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제4장. 르베이나 (71)
“언니!!”
강제로 디오니스의 성 안으로 이동된 스릴이 르베나를 부르며 울부짖었다. 어느새 달려온 루안 공녀를 품에 안은 유안 역시 그녀가 보지 못하게 가리며 이를 악물었다.
다른 이들과 달리 어리지 않은 그가, 충분히 모든 걸 내놓을 수 있는 그와 루안이 이곳에 함께 보내진 이유.
그것은 다른 이들의 배려였다. 그들에겐 아직 행복할 기회가 남아 있으니, 그들을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으니, 끝까지 살아남으라는. 그리고 그것이 이 순간 못 견디게 아프고 미치도록 슬퍼 유안의 눈시울이 더없이 붉어졌다.
유안과 함께 이동된 루안 역시 유안의 품에 안긴 공녀와 룩센 공작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며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 세차게 시선을 떨었다.
“이게 도망가는 거랑 무엇이 다릅니까!”
허공에는 전해지지 않을 소리를 외치며 부르르 몸을 떠는 호안 왕자의 분노에 그의 신력도 들썩였다.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멍하니 서 있던 아한은 호안의 외침을 듣자마자 재빨리 창가로 달려갔다.
“깨졌어!”
창밖을 본 아한의 눈이 충격으로 떨려 온 건 그때였다. 네 개의 브레스를 막던 모두의 실드가 일시에 깨진 것이다. 그 순간 아한의 옆으로 다가온 스릴이 큰 소리로 울며 외쳤다.
“근데…! 흑, 근데… 왜 아직도 브레스를 막고 있는 거야! 도대체 무슨 힘으로!!”
그 순간 궁 안에 발생한 텔레포트를 감지한 제노스 왕역시 크론과 이들을 향해 함께 달려왔다. 그리고 절망한 모두의 얼굴을 한 번, 번쩍이는 밖을 한 번 본 그의 몸이 충격으로 크게 휘청였다.
“폐하!”
놀란 크론이 그를 부축했으나 제노스는 쓰러진 몸에 힘을 주지도 못한 채 참았던 눈물을 떨어뜨리고야 말았다.
“안 된다. 안 돼, 르베나!”
* * *
어린 마법사와 이제 겨우 누군가와의 인연이 닿은 이들을 안전한 궁으로 보낸 후 생긴 공백으로 실드는 모두 깨져 버렸다. 그 반동에 모든 마법사들이 휘청이며 자신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이탈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순간조차 르베나와 루드바하는 자신의 자리를 지킨 채 서로에게 전하지 못한 수많은 말을 눈에 담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누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여기저기로 흩어지는 네 개의 브레스를 향해 각자의 시동어를 외쳤다. 자신들의 생명력을 이루는 마력과 신력까지 모두 끌어모아서.
“르베이나.”
“루드.”
시동어를 통해 증폭 마법까지 건 르베나와 루드바하의 몸에서 쥐어짠 마력과 신력은 물론이고 생명을 이루던 힘까지 모조리 방출되기 시작했다.
그 찬란한 빛과 넘치는 힘을 본 다른 마법사들이 놀란 눈으로 그들을 보다가는 곧 흐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두 사람으로 인해 존재를 알게 된 고대 마법의 시동어. 그 후 오랫동안 들였던 노력이 무색하게도 모두는 생의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아껴 놓았던 그들의 시동어를 외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신을 가장 잘 정의하는 단어가 누군가에겐 자신이었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가장 소중한 존재나 이미 잃어버린 이들의 이름이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을 뒤로한 채.
“루아나.”
“루안.”
“아드리안.”
칸과 룩센 공작, 루시드가 각자의 시동어를 외치자 그들의 몸에 존재하던 힘과 생명을 이루던 힘이 함께 번쩍이며 하늘을 밝혔다.
“유르.”
“아사벨.”
“아한.”
레턴과 아사드, 가스트마저 시동어를 외우자 그들 역시 자신들의 생명력에 깃든 마법을 아낌없이 소진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몸이 이제껏 볼 수 없던 휘광에 휩싸였다. 그리고,
“함께여서 영광이었습니다, 왕녀님.”
맥스의 말을 선두로 한 모든 베이라들이,
“세상 모든 곳에 신의 안배가 함께하길.”
유파시드의 빛을 본 모든 세츠들이 다 함께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남은 생명력을 마지막 힘으로 치환했다.
번쩍……! 그들의 목숨을 건 마지막 마법에 하늘이 번쩍였다.
콰과광!! 모든 걸 내건 그들의 강인한 각오에 천지가 울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아를 역시 망설임 없이 자신의 검을 들어 올렸다.
“이건 너무 위험해, 아를.”
전쟁이 시작되기 며칠 전, 대숲의 절반 이상이 잘려나간 모습을 보며 르베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를이 개발한 검기 그 이상의 기술은 굉장한 실력의 마법이라고 생각될 만큼, 대단했고 그만큼 위험했기 때문에. 그것은 어찌보면 르베나가 전력을 다한 공격 마법 만큼이나 파괴적이었다. 무엇보다.
“아를!”
예상대로 엄청난 힘을 쓴 대가로 휘청이는 아를에게 급히 다가간 르베나가 서둘러 그를 부축하며 외쳤다.
“이게 절반이라고? 미쳤어? 이런 걸 뭐하러 만들어? 이런 걸 쓰다간 죽을 거야!”
르베나의 시선이 두려움을 담고 흔들렸다. 아를은 그 모습을 제 눈에 담으며 피식 웃었다. 그 모습에 불안함을 느낀 르베나가 소리쳤다.
“모든 힘을 다해 쓰면 네가… 죽을 거라고!”
르베나의 외침에 아를이 땅에 꽂은 검을 의지해 홀로 일어서며 말했다.
“누구에게나 지키고 싶은 게 있고 그걸 위한 각오가 필요해, 르베나.”
아를이 지키고 싶은 존재. 이제는 그게 누구인지 너무도 잘 알게 된 르베나가 화가 난 시선을 직시하며 당부했다.
“더 이상 나를 위해서 널 희생하지 마, 아를.”
자신의 말에 아프게 흔들리는 아를의 눈. 어느 때는 나른한 오후의 햇볕처럼 따뜻하고, 어느 때는 북부에 높이 뜬 해처럼 차가운 눈. 그런 아를의 눈을 마주 본 르베나가 치유의 마력을 흘리며 재차 당부했다.
“너의 희생이 날 더 아프게 해. 그러니까 이거만큼은 나를 위해 쓰지 마. 부탁이야.”
몸의 구석구석을 조심스레 치유하는 그녀의 마력을 느끼며 아를이 쓰게 웃었다.
그리고 어느새 자신의 상처에 집중하는 르베나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속삭였다.
“알았어. 그럼 이건 나를 위해서만 쓸게. 내가 죽을 것 같을 때.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을 때. 그때만 쓸게.”
아를이 그때의 기억에서 깨어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마도 저들의 생명을 다한 마지막 마법이 분명한 빛들은 강하게 드래곤의 브레스를 밀어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를이 웃었다.
“르베나, 내가 말했지?”
그가 르베나가 선물로 준 자신의 검을 그녀가 있을 하늘을 향해 높이 들어 올렸다. 지는 석양에 검날이 반짝이며 르베나가 새긴 글귀가 선명하게 돋보였다.
[아를 드 메이슨, 나의 영원한 친구에게.]
아를이 그 글귀를 보며 진하게 웃었다. 그리고 검을 뒤집었다.
[너에게 나의 영원한 축복이 함께하기를, 르베나 드 디오니스가.]
반대편에 새겨진 또 다른 글귀를 본 아를이 자신의 모든 힘을 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콰과광……!! 신의 대리자를 향한 모두의 반란에 하늘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아를의 시선은 오직 그녀의 이름, ‘르베나 드 디오니스’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내가 죽을 것 같을 때에만 쓴다고 했잖아. 르베나, 그런데 지금.”
너의 생을 다한 마법이 끝나면 더는 내 곁에 없을 너를 떠올리니. 모두를 지키며 희생한, 내가 모르는 시간의 너와… 어쩌면 내가 아는 이 시간에서조차 사라질 너를 생각하니.
“나 죽을 것 같아.”
툭. 아를의 금안이 석양에 반사되어 이제껏 보지 못한 색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떨어진 것은 지는 해의 눈물 같기도 하고 떠오르는 달빛의 미소 같기도 했다. 뺨을 적시는 외줄기 온기를 느끼며 아를이 보이지 않을 하늘에 있을 그녀를 생각하며 말했다.
“네가 없는 삶을 살아갈 자신이 없어, 르베나 드 디오니스.”
아를의 입술이 그녀의 이름을 뱉음과 동시에 그의 검에서 여느 마법사의 마지막 마법처럼 광활한 빛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빛은 흔들림 없이 그녀가 있을 하늘로 향했고 마지막 반항을 하는 엄청난 위압감의 브레스를 명중시켰다.
“아를 단장!!”
순간 휘청이는 아를의 몸을 재빨리 룬이 받아냈다. 그리고.
“젠장, 룬 경!!”
아를을 보고 울먹인 랄프의 부름에 룬과 어느새 놀라 달려온 바흐란과 라웅의 놀란 시선이 하늘에 닿았다.
“르베나!! 젠장, 희생 같은 거 제발 하지 말라고 했잖아!!”
바흐란의 절규 같은 외침과 동시에 하늘의 브레스들이 마법사들의 마지막 생명을 다한 실드에, 아를의 모든 것을 건 공격에 눈에 띄게 옅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 * *
“…브레스가 사라지고 있어.”
창밖을 보며 아한이 중얼거렸다. 이에 유안이 루안 공녀를 안고 있던 손을 떨어트리며 말했다.
“하지만 저 속도라면. 저곳에 있는 모두가 죽을 만큼 생명력을 소진해야 브레스가 완전히 사라질 겁니다.”
창밖을 본 유안이 급히 루안 공녀를 바라보며 텔레포트를 준비했다. 그녀에게 이곳을 떠날 허락을 구하는 눈빛을 보낸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빠르게 아한이 그를 말리며 말했다.
“이제 와서 우리 몇이 간다고 모두를… 살릴 순 없어요.”
아한의 말에 유안의 시선이 잘게 흔들렸다. 그 역시 진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의 생명력을 건 마법. 그것에 고작 유안의 힘 하나가 보태진다고 모두가 살 수 있을 만큼 빠르게 브레스가 없어지진 않을 거다.
하지만 그들이 브레스와 함께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걸 바라볼 수도 없었다. 유안과 같은 생각을 한 건지 그들의 대화를 듣던 스릴이 울며 아한에게 외쳤다.
“그래도 가야지! 작은 힘이라도 보태야지! 흑… 아, 한……!”
스릴의 외침에, 다그침에 아한 역시 치솟는 울음을 온 힘을 다해 눌러 내리며 고개를 돌렸다. 울고 싶었다, 아한도. 소리라도 치고 싶었다, 저들을 도우러 가자고. 왜 아한이라고 그러고 싶지 않을까? 저곳에 자신의 모든 사람이 있었다. 모든 의미가 있었다. 하늘에는 그의 할아버지와 르베나가 있었고 땅에는 아를과 후벤, 다한과 아벨디온이 있었다. 하지만 아한은 스릴처럼 소리치거나 유안처럼 다시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 여기서 내 마지막 마법으로 저 사람들을 구할 수 있다면 난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그렇게 할 거야. 하지만.”
아한이 떨리는 시선을 가까스로 창문에서 떼어내며 말했다.
“난 저들을 살리고 싶어. 같이 죽는 게 아니라. 미래를 같이 살아가고 싶다고!!!”
붉어진 눈시울을 참아내며 아한이 눈을 빛냈다.
“그러니까 우린 다른 방법을 써야 해요.”
비장함이 어린 아한의 말에 루안과 호안 왕자가 그를 바라보았다. 제발 무엇이라도 말해 달라는 그들의 간절한 표정에 아한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만약 이게 통한다면 모두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아한이 최악의 가정을 떠올리며 입술을 악물었다.
“실패하면 저들은 브레스를 막은 영웅으로 그렇게… 죽어 이름만을 남길 거예요. 무엇보다 이건. 우리의 의지만으로 되는 게 아니거든요.”
아한의 말에 모두가 짐작 가는 것이 있는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그들의 놀란 눈을 마주 본 아한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저들을 또 잃을 순 없어요.’
간절한 생각이 아한에게 힘을 모아줬다. 아한의 의도를 눈치챈 유안과 루안, 호안 왕자와 스릴, 제노스와 크론 마저 서둘러 그들의 남은 모든 힘을 아한에게 보태기 시작한 것이다.
아한의 말대로 이 마법은 분명 어렵지만 되기만 한다면 모두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에.
부름에 응답하는 사람이 있어야 가능한 마법. 그들이 동의를 해야 발현 가능한 마법. 그래야 모두를 소환할 수 있는 마법.
충만해지는 모두의 힘을 느끼며 아한이 애원했다.
‘우리를 버리지 말아요.’
곧 모여든 모두의 힘이 아한의 전신에서 알 수 없는 색으로 피어올랐다.
‘저들의 희생이 지금의 당신들을 살렸으니 이젠 당신들이 저들을 지켜줘요.’
번뜩. 아한이 눈을 뜨며 외쳤다.
“디오니스.”
아한이 자신의 시동어를 말하자 이제껏 모여든 모두의 염원과 간절함이 마법의 빛으로 번쩍거리며 화했다. 그때, 모두를 한 번씩 둘러본 아한이 마지막 힘을 다한 마법의 주문을 힘주어 외쳤다.
“소환에 응해 주세요. 아르쉘, 대륙의 모든 사람들이여.”
아한의 떨리는 주문이 끝난 순간이었다. 아한과 그에게 힘을 보탠 모든 이들의 입에서 토해진 엄청난 양의 선혈과 함께 하늘과 땅을 가득 뒤엎을 어둠이 사위로 내려앉은 것은.
아마도 지금 이 순간조차 무의식중에 절대적 존재로 인한 멸망을 거부하는 모든 이들도 자신의 힘을 잃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조금 더 힘을 내준다면, 아한의 부름에 응답해 준다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저항하기보다, 가만히 순응하기보다. 한 발자국만 용기 내어 나와준다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들을 구하기 위해, 거대한 브레스를 막기 위해, 대륙의 모두를 위해. 자신의 생명조차 모두 소진하는 저들을 구할 수도 있었다. 이것만이…….
“마지막 희망이에요.”
아한의 눈에서 순간 이제껏 참았던 눈물이 쉴새 없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흑!!”
곧이어 창밖을 내다본 아한의 입안에서 간절함과 초조함을 담은 것들이 한참 뒤섞이더니 이윽고 참을 수 없는 울음으로 터져 나왔다.
“아흑……!”
하늘과 땅을 디딜 틈도 없이 가득 채운 그것은 오직 사람. 대륙의 모든 마법사들과 기사들이 그들의 소환에 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