듯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어느덧 흘러간 이야기가 끝내 모든 연합군 앞에 혼자가 된 르베나의 부분에 이를 때에는 그곳에 있던 모든 이가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그렇게 ‘다니아’를 통해 모습을 드러낸 드래곤이 제 소원을 들어주었고 거기까지가 기억의 전부예요. 물론 그 후에 루드가 저를 위해 노력한 건 저도 이번에 알게 되었어요.”
미약한 떨림으로 시작한 르베나의 이야기는 더없이 차분한 목소리로 끝을 고했다. 하지만 그녀가 이 모든 이야기를 차분하게 정돈해 말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얼마나 아프고 외로웠을지를 생각하니 모두는 선뜻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훌쩍이는 소리와 흐느끼는 울음의 어딘가, 르베나가 감정을 억누르듯 잘게 떨리는 루드바하의 손을 꼭 마주 잡으며 말했다.
“후회하지 말아요, 미안해하지 말아요. 그때의 난 어리석었고 그런 나를 위해 여기 있는 모두는 최선을 다해 줬어요. 그러니까. 너무 많이 울지 말아요.”
이 순간까지 모두에게 위로를 전하는 르베나의 말에 사나가 고개를 들었다. 너무 많이 울어 붉게 물든 그녀의 눈빛에서 끝까지 어린 르베나의 곁을 지키지 못한 미안함이 그대로 전해져 르베나는 살며시 웃어 보였다. 이어 후벤과 가스트, 아를과 다한의 죄책감 어린 시선에도 르베나는 미소 지었다.
하지만 힘겹게 입을 연 제노스의 말에, 그의 깊은 눈빛에, 르베나는 웃는 얼굴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고 말았다.
“아마 그때의 나도 지금처럼 널 사랑했을 거란다, 르베나. 그럼에도 부족한 할아버지라서 널 끝까지 지켜 주지 못한 나라서 미안하다. 그리고.”
제노스의 깊은 녹안이 더없는 애정을 가지고 르베나를 향했다.
“고맙다, 살아 주어서. 죽지 않고 버텨 주어서.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앞에 있어 주어서. 포기하고 싶었을 그… 수많은 절망 앞에서조차 포기하지 않고 남아 주어서 말이다.”
툭. 제노스의 말에 르베나의 눈에서 그녀도 모르는 한 방울 눈물이 떨어졌다. 이 모습을 본 칸이 붉어진 눈시울을 애써 가리며 다가와 르베나를 자신의 품에 안았다.
“아팠단다. 그리고 미안했단다. 드래곤이 모든 걸 보여 준 그 날, 그 모든 이야기 속 네 곁에 내가 없었음에. 그 모든 적군 앞에 네가 홀로 있었음에. 네가 느꼈을 암담함과 두려움을 생각하니 죽고 싶을 만큼 아팠단다. 하지만 그때 내가 네 폭주의 반동을 대신해 죽은 거라면. 그래서 네 곁에 없었던 거라면, 르베나.”
칸이 르베나를 마주 보며 웃었다.
“부족하지만 그걸로 만족해 주렴. 루아나와 약속했거든. 꼭 너를 지키겠다고.”
칸은 잠시 언제나 혼자였을 어린 날의 르베나를 생각하며 울컥 솟구쳐 오르는 울음을 참아냈다. 그리고 자신의 눈엔 영원히 어린 아이로 남을 딸을 더욱 꼬옥 안으며 말했다.
“그럼에도 미안하고 그것보다 더 고맙다, 르베나. 포기하지 않아 주어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자라 주어서. 그래서 결국 스스로를 이끌고 다독이며… 여기까지 와 주어서.”
칸의 말이 끝나자 어느새 르베나의 얼굴에서도 수많은 줄기의 눈물이 쏟아지며 그녀의 하얀 얼굴을 적시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곳의 모두는 그런 르베나를 섣불리 위로하지도, 울지 말라 달래지도 않았다.
“고마워요, 르베나 님. 우리 곁에 계셔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때도 지금도 제가 지킬 수 있게 해 주셔서.”
“고마워, 살아 있어 줘서. 그거면 됐어.”
다만 지금의 르베나가 살아 있음에, 그들의 곁에 있음에. 오로지 고마운 마음만을 전할 뿐. 그리고 사나와 후벤, 아를의 담담한 진심이 온전히 전해지자 이번엔 루드바하가 르베나를 보며 말했다. 그의 눈이 르베나의 흐르는 눈물에 한번, 흐느낌을 참는 눈에 한 번 가 닿았다.
“저라면 포기했을지도 모릅니다. 모두가 모르는 시간을 혼자서 짊어진 무게의 댓가가 이토록 잔혹했다면 말입니다. 어쩌면 이게 그대가 훌륭한 가장 큰 이유겠죠. 하지만 르베나가 정말 대단한 이유는.”
루드바하가 순간 붉어진 눈시울로 르베나의 거친 손을 부드럽게 쓸며 말했다.
“그대 자신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그대의 마음을, 몸을 끝까지 지켰기 때문이에요.”
“흑… 으흑……!”
참으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르베나의 눈물은 루드바하의 말을 끝으로 오랜 시간의 아픔을 대변하듯 흘러내렸다. 다만 미안하다고 한다면 괜찮다 해 주려 했다. 다만 그녀의 마지막을 아파했다면 지금이 있어 행복하다 말해 주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순간까지 그들은 르베나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다. 그게 오랫동안 견고하게 쌓아왔던 르베나의 마지막 한 겹을 기어코 벗겨 내고야 말았다.
“흑… 힘들었어요. 너무… 아팠어요. 매 순간이 옳은 선택이었을까 고민되고 두려웠어요. 흑…….”
르베나가 눈물에 막힌 목소리를 힘주어 내며 자신의 모든 감정을 뱉어냈다. 쉴새 없이 떨어지는 그녀의 눈물이 지금 르베나의 감정을 대변했고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가 르베나가 느꼈을 과거의 모든 감정을 보여줬다.
“그래서… 모두가 자책이라도 하면 차분히, 흑… 위로해 주자고… 으흑, 그렇게… 다짐했는데, 왜…….”
그들은 모두 고맙다고 하는 건지. 왜 그녀조차 생각하지 못하고 이제껏 챙기지 못했던 자신을. 이날까지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버티고 버텨 이제는 무감각해진 자신을 그들만은 알아보는 건지.
그 따뜻함이, 그 위로가, 오랫동안 참고 있던 르베나를 한순간에 무너지게 만들어 버렸다.
지난 과거의 상처를 지나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참아온 날들, 아파도 버티고 무너져도 다시 일어난 시간의 상처. 그 시간의 가치는 오직 그들에게 있다고만 생각했다. 그들이 살아 있으니 충분하다고. 그것만으로 르베나는 자신의 할 일을 마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한다. 그녀가, 르베나가 살아 있어 주어서, 포기하지 않아 주어서, 그래서 고맙다고. 미안하다는 백 번의 말보다 살아 있음에 고맙다는 말이 주는 위로에, 그 진심에 그녀는 참았던 모든 눈물을 쏟아냈다.
태어나 처음, 어쩌면 돌고 돌아온 오랜 시간 속 처음으로 그녀는 스스로가 소중한 존재임을 깨달았다. 그녀가 목숨보다 사랑한 이들을 지키기 전에, 그 모든 힘든 시간을 버티고 걸어온 자신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제부터 그녀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함께.
그렇게 르베나가 참았던 눈물을 터트리자 여기저기서 같이 소리내어 우는 이들이 늘어났다. 아를은 붉어진 눈시울을 참으려 두리번거리다 눈물, 콧물 다 흘리며 엉엉 우는 다한을 보고 풉 웃기도 했다.
그렇게 그들은 밤이 지나고 다음 날이 올 때까지 끝없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때때로 여전히 남은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때때로 더없이 큰 분노를 터트리기도 하였지만. 그들은 기나긴 밤의 어느 한순간에도 서로에 대한 따뜻한 온기와 웃음을 결코 잃지 않았다. 이 시간이 오기까지 길었던 밤만큼 오랫동안 맞이할 따뜻한 아침을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 * *
“꽃 사세요! 성대한 결혼식에 어울리는 꽃 사세요!”
북적북적한 인파가 가득 몰린 곳은 흡사 제국의 성대한 축제를 연상케 했다. 여기저기 꽃을 파는 사람들과 가득 들어선 상인들의 다채로운 물건, 길을 가득 메운 인파와 끊이지 않는 웃음소리가 그랬다.
“저게 그건가? 결혼식만을 위해 지었다는? 아니 근데 무슨 결혼식장을 국경 밖에 지어!”
지나가는 사람이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물을 보며 말하자 옆의 사람이 답했다.
“이번 대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을 기리는 곳도 함께 지었다는군. 그리고 두 분의 결혼식이 끝나면 모든 대륙의 사람들에게 저 건물을 무료로 빌려 준다는구먼!”
지나는 이들의 말은 그 뒤로 드래곤의 실존에 대한 것과 대전쟁의 이야기로 흘러갔다. 그 순간 그들의 곁을 스쳐 지나가던 아한이 멀리 위치한 화려한 모습의 건물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도대체 결혼식을 왜 남의 나라 국경에서 한다는 거야.”
그렇게 말하며 피식 웃어 버린 아한이 긴 다리를 움직여 우뚝 솟은 건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딱히 기다리지 않았건만 그래도 결국 와버린 결혼식 날짜에 맞춰 차려입은 검은색 연미복이 조금은 불편했다. 그렇게 낯선 복장을 입고 도착한 건물 안. 아한은 그곳에 들어서자마자 천장으로 쏟아지는 환한 빛에 저도 모르게 잠시 눈을 찡그렸다.
이내 조금 적응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니 곳곳에 풍성하게 장식된 꽃들과 허공을 나는 깃털 같은 흰색의 마법이 사랑스러움과 행복한 시작을 축복하듯 드리워진 것이 보였다. 그렇게 만개한 꽃처럼 화사한 공간을 무심한 눈길로 둘러보는 아한에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먼저 왔네?”
짐짓 여성스러운 목소리에 아한이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그곳에 연핑크색의 실크 드레스를 아름답게 차려입은 스릴이 보였다. 어느새 자라 완연한 미모를 자랑하는 스릴이 전쟁 때와는 다르게 예쁘게 꾸민 모습에 아한이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응, 어쩌다 보니. 오늘 예쁘다, 스릴.”
스릴을 칭찬한 아한이 그대로 고개를 돌려 주위를 마저 둘러보았다. 그런 아한의 말에 잠시 얼굴이 붉게 물든 스릴이 조금의 망설임 끝에 답했다.
“너, 너도 멋있어. 아 그리고 마법 학교 최연소 교수가 됐다는 소식도 들었어. 정말 축하해, 아한.”
대전쟁이 끝나고 몇 개월. 짧은 사이 훌쩍 성장한 아한은 이제 빈말로라도 앳된 티가 나지 않았다. 아를과 부쩍 어울려서 그런 건지 그를 닮은 서늘한 눈매와 큰 키, 그리고 제법 날카로운 턱선이 가진 맵시에 결혼식장에 들어온 어린 영애들이 그를 훔쳐보기 바빴다.
그런 영애들을 한번 노려본 스릴이 아한을 바라보자 그가 성의 없이 답했다.
“별로, 아직 누나만큼 되려면 멀었어.”
순간 르베나를 말하며 부드럽게 접히는 아한의 눈가에 스릴의 가슴이 찌릿 아파 왔다.
그 순간이었다.
“신부인가 봐!! 너무 예쁘다!”
술렁이는 소리와 함께 아한의 눈이 더없이 예쁘게 접힌 건.
“르베나, 정말 아름답네요.”
이미 자신의 품에 안아 르베나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을 텐데. 루드바하는 그동안의 그리움을 한꺼번에 풀 듯 르베나를 꼭 안고, 때로는 얼굴을 비비며 말했다. 어제 모두와 함께 보낸 시간은 까맣게 잊은 듯.
예전이라면 그를 밀어낼 르베나 역시 그런 루드바하가 좋아 가만히 두 팔로 그의 넓은 등을 마주 그러안았다.
얼마간 서로를 안고 있었을까. 둘만의 대기실에 있던 르베나와 루드바하가 살짝 거리를 벌리고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특히 루드바하는 자신이 직접 고른 드레스를 입은 르베나의 모습에서 쉽사리 시선을 떼지 못했다.
르베나의 눈빛을 부가시켜주는 옅은 아이보리빛의 드레스는 그녀의 목과 가슴골까지는 시스루로 되어 있어 고혹적이었고 조금 더 짙은 베이지색의 세심한 자수가 그녀의 아름다움을 한껏 끌어올렸다.
마치 르베나와 맞춘 듯 같은 색상과 장식이 들어간 루드바하의 연미복이 이 순간 두 사람을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이제 들어가실 시간이에요.”
그때, 조심스레 다가온 사나의 말에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싱긋 미소 지었다. 그와 함께 루드바하가 팔을 내놓자 르베나가 그에게 자신의 손을 얹었다. 이윽고 두 사람이 함께 사나를 따라 대기실을 벗어났다. 옮기는 걸음마다 그들의 행복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