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제4장. 르베이나 (73)
이제 겨우 모두가 살아났는데 또다시 고개를 내미는 그의 존재에 르베나는 치가 떨렸다. 그녀뿐만일까? 서둘러 마법사들과 기사들을 재정비하던 다른 왕들과 루드바하, 아를까지도 그의 존재가 느껴지는 곳을 서늘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때 또 다른 전율이 르베나의 전신을 감싸기 시작했다.
모두가 앞다투어 르베나의 곁으로 모여들더니 자신들의 몸으로 그녀를 감싸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또다시 드래곤이 마법의 힘을 거둬갈 때를 대비하듯. 디오니스의 결계를 발동하러 간 가스트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하나둘, 그리고 열 명이 백 명으로. 백 명이 수천 명으로. 그것이 다시 수십만 명으로. 그들 스스로가 한 사람을 위한 인간 방패를 자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외쳤다.
“어리석기에 함께하고, 그를 통해 살아남은 것이 인간입니다!”
용언에 비하면 미약하기 짝이 없는 외침에 드래곤이 비웃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과 동시에 사위가 다시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천둥도 번개도 치지 않는 세상은 고요한 적막에 젖어 드는 느낌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오히려 모두를 더한 공포에 젖어 들게 했을 때 드래곤이 다시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 어느새 나타난 드래곤이 모두를 향해 물었다. 그의 음성은 슬픈 것도 같았고 더한 기쁨에 가득 차 있는 것도 같았다.
「마지막 물음이다. 인간들이여, 르베나 드 디오니스와 너희 모두의 삶. 그 중 너희의 선택은 무엇이냐.」
“우리를 지켜 주는 왕녀님을 살려주시고 세상을 구해주세요. 저 꼭 왕녀님 같은 기사가 되고 싶어요.”
순간 드래곤의 머릿속에 한 어린아이의 간절한 소망이 닿아 왔다. 디오니스 땅의 어딘가. 어리고 작은 존재에게까지 닿은 그의 질문에 순수한 영혼이 가장 먼저 답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작이었다.
“저희는 그녀를 버릴 수 없습니다.”
“왕녀님이 과거의 저를 구해주셨으니 더 이상의 망설임은 필요치 않습니다.”
“디오니스 디저트를 죽을 때까지 먹으려면 왕녀님이 있어야 한다고!”
“왕녀님으로 인해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왕녀님을 구해 주세요.”
“이제 곧 태어날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가 르베나 왕녀님을 보고 자라게 하고 싶습니다.”
“내 딸을 이제 누구도 내게서 빼앗을 수 없습니다.”
“살고 싶다. 이곳에서, 이들과 함께.”
수천, 수만의 간절한 소망이 드래곤의 전신을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어떤 것은 음성을 통해, 또 어떤 것은 기원하는 마음을 통해. 그가 만약 전능한 존재가 아니었다면, 신의 대리자가 아니었다면 머릿속과 귀를 울리는 수십만의 기도로 미쳐 버렸을지도 모를 만큼 간절하고 간절한 소망. 그것이 모든 공기와 땅을 뒤흔들었다.
마치 원하는 대답을 들었다는 듯 드래곤의 두 눈이 태양과 같이 하늘에 떠올라 번쩍인 것은 그때였다. 마치 태양이 두 개 뜬 것과 같은 그의 모습에 세상이 밝아졌다. 그리고 그의 음성이 이제까지와는 다른 무게를 가지고 세상에 전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세상의 비밀을 엿보는 어느 비밀스러운 순간같이 조심스럽게도, 세상이 맞이할 종말의 시작같이 무겁게도 들려왔다.
「애초에 세츠와 베이라의 선조인 두 존재는 신의 사랑을 받았지만 만족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세츠의 선조는 신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상대방의 ‘절제’를 빼앗았다. 이에 자신만을 아는 이기적인 마법사, 베이라가 탄생하였다.」
들려온 드래곤의 말에 르베나의 시선이 잘게 떨려왔다. 그것은 언젠가 레턴이 놓고 간 세츠와 베이라의 진실이 적혀있던 고서의 내용과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래곤은 말을 계속 이어갔고 그에 따라 하늘에 떠 있는 태양 같은 두 눈은 세상을 모두 불태우듯 더 뜨겁게 타올랐다.
「이에 ‘절제’를 빼앗긴 베이라의 선조는 상대방에게 ‘연민’을 빼앗았다. 이에 동정심과 감정 없이 정의라는 목표만을 쫓는 존재, 세츠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런 두 존재의 끊임없는 전쟁에 질려 어느새 드래곤도, 신도 이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돌보는 존재가 떠난 곳. 그것이 르베나가 살던 세상이었다.
무력하게 학대받는 어린 아이의 눈물, 악인의 얼굴 뒤에 숨겨진 외면받은 고통, 끝없이 누군가를 모함하고 시기하는 사람들. 그들의 모든 인생은 신이 돌보지 않는 세상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런 세상에 처음으로 수많은 이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거는 베이라가 나타났다.
다른 베이라들처럼 자신의 힘만 믿고, 자신만을 믿던 단 한 베이라의 고결한 희생을 통해 세상의 베이라들이 절제를 얻은 순간이었다.」
드래곤의 말에 르베나의 시선이 잘게 흔들렸다. 왜인지 그의 눈이 순간 그녀를 향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베이라의 삶을 가엾게 여겨 자신이 지켜야 할 수만 명의 사람들보다 그 한 사람을 위해 힘을 써 버린 세츠가 나타났으니, 그로부터 세상의 세츠들이 잃어버린 연민을 얻었다.」
그의 말에 루드바하의 시선이 놀란 듯 멈추었다. 마치 드래곤이 말한 이들이 이전 생의 르베나와 자신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드래곤이 처음으로 르베나와 루드바하를 향해 따뜻하게 미소 짓는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만으로 온 세상이 깨어나듯 밝아졌다.
「그런 너희가 모여 감히 신의 대리자인 나에게 검을 들고 세상의 질서를 지키기 위한 하늘의 늑대들을 물리쳤으니.」
순간 모두가 몰려올 그의 공격과 분노에 긴장하여 침을 꼴깍 삼켰다. 하지만 왜인지 르베나는 더이상 드래곤이 두렵지도 긴장되지도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의 마지막 말을 알 것만 같았기 때문에.
「그 용기로, 그 결집으로. 이전 생의 너희를 지켜 낸 그녀를 이번엔 너희가 지켰으니, 세상은 이로써 또 한 번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드래곤의 음성이 봄날의 새 생명을 틔우는 바람처럼 따뜻해졌다. 이에 모두를 감싸는 공기도 부드럽게 그들의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기 시작했다.
「어쩌면 마지막이었을지도 모를 시험을 통과한 인간들이여, 그대들의 삶은 이곳에서 이어질 것이다. 이제 이곳엔 절제를 잃은 베이라도, 연민을 잃은 세츠도 사라질 것이니.」
순식간에 세상 모든 생명들이 새것처럼 반짝였고 베이라들과 세츠들은 절대로 채워지지 않던 어느 한 부분이 꽉 차오르며 따스해지는 느낌에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너희들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는지 나는 이제 떠나지 않고 지켜보겠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순간 모두가 느끼던 드래곤의 위압감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에 모두가 놀라 서로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잠시의 정적 후.
“와!!!”
“와! 이겼다!!”
“우리가 지켰다!!”
“세상을 지켰어!”
대지와 하늘을 울릴 수십만의 환호가 터져 나왔다.
르베나 드 디오니스, 루드바하 라 유파시드.
쇠퇴한 베이라들의 성지에서 태어난 역사상 가장 강한 베이라. 신마전쟁을 승리로 이끈 유례없는 힘을 가진 세츠들의 왕. 두 사람을 필두로 온 대륙의 인간들이 드래곤으로부터 세상을 구해 낸 어느 시대의 역사적인 페이지.
그 페이지가 지금 온 대지와 하늘을 울릴 만큼의 환호와 기쁨, 그리고 희생과 용기로부터 깊은 발자국의 태동을 시작했다.
* * *
[사랑하는 나의 르베나.
어느덧 그대를 못 본 지도 한 달이 다 되어가네요.
이렇게 오래 못 볼 줄 알았다면 결혼식은 그냥 젠에서 하는 게 어떠냐고 할 걸 그랬어요.
물론 제 의지에 따라 변하는 건 없겠지만요.
대전쟁이 오기 전조차 그대를 이렇게 오래 못 본적은 없는 것 같아 하루하루가 힘드네요.
하지만 이제 곧 결혼식에서 그대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마르지 않아요. 빨리 보고 싶어요. 그리고 이렇게 편지로 연락하는 건 언제까지 해야 할까요?
가운만 입고 통신석을 사용하는 거 이제 정말 안 할게요. 약속해요.
그러니까 통신석 금지 빨리 풀어 줘요. 알겠죠? 너무 사랑해요.
추신. 직접 고른 드레스를 함께 보냅니다. 꼭 입고 와 줘요.
그리고 사랑해요. 아까 쓴 거 알지만 그래도 또 사랑해요, 르베나.
그대의 루드로부터]
르베나가 루드바하의 편지를 접고 함께 온 드레스를 바라보았다. 더불어 수십 벌의 드레스 옆에 쌓여있는 몇백 통의 편지도 함께. 이 같은 모습을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 옆에 있던 사나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여전하시네요, 루드바하 님은 정말.”
사나의 말에 르베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차라리 통신석 금지를 푸는 게 낫겠지?”
“통신석을 금지했다고 하루에도 수 십통씩 편지와 드레스를 보내실 줄은 몰랐으니까요. 그냥 풀어주세요, 르베나님.”
사나의 말에 르베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가 보내온 드레스를 보고는 살짝 미소지었다. 사나 역시 루드바하가 보내온 드레스를 보고 웃으며 그에 어울리는 장신구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식 준비에만 몇 개월이 걸리다니 정말 대단하세요.”
사나의 말에 르베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원래는 젠에서 해야 하는데 고집을 부리니까. 필요한 물건 만들고 옮기는 데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몰랐을 거야.”
르베나가 웃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르베나의 침대 옆, 새롭게 만들어진 조그마한 자신의 침대에서 눈을 뜬 팅이 날갯짓을 해 르베나에게 다가와 볼을 비벼댔다.
그 촉감에 한 번 더 웃어 보인 르베나가 팅에게 속삭였다.
“이제 내일이야, 팅.”
르베나의 말에 팅도 좋은지 예쁜 꽃송이 마법을 연습처럼 흩뿌렸다. 길고도 험난했던 파벤더, 드래곤과의 대전쟁이 끝난 지도 어느새 두 달. 창을 통해 들어오는 초여름의 따뜻한 바람에 흩날리는 꽃송이들이 더없이 축복할 날을 기다리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똑똑. 그때 르베나의 방문으로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들어섰다. 이에 자연스럽게 방문으로 시선을 돌린 르베나의 얼굴에 화사한 여름의 햇살 같은 미소가 가득 어렸다.
“어서 와.”
그만큼이나 따뜻한 음성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