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제4장. 르베이나 (72)
“루드바하, 아버지, 가스트, 그리고 모든 분들.”
르베나가 점점 옅어지는 자신의 생명력과 계속해서 터져나오는 선혈에 얼룩진 입가의 비릿함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그때도 지금도 완벽하게 지켜 주지 못해서. 나를 위해… 또다시 희생하게 만들어서.”
르베나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마치자 그녀에게 줄곧 마력을 전해 주던 팅이 스르륵 잠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쓴 웃음을 지은 르베나가 조심스레 팅을 자신의 품 안에 넣었다. 그리고 이제는 확실하게 작아진 생명력을 느끼며 떨리는 손발로부터 억지로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르베나의 시선에 가득 찬 그, 루드바하가 그녀에게 말했다.
“르베나, 그대는 누구도 희생하게 만들지 않았어요. 그때도 지금도요. 그리고 언제나 모두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요.”
마찬가지로 신력이 거의 소진된 루드바하의 음성에는 예전만큼의 힘이 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여전한 온기와 사랑이 넘치도록 배어 있었다. 이에 르베나가 그를 보며 미소 짓자 루드바하 역시 남은 모든 마음을 담아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쉽네요. 그대와 더 많이. 아주 오래 함께하고 싶었는데.”
울컥. 터져 나오는 선혈이 언제나 깨끗하던 그의 옷을 더럽혔다. 그럼에도 루드바하는 웃었다. 그리고 다가와 르베나의 옆에서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사랑해요, 르베나. 또 다른 삶에서도. 그다음 삶에서도. 그대를 사랑할 거예요. 그리고 그때는 더 빨리… 찾을게요.”
루드바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모두의 몸이 휘청이기 시작했다. 벌써 생명력의 절반 이상이 소진된 탓이었다. 하지만 다행이건 그들의 생명력으로 브레스 역시 절반 이상 옅어지고 있다는 것이었고. 그리고.
“아를, 이 멍청이.”
어느 순간 그토록 말렸던 아를의 새로운 기술이 더해진 실드를 바라보며 르베나가 쓰게 웃었다. 지금 이 순간 지상에 있을 그가 부디 죽지 않기만을 바라며.
“라피엘이 루안을 만났을지 모르겠군요.”
역시나 점점 옅어지는 생명력을 느낀 룩센 공작이 디오니스의 궁을 바라보며 말하자 옆에 있던 루시드가 옅게 웃으며 답했다.
“만날 사람들은 남은 생에서 우리 생각보다 더 오래 함께할 겁니다.”
루시드의 말이 조금은 위안이 되었는지 룩센 공작이 더 이상 들어 올릴 수조차 없을 만큼 떨리는 손을 바라보았다. 그의 모습을 본 루시드 역시 마지막을 예상한 듯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아사드를 보며 웃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마지막을 느낀 건지 모두가 자신과 가까운 사람의 옆에 다가선 모습이 아프고도 따뜻한 순간이었다.
“우리의 마지막치고는 괜찮지 않나.”
루시드의 말에 아사드 역시 후회 없는 표정으로 씩 웃어 보였다.
“아주 괜찮지. 그런데 자네는 정말 괜찮겠나. 여기에… 자네의 아들이 있지 않나.”
아사드의 말에 루시드가 더 높은 곳에서 하늘을 가득 메울 만큼의 신력을 쏟아내는 루드바하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루시드의 시선을 느낀 건지 루드바하의 시선도 그를 향했다. 마주 보고 옅게 미소 짓는 부자의 얼굴이, 미소가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어쩌겠나. 그것이 내 아들이기 전에 유파시드인 그의 운명인 것을. 오히려 내 아들을 혼자 보내지 않음에 감사하며.”
잠시 말을 멈춘 루시드가 괴로운 얼굴을 애써 감추며 말했다.
“혼자 남을 아드리안이 너무 오래 울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네.”
루시드의 말이 바람을 타고 흘렀다. 그렇게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마지막을 준비했다. 하지만 삶의 마지막을 눈앞에 둔 그 순간조차 그곳엔 눈물을 흘리는 자도, 두려워 떠는 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들은 함께 드래곤이 만들어낸 브레스를 막았다. 이걸로 그들의 생은 비록 끝나겠지만 남은 이들은,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리고 온 대륙은 또다시 힘차게 찬란한 삶을 이어나갈 것이다. 그것만으로 모두는 만족한 듯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이제껏 침묵을 지키던 칸의 목소리가 지친 르베나에게 닿아 왔다.
“르베나, 기억하니. 내가 전쟁 전에 했던 말을.”
가만히 주위를 바라보던 칸의 말에 르베나가 그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수척해진 딸의 모습에 칸의 마음이 도려내듯 아파 왔다. 그럼에도 그의 미소 지은 얼굴은 이 순간 더 환하게 밝혀졌다.
“너는 혼자가 아니란다. 그리고 그것이…….”
잠시 칸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려왔다. 그것은 마지막을 눈앞에 둔 사람의 두려움처럼 들리기도 했지만 생의 마지막 순간, 더없는 기적을 본 사람의 감격한 울림 같기도 했다.
“기적을 일으켰구나.”
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하늘과 땅이 무엇인가로 가득 채워지기 시작했다. 하나둘 모습을 나타난 그들은 이 순간 누구도 예상치 못한 존재였고 누구도 기대하지 못한 이들이었다. 이내 그들이 모든 하늘과 땅의 공백을 메우자 주위가 따뜻한 온기와 더없는 그림자로 번지기 시작했다.
“…아.”
그 순간 이제껏 평온을 가장했던 르베나의 얼굴이 사정없이 흘러내리는 눈물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하늘과 땅을 가득 메운 존재들, 그들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엔 자칸의 왕과 기사들이 있었고 켄느의 유리엔과 아사벨을 비롯한 세츠들이 있었다.
지쳐 웃고 있는 레턴을 부축하는 베느젤과 마를한의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있었으며 어마어마한 규모로 등장한 젠의 세츠들과 성기사들도 있었다. 그리고
“칸님!”
혹시 몰라 국경에 두고 온 다이아 용병들까지. 그들 모두가 아한과 궁 안 사람들의 간절한 대규모 소환 마법, 아르쉘에 응답한 것이다. 그리고 브레스를 막고있던 모두가 그 장엄한 광경에 놀라기도 전, 공간을 가득 채운 수천의 베이라들과 세츠들이 즉시 일행의 생명력을 다시 채우기 시작했고 그러고도 남은 힘으로 이미 약해진 브레스를 거세게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전의 생과 달리, 네 왕국과 제국의 연합군이 르베나가 아닌 신의 대리자에게 함께 맞서기 시작한 것이다.
* * *
그들의 등장과 동시에 조금씩 차오르는 생명력을 느낀 르베나가 떨리는 시선으로 칸과 루드바하, 그리고 모두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모두가 눈물과 미소로 범벅이 된 얼굴로 전한 마음에 그녀의 전신이 브레스를 향해 떠오르기 시작했다.
“가세요, 르베나 님.”
아사벨이 르베나를 바라보며 자신의 신력을 아낌없이 내어주었다.
“더 이상 망설이지 말아요. 르베나 님.”
유리엔 왕 역시 그녀에게 말하며 그동안 되찾은 힘을 강하게 쏟아내며 밀어 주었다.
“가서 부숴 버려요!”
자칸의 왕이 그녀를 향해 외침과 동시에 자칸의 기사들이 검기의 힘으로 그녀를 비호했다.
동시에 젠에서 온 성기사들의 검기와 세츠들의 마법이 그녀의 주위로 피어오르는 브레스의 불꽃을 막아내었다.
“티~잉!”
그 순간 눈을 비비며 일어난 팅을 본 르베나가 여느 때보다 환하게 웃으며 하늘의 더 높은 곳을 향해 날아올랐다. 그리고 빽빽하게 들어찬 대륙의 모든 사람들과 그들을 향해 마지막 불꽃을 피워내는 브레스를 보며 자신의 붉은 입술을 열었다.
르베나의 시선은 그 여느 때보다 불타오르고 있었고, 그녀의 전신을 감싼 검붉은 마력은 주변의 모든 것을 태울 듯 뜨겁게 달아올랐다.
“드래곤이여, 이 세상은 더 이상 당신의 것이 아니야.”
순간 르베나의 전신에서 이제껏 보지 못한 엄청난 양의 마력이 피어올랐다. 그 마력에 닿은 공기가 울부짖었고, 그 마력이 피워 내는 힘에 하늘이 전율했다.
콰과광……!!! 마침내 르베나의 마력이 불꽃과 함께 거대한 번개를 피워 낸 것과 동시에 그녀가 브레스를 바라보았다.
“이 세상은 이제, 우리 모두의 것이다!”
르베나가 외치자 그녀의 전신이 빚어낸 번개가 천지를 울렸고 타오른 불꽃이 그 번개를 호위하며 브레스를 향해 날아갔다. 번개가 그리는 궤적은 더없이 환하게 빛났고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불꽃에 하늘의 구름이 절로 갈라졌다.
“세상을 가로막는 힘을 처단하라, 르베이나!”
대륙을 멸망시킬 브레스를 벌하는 듯한 르베나의 음성이 장엄하게 퍼짐과 동시에 그녀의 마력이 번개처럼 브레스에 꽂혔다.
쩌저적……! 콰광!!! 순간 천지가 우는 듯한 굉음과 함께 세상이 번쩍였고 마지막 사력을 다하던 브레스가 산산조각 난 채 수천 개의 불꽃으로 화해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루드!”
그 순간 루드바하가 모두의 힘으로 다시 채워진 신력을 사용해 광활한 금빛의 실드를 펼쳐 냈다.
“드래곤 당신은 우리에게서 그녀도, 세상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루드바하의 신력이 그의 뜻을 대신하듯 보이지 않는 곳까지 넓은 금빛의 경계선을 펼쳐냈다. 그리고 수천 개의 불꽃으로 변한 브레스 조각들은 그의 신력을 통과함과 동시에 차가운 눈송이로 변해 갔다.
화아악--!! 곧 세상에 수천, 수만 개의 큰 눈송이들이 사뿐히 내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 광경을 바라본 사람들 사이를 메우는 것은 순수한 기적과 환희, 기쁨과 감격. 하지만 르베나는 그 순간조차 멈추지 않았다.
“가스트, 곧바로 가서 디오니스의 결계를 작동시켜!”
기뻐 르베나에게 다가오던 가스트가 순간 완전히 끝나지 않은 전쟁을 떠올리고 곧바로 사라졌다.
“티~잉!”
팅 역시 르베나의 마력을 먹고 다시 기운을 차리는 듯했지만 르베나는 그런 팅을 짧게 살피고 괜찮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곧장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그녀의 생명과 세상을 포기하지 않은 드래곤이 여전히 존재한단 것을, 그래서 그들의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말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주변을 돌아본 르베나의 눈은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충격으로 떨려왔다.
“모든 세츠들과 성기사들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대비해 광범위 실드를 시작한다! 또한 언제든 신력과 검기가 듣지 않을 때를 대비해 검을 준비하도록.”
잔뜩 흐트러진 은발과 긴 시간의 전쟁으로 지쳐 더 날카로워진 턱선. 언제나 단정하던 옷을 더럽힌 선혈의 자국과 자욱한 먼지로 인해 더 이상 고귀한 흰색을 찾아볼 수도 없는 세츠들의 왕, 루드바하. 그가 이제껏 보지 못한 흐트러진 모습을 하고도 흔들림 없이 제국의 사람들에게 다음 일을 지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좀 더 날카롭게 벼려진 그의 눈빛은 그 속에서도 더 깊고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사벨, 드래곤에 의해 신력을 사용할 수 없게 되면 곧바로 오라버니에게 가야 한다. 알겠니? 그리고 켄느의 모든 기사들은 검을 꺼내 언제라도 싸울 수 있도록 해라. 세츠들은 젠과 함께 디오니스 전역의 실드를 준비하도록!”
어느새 왕의 위엄을 갖춘 유리엔이 몸을 돌려 지시하자 아사벨과 켄느의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흩어졌다. 그 와중에도 아사벨은 르베나를 향해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것을 잊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왕녀님! 마지막까지 승리하시길 바랄게요!”
두 사람의 왕이 자신의 역할을 하는 동안 유일하게 왕의 위엄을 내다 버린 레턴이 베느젤에게 칭얼댔다.
“베느젤, 나 죽는 줄 알았어.”
그런 그를 바라보며 베느젤은 말갛게 웃었다. 그녀의 작은 웃음에 얼마나 많은 염려와 걱정이 스쳐 갔는지. 그럼에도 베느젤은 곧장 미소를 지우며 레턴에게 보고를 시작했다.
“미리 말씀하신 대로 기사들은 지상의 아벨디온에게, 마법사들은 전원 공격 마법을 준비하라 일렀습니다.”
엄살을 부리던 레턴 역시 베느젤의 보고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이제 진짜 최종의 최종의 최종이다!”
“르베나 왕녀.”
기쁨을 나누고 있을 거라 여겼던 것과는 다른 모두의 모습에 르베나가 잠시 얼어 있던 순간, 자칸의 왕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에게 시선을 돌린 르베나가 서둘러 감사의 말을 전하려 했으나 그의 말이 조금 더 빨랐다.
“기억나지 않는 삶이나 당신이 먼저 겪었기에, 지금 우리는 겪지 않을 수 있었던 순간을 우리 또한 보았습니다. 설령 이곳에 있는 제가 그러지 않았대도, 드래곤이 보여 준 세계에 있던 제가 그대를 향한 모함에 휘둘려 많은 것을 잃게 한 대가를 오늘 치르겠습니다.”
그의 말에 옆에 있던 아쿤이 씩 웃으며 이어 말했다.
“자칸은 절대 은혜를 잊지 않으니까요.”
그들의 말에 르베나가 멈칫하다가 이내 포기한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루드바하에게 시선을 보낸 르베나는 그와 함께 서둘러 지상으로 내려갔다. 지금 당장 실드를 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음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곧 땅에 발을 딛기 무섭게 르베나가 누군가를 찾아 빠르게 달려갔다.
“아를!”
그러고는 룬이 부축하고 있는 아를에게 다가가 서둘러 그를 살피기 시작했다. 몸을 거의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지쳐 눈만 간신히 뜬 그의 모습. 도대체 자신을 지키다 다친 아를의 모습을 발견하는 게 몇 번째인지.
“아를!”
르베나가 참지 못한 화와 울음 그리고 알 수 없는 무엇인가를 담아 그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아를 또한 그녀의 말문을 먼저 막아 버리고 말았다.
“말했잖아. 내가 죽을 것 같을 때, 그때는 쓴다고.”
아를의 말에 르베나가 차마 대답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보답할 수 없는 마음에 더해지는 그의 진심이 이 순간마저 무겁고, 고맙고, 미안했기에. 그리고 아를은 그런 르베나마저 위로하듯 가볍게 말했다.
“됐잖아. 안 죽었으니까. 그렇지, 르베나?”
그의 말에 르베나가 겨우 붉어진 눈시울을 참으며 그를 노려보는 찰나였다.
「대륙의 인간들은 정말 어리석구나.」
거대한 존재의 음성은 사라진 브레스와 달리 여전히 거대한 힘을 담고 세상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