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제4장. 르베이나 (70)
르베나가 삶을 선택한 순간, 모든 이들의 얼굴이 환희에 물들었다. 그것이 곧 자신들의 죽음일지 모르는데도.
마찬가지로 르베나의 선택을 들은 드래곤의 마지막 말이 모두에게 들려왔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구나. 이번 세상은 여기서 끝을 내야지.」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더 이상 그의 존재가 어디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늘은 다시 맑아졌고 높이 떠오른 정오의 해는 밝았으며 세상 어디에서도 그의 위압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남긴 드래곤들은 브레스를 담은 채 하늘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신의 대리자라고 자신을 칭한 드래곤이 사라지면서 모두의 몸을 구속하던 힘도 없어졌다. 동시에 신력과 마력이 모두 돌아왔고 이에 르베나가 가장 먼저 하늘로 올라섰다.
“늑대들을 부탁하지.”
르베나가 하늘로 올라서며 아벨디온과 다니아에게 말하자 그들이 더없이 환하게 웃으며 검을 뽑아 들기 시작했다. 파벤더와의 전쟁이 끝난 세상이 이제 신의 대리자, 드래곤의 형벌을 마주하는 시간에 도달한 것이다.
* * *
“눈을 노려!!”
아를의 외침과 함께 여기저기서 높이 뛰어오른 기사들이 서로 합을 맞추며 거대 늑대의 눈을 노리기 시작했다. 몸이 투명하게 되어 있어 어디를 베어도 다시 재생되는 늑대들을 상대하며 터득한 단장의 기술을 빠르게 적용한 것이다.
“비켜, 다한!”
라웅의 외침에 맞춰 다한 역시 상대하던 늑대를 제쳐두고 여유롭게 고개를 숙이자 그 위로 다른 늑대의 날카로운 발톱이 지나갔다. 동시에 라웅의 검이 다한을 노린 늑대의 눈을 향하자,
“캬악!”
하는 소리와 함께 늑대가 멀어졌다. 라웅이 멀어진 늑대를 한 번, 다한을 한 번 바라보았다. 그러자 다한이 어깨를 으쓱했고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이 달아난 늑대를 향해 함께 달려 나갔다.
“랄프 조심해!!”
룬이 랄프에게 향하는 늑대를 쫓으며 외치자 부리나케 달아나던 랄프 역시 그를 보며 외쳤다.
“전 발이 빠르니 룬 경이나 조심하세요!”
그 순간 랄프를 쫓던 늑대가 뒤로 돌아서자 룬이 긴 검기를 재빨리 뽑아 달려들었다. 하지만 휙-! 자신의 검기가 늑대의 눈을 비켜 찌르자 룬의 얼굴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룬 경이나 조심하라니까요!”
그때 곧장 길게 뻗어온 검기가 자신이 놓친 늑대의 눈을 베어 내는 순간, 씩 웃은 랄프가 그 뒤로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땅에 착지한 룬이 어느새 옆에 내려선 랄프와 웃으며 서로를 마주 보았다. 휘익-! 하지만 금세 드리우는 그림자와 함께 금빛의 검기가 그들 위로 터져 나왔다. 후두둑-! 거대 늑대의 발들이 쏟아짐과 동시에 그것마저 베어 낸 아를의 시선이 놀란 랄프와 룬을 향했다.
“정신 놓지 말아라.”
둘을 향해 짧게 내뱉은 아를이 곧바로 도망가는 늑대의 뒤를 쫓았다. 동시에 그의 시선이 높이 뜬 하늘의 드래곤들과 그들 주위를 감싸는 마법사들의 모습을 향했다.
정확히 말하면 모든 하늘의 힘을 끌어모으고 있는 검붉은 마력의 베이라에게로.
하늘로 올라간 드래곤들이 모두 브레스를 준비하자 르베나가 자신의 모든 마력을 해방시켰다. 동시에 그녀의 어깨에 올라선 팅 역시도. 곧 하늘에서 번쩍번쩍한 빛과 함께 어마어마한 빛이 그녀를 향해 내려왔다.
“공기 중의 수증기를… 얼리고 있어?”
그 모습을 보고 놀란 스릴이 중얼거리자 아한이 웃으며 말했다.
“누나는 성질을 변형시키는 마법도 사용해. 그리고 브레스를 얼리려면 우리도 서둘러 얼음 마법을 준비하자.”
방금까지 울고불고 난리를 치던 아한과 스릴이 사이 좋게 얼음 실드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에 모두가 르베나의 의도를 깨닫고 힘을 다해 각자의 얼음 실드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건 저희가 먼저 막을게요!”
순간 맥스의 외침과 동시에 붉은색 드래곤이 브레스를 쏘았다. 이에 디오니스의 베이라들과 젠의 세츠들이 만들어 낸 실드가 순식간에 그것을 가로 막았다. 하지만 대치상황일 뿐 완전히 없애지는 못한 상황.
“저 정도 실드로 대치라니 긴장 좀 해야겠군.”
루시드의 말과 동시에 주황색 드래곤이 두 번째 브레스를 쏘았다.
이에 루시드와 아사드, 룩센 공작과 유안, 루안이 달려들어 그것을 막았다.
“이대로면 밀립니다!”
하지만 조금씩 밀리는 실드를 보며 유안이 외치자 모두 좀 더 실드를 크게 펼쳤다. 그 힘에 주황색 브레스가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세 번째가 와요!”
아한의 외침과 동시에 노란색 드래곤이 브레스를 쏘자 아한과 스릴 공주, 가스트와 칸이 만들어낸 실드가 화려하게 펼쳐지며 맞서 그것을 막았다. 팽팽하게 당겨질 만큼 치열한 대치였으나 빨간색보다 훨씬 뜨거운 온도를 담은 노란색 브레스는 크고 강했다. 그 순간이었다.
“젠장, 뚫리겠어!!”
맥스의 외침과 동시에 붉은색 브레스가 그들의 실드에 균열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를 따라 주황색, 노란색의 브레스도 점점 크기와 열을 키우며 자신들을 가로막는 실드를 뚫기 시작했다.
“이러다 당하겠어요!”
루안이 크게 소리친 순간이었다. 지지직-! 소리와 함께 그들 실드의 균열이 점점 커지다가 이내 완전히 깨져 버린 것이다.
화악---!!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하고 있던 레턴이 곧장 붉은색 브레스 앞으로 가 커다란 주황색의 실드를 펼쳐냈고 호안 왕자역시 주홍색의 실드 앞으로 가 금빛의 신력을 펼쳐냈다. 마지막으로 루드바하가 노란색의 브레스 앞에서 자신의 신력을 넓게 펼치며 위를 바라보았다. 르베나가 모든 브레스를 얼려 버릴 마법을 준비하고 있는 그곳. 하지만 마지막 파란색 드래곤은 이를 기다리지 않겠다는 듯 마지막 브레스를 쏘기 시작했다.
“르베나!!”
“누나!!”
“언니!!”
파란색 브레스가 르베나가 있는 곳을 향해 쏘아짐과 동시에 루드바하와 아한, 스릴이 그녀를 애타게 불렀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이 그들과 마주친 순간.
콰과광……!! 하늘이 포효하듯 울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들을 둘러싸던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그걸 본 한 세츠가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림과 동시에 그곳에 존재하는 모든 수증기를 향해 르베나가 명했다.
“모든 것을 얼려라, 르베이나.”
붉게 타오르는 시선으로 그녀가 자신의 시동어를 외쳤다. 그러자 하늘에 존재하는 모든 수증기가 자신의 성질을 바꾸어 스스로 얼어붙기 시작했다. 심지어 세 곳으로 흩어져 있는 각각의 브레스를 향해. 그걸 확인한 르베나의 몸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어느새 자신을 지나쳐 디오니스를 향하는 파란색 브레스를 향해 날아갔다. 그 순간 그녀의 손에 모인 엄청난 양의 마력이 한순간에 얼음으로 변하며 발현됐다.
“너는 절대.”
쾅!!! 르베나의 실드와 맞부딪힌 파란색의 브레스가 차디찬 얼음 방패에 밀려났다. 이를 보며 르베나가 짓씹듯 말했다.
“디오니스로 갈 수 없다!”
콰콰광……! 순간 하늘이 그녀에게 분노한 듯 몸을 떨었다.
“르베나.”
르베나의 실드가 땅으로 향하던 브레스를 막는 모습에 아를의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르베나 님이 막으셨어!!”
“모두가 브레스를 막고 있어!!”
“이길 수 있어!!”
마찬가지로 하늘을 바라본 다니아 기사들과 아벨디온이 크게 소리치며 더 빠르고 강하게 거대 늑대들을 해치우기 시작했다. 라웅과 바흐란 역시 하늘에서의 치열한 방어에 힘을 내듯 더 강하게 늑대들을 몰아붙이며 외쳤다.
“드래곤이 별거냐!”
“맞아. 우리가 더 세다 이 말이야!!”
이에 승기를 잡기 시작한 기사들이 거침없이 검을 휘두르며 거대 늑대의 수를 빠르게 줄여나갔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정오의 태양이 좀 더 뜨겁게 땅을 달굴 때쯤. 이윽고 마지막 한 마리가 쓰러지자 그들이 걷잡을 수 없는 환희에 잠겨 소리쳤다.
“이길 수 있어!!”
“르베나 왕녀님과 계속 함께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들이 대항한 건 마법의 시초이자 그들 모두의 힘을 가져갈 수 있는 존재. 그런 그가 노했기 때문일까. 그들의 환희는 결코 길지 않았다.
“젠장……!”
벅차오르는 기쁨에 하늘을 올려다보던 바흐란의 시선이 세차게 떨려왔고 같은 걸 바라본 라웅이 작게 욕을 뱉은 것이다. 동시에 다한과 아벨디온 그리고 아를의 시선 역시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모두의 실드가… 깨지고 있어.”
하늘에서 브레스를 막던 네 개의 실드에 모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을 보조할 더 이상의 마법사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음에도.
“금이 가고 있습니다!”
맥스의 외침에 모두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실드가 깨지면 디오니스와 젠, 자칸과 마를한 그리고 켄느까지. 온 대륙이 사라진다. 그들의 사람들, 지켜야 할 사람들과 함께 말이다.
“큭……!”
시동어까지 뱉었음에도, 자신의 마력을 다했음에도. 점점 강해지는 브레스의 힘에 르베나 역시 떨리는 손에 좀더 힘을 주었다. 쩌저적-! 그 순간 선명한 소리와 함께 모두의 몸이 휘청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젠장!”
그 모습을 본 르베나의 입에서 험한 말이 나오고야 말았다.
이제부터 단 하나의 실드라도 깨지면 모든 것은 돌이킬 수 없어진다. 그리고 지금부터 그 하나의 가능성을 막기 위해 세츠들과 베이라들에게 남은 건 마지막 생명력뿐이었다.
곧 르베나가 루드바하와 루시드, 아사드와 칸, 그리고 룩센 공작과 가스트를 보며 잠시의 망설임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갯짓이 무얼 의미하는지 아는 사람들의 얼굴은 옅은 미소로 얼굴을 흐렸고 모르는 사람들은 저마다 고개를 갸웃했다. 곧 루시드가 창백해지도록 온 힘을 다한 유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유안, 그걸 알고 있나?”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서 갑자기 던져진 루시드의 말에 유안이 살며시 미간을 구기자 루시드가 웃으며 말했다.
“그란델이 죽고 집을 나간 자네를 루드바하에게 부탁한 게 바로 룩센 공작님이네. 그리고… 루드바하와 나 역시 자네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음에 행복했지. 그리고 그만큼 자네가 더 행복해지길 바랐네. 그리고 이제 자네는 루안 공녀와 그런 미래를 갖게 될 걸세. 언제나 나와 루드, 그리고 아드리안이 자네를 축복한다는 걸 잊지 말게.”
불길한 그의 말에 유안이 얼굴을 찡그리자 룩센 공작 역시 옆에 있던 루안을 보며 말했다.
“나에겐 루안 공녀 말고 아들이 하나 더 있네. 그 아이의 이름은 라피엘이지. 난 그 아이가 부디… 이 전쟁이 끝나 쌍둥이 동생과 어머니와 함께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가길. 지켜주지 못한 아비에 대한 미움보다 룩센 공작가의 공작으로, 기대되는 앞날에 대한 희망으로 미소 짓길 내 마지막을 다해 바라고 있네. 그리고… 죽기 전에 그 아이를 봐서 무척이나 고맙고 행복했네.”
룩센 공작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루안이 고개를 갸웃하다가 갑자기 밀려오는 힘에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룩센 공작은 그런 루안에게 끝까지 시선을 떼지 못했다. 떨리는 손과 지워지지 않는 미소를 담은 채. 아사드 역시 점점 더 강해지는 브레스에 광활한 신력을 펼쳐 내는 호안 왕자를 흐뭇하게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호안, 나는 그리고 유리엔은 너와 아사벨의 미래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기대한단다. 언제나 이 할아비가 그리고 우리 가문이 너희를 지지할 것이다. 내가 죽어도, 그 이후에도.”
아사드의 불길한 말을 들은 호안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지만, 아사드는 대견한 손자를 보며 그저 웃기만 했다.
그리고 자꾸만 불길한 말을 하는 모두의 모습에 불안한 시선으로 두리번거리던 스릴 공주와 눈을 마주친 루드바하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따뜻한 음성을 내었다.
“르베나가 무척이나 기뻐했습니다. 공주님의 마력이 어쩌면 자신보다 더 환하게 피어날 것 같다고. 그러니 언제나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세요. 스릴 공주가 내는 길이 어떤 길이든 그곳에 당신은 혼자가 아닐 겁니다. 그리고 그 길을 내가 축복합니다.”
그의 말에 스릴이 불안한 얼굴로 고개를 도리도리 젓다가는 결국 눈물을 떨구었다. 그런 스릴의 모습을 본 아한이 놀라 크게 뜬 눈으로 가스트를 바라보았다. 아한의 시선은 그게 뭐든 제발 아니라고 말해달라는 애원이 가득했다. 하지만 가스트는 언제나와 같은 편안한 미소로 아한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한. 네가 나의 손자로 태어나주어, 내가 너의 할아버지일 수 있음에 언제나 고마웠다. 건강하거라. 그리고 사랑한다, 내 손자. 언제까지나.”
가스트가 말을 마치고 아한이 눈물을 떨어트린 그 순간이었다. 유안과 루안 그리고 호안 왕자와 스릴 공주, 아한의 주위로 여러 색의 텔레포트가 생겨난 건.
“모두 행복하길.”
그리고 누군가의 소망 가득한 말과 함께 그들이 사라짐과 동시에 네 개의 실드가 동시에 모두 깨져 버린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