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제4장. 르베이나 (69)
절대적인 존재의 선포에 세상이 포효했지만 디오니스의 누구도 그들 앞에 망설임을 새기지 않았다.
“르베나!”
그녀의 이름이 불린 것과 동시에 르베나의 곁에 다가서던 거대 늑대를 금빛의 신력이 강하게 휘감았다. 그와 동시에 루드바하가 그녀의 옆으로 가까이 다가서 앞을 가리고 섰다. 그리고 디오니스의 사방에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빛들이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그것은 절대적인 존재를 거스르는 힘이었으며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한 누군가의 생명이었다.
칸의 검붉은 마력이 거대 늑대들을 사정없이 쳐내며 검기를 휘두르는 아를과 거의 동시에 르베나의 곁으로 다가섰다. 동시에 가스트의 회색 마력과 아한과 스릴의 녹색 마력, 유안, 루안, 룩센 공작, 아사드와 루시드를 비롯한 모든 세츠들의 빛이 디오니스 베이라들의 마력과 함께 어마어마한 드래곤의 위압감을 뚫고 거대한 늑대들에게 돌진했다.
“이번엔 반드시 지킨다!”
후벤의 외침을 선두로 다한과 아벨디온 그리고 모든 다니아 기사들이 검과 검기를 빼든 채 베이라들과 세츠들을 도와 거대 늑대들에게 달려갔다.
“누굴 데려간다는 거야!!”
그들 못지 않게 크게 외친 바흐란의 외침과 그의 검에서 환한 신력이 뻗어나갔고,
“누나는 절대 못 데려가!!!”
“언니는 절대 못 데려가!!”
서로의 등을 맞대고 선 아한과 스릴의 손에서 영롱한 녹색의 마력이 거침없이 뿜어졌다. 루시드의 손에서 뻗은 신의 올가미와 아사드가 형상화한 신의 사슬 역시 사정없이 주위의 거대 늑대들을 향해 휘둘러졌다. 이윽고 남쪽 국경은 투명한 거대 늑대와의 전쟁으로 다시 달구어지고 있었다.
루드바하와 아를, 칸 역시 르베나에게 다가서는 모든 늑대들을 상대하며 그녀를 지키고 있었다. 그렇게 모두가 낸 신력과 마력, 검과 검기가 치열한 열기를 만들어 국경을 뜨겁게 지피고 있을 때였다.
「아직도 뭘 모르는군.」
드래곤의 거대한 음성과 함께 그들의 신력과 마력, 그리고 검기의 일렁임이 일순 멈춘 것이다. 이에 모두가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드래곤의 분노한 음성이 세상을 울렸다.
「그대들의 힘은 모두 베이라와 세츠를 만든 신의 것이다. 그리고 신의 대리인인 내가.」
콰과광……!! 하늘에서 벼락이 내리쳤다. 그리고 모두의 몸에 충만하던 힘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가스트가 허망한 눈으로 자신의 몸에서 빠져나가는 마력을 느끼며 외쳤다. 그리고 그건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내뿜던 모든 마력과 신력이 증발하듯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모두가 동요하는 사이 드래곤이 지엄한 하늘의 뜻을 전했다.
「쓰임을 다한 르베나 드 디오니스의 마지막을 원한다!」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섞이지 않은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일순 모든 이들이 땅에 강제로 무릎을 꿇었다. 누구도 그럴 의지조차 없었건만, 결코 거부할 수 없는 강한 힘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아를과 칸, 루드바하 마저 그 힘에 굴복하듯 땅에 무릎을 꿇었고 그것을 바라보는 르베나만이 서 있는 채로 떨리는 시선을 내려 그들 모두를 바라보았다.
「이것이 네가 거스를 수 없는 절대적인 힘이다. 그러니 들어라, 르베나 드 디오니스.」
르베나의 시선이 드래곤이 있다고 느껴지는 곳을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한번 강제하는 힘이 깃든 무거운 음성이 들려왔다.
「이 모두를 죽일 것이냐, 아니면 그때처럼 너의 목숨 하나로 이들을 살릴 것이냐.」
드래곤의 말에 르베나가 선뜻 입을 열지 못함과 동시에 크게 입을 벌린 거대 늑대 하나가 르베나를 향해 뛰어왔다. 그 순간이었다.
“어차피 검술은…….”
절대로 견딜수 없는 압박을 견디고 아를이 한쪽 다리를 편 것은. 그리고 자신의 검을 들어 다가오는 늑대의 다리를 힘겹게 베어낸 것은 말이다.
“신의 힘으로 만들어진 게 아냐!”
촤악-! 아를의 순수한 힘이 거대 늑대의 한쪽 다리를 베어 냈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얼굴이 벌게질 만큼 온몸에 가해지는 어마어마한 압박을 견뎌 낸 아를이 우뚝 섰다. 그러고는 망설임이 가득한 르베나의 얼굴을 한번 보고 그녀의 앞을 지키며 말했다.
“대답할 가치가 없는 질문이야, 르베나.”
감히 두 발로 설 생각조차 못할 압박을 견딘 아를. 그 순간 그가 견딘 무게를 증명이라도 하듯 그의 온몸이 단 한 순간에 찢기고 파열됐다. 그럼에도 아를은 흔들리지 않으려 노력하며 그녀의 앞을 지켰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었던 것처럼. 어느 상대가 나타났을 때처럼, 그렇게.
순간 뜨거운 무엇인가가 울컥 르베나의 가슴에서 솟아올랐다. 그리고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르베나, 저도 이것만큼은 아를 경의 말에 동의합니다.”
언제나 그를 아름답게 휘감던 금빛의 신력 한 자락도 없이, 루드바하가 서늘한 검 한 자루만 쥔 채 아를의 반대편에서 르베나를 지키고 선 것이다. 그 역시 엄청난 압박감을 이기고 일어선 것을 증명하듯 아를처럼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루드바하의 엉망인 모습에 아까보다 더 뜨거운 덩어리가 울컥 르베나의 목을 막아 왔다.
“미안하구나. 이전 삶의 네 곁에 내가 없어서. 그 모든 걸 너 혼자 겪게 해서.”
칸 역시 괴로운 표정으로 르베나의 곁에 다가왔다. 어떤 힘을 견디고 선 건지. 르베나가 형편없이 피투성이가 된 그를 본 순간 꽉 조여 오는 뜨거운 덩어리를 뱉어 냈다. 툭, 후두둑. 그리고 르베나가 뱉어 낸 그것을 옅은 미소로 닦아 낸 칸이 피가 잔뜩 묻은 검을 치켜들며 말했다.
“울지마라, 아가. 내가 말했잖니. 너는 혼자가 아니라고.”
르베나의 눈물을 마저 닦아준 칸마저 그녀를 둘러싸자 여기저기서 하나둘, 사지를 압박하는 드래곤의 힘을 이겨 내며 사람들이 움직였다. 그 바람에 멀쩡하던 모두의 피부가 터져나가고 여기저기 선혈이 낭자하게 튀기 시작했다. 하지만 늙은 가스트도, 어린 아한과 스릴도 그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팔을 한 번, 무릎을 한 번. 고통스럽고 힘들텐데도 남은 힘을 모두 쥐어짜듯 움직이며 서서히 일어선 그들의 모습에 이윽고 르베나의눈에서 또 한 번 뜨거운 것이 떨어졌다.
그렇게 꽤 많은 이들이 드래곤의 압박을 이기고 겨우 일어났을 때.
「어리석구나, 인간들아.」
드래곤의 씁쓸한 목소리와 동시에 하늘이 요동쳤다. 온통 검게 물든 하늘의 곳곳에서 빛이 터지기 시작했고 알 수 없는 진동이 서서히 대지를 감싸왔다. 일렁이던 하늘은 검은색의 조각처럼 찢어졌다 붙기를 반복하며 세상이 감당 못 할 어떤 힘에 울부짖었다. 이에 루드바하와 아를, 칸은 좀 더 가까이 모여서며 르베나를 감쌌고 다른 이들도 경계심을 담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큰 빛이 하늘을 둘로 가르듯 번쩍인 순간.
“오… 신이시여…….”
가스트의 탄식 어린 소리와 함께 지금 있는 늑대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것들이 하나둘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모두가 책으로, 구전으로만 전해 듣던 존재.
절대로 지금 그들의 앞에 나타나면 안 되는 존재였다.
“…드래곤.”
아한의 짤막한 말과 동시에 여러 색의 드래곤들이 무기질적인 눈을 가지고 엄청난 위압감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한 마리가 등장하자 온몸이 얼어붙었고 두 마리가 등장하자 주변의 공기가 모두 차갑게 얼어붙었으며 세 마리가 등장하자 모든 생명이 죽은 듯 숨죽였다.
마침내 마지막 네 번째 드래곤이 모습을 드러내자 그 위용만으로도 모두의 피부가 곤두서있었다.
「이것은 내가 만든 형상. 진짜 내가 아니다. 하지만 이들이 만들어 낸 한 번의 브레스에 너희 모두가 죽을 것이다.」
그의 말이 끝나자 모든 드래곤의 몸이 붉게 변하기 시작했고, 얼어붙었던 공기가 뜨겁게 달구어지기 시작했다.
「두 번의 브레스면 디오니스가 한 줌 재로 탈 것이며.」
그의 말과 동시에 그들의 몸을 변하게 만든 붉은 색이 목 근처로 올라왔다. 그러자 주변은 더 뜨겁게 일렁였다.
「세 번에 대륙의 절반이 죽을 것이다.」
곧 모든 드래곤의 브레스가 그들의 입 근처로 올라오자 숨 막힐 듯한 뜨거움에 모두가 헐떡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모두를 살핀 드래곤이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으로 대륙에 살아 있는 존재는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쿵. 그의 말에 르베나의 심장이 땅으로 툭 떨어졌다. 그 순간 드래곤의 눈이 아주 가까이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실체 없는 드래곤이 지금 그녀의 빠른 박동과 갑갑한 호흡, 그리고 치밀어오르는 수백만 가지 감정을 낱낱이 들여다보는 것만 같다. 어쩐지 벌거벗겨진 듯한 기분이 그녀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마지막 선택을 해라, 르베나 드 디오니스.」
드래곤들이 브레스를 뿜기 전 콧김을 뿜자 그것에 닿은 세상이 지워졌다.
「나와의 계약을 이행하고 모두를 살릴 것인가, 네가 살고자 대륙의 모두를 죽일 것인가.」
쿵! 큰 천둥이 분노한 듯 하늘을 울렸다. 그 순간 르베나의 시선이 숨도 쉬지 못한 채 그녀를 보며 고개를 젓는 모두의 얼굴을 차분히 담았다.
결코 어리석게 살지 않았다. 후회할 만한 행동을 하지도 않았다. 모든 걸음마다 이전 생의 자신과 비교하며 끊임없는 채찍을 휘둘러댔다. 아파도 견뎠고 힘들어도 참아 냈다. 가끔 자신이 진 무게가 너무 버거울 때조차 르베나는 한숨 한 번에 그것을 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 모든 것이 당연하다 생각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그녀의 곁에 살아 있고, 그들을 지켜볼 수 있는 그녀가 살아 있었기에.
또다시 겪어야했던 힘든 어린 시절의 무력함도, 누군가를 억지로 밀어내야 했던 고통도, 자신을 대신한 누군가의 죽음을 바라보는 슬픔과 자괴감도. 밑도 끝도 없는 좌절과 육체적 고통 앞에서도.
르베나는 의연하기를 선택했다. 그녀가 무너지지 않아야, 그녀가 흔들리지 않아야, 그들도 안심하고 살아갈 테니. 더이상 죽지 않을테니.
그렇게 이번 생을 전부 떠올린 르베나의 시선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순간마저 이길 방법을 찾는 루드바하와 아를, 칸의 투지 어린 눈빛. 끝까지 그녀를 포기하지 않을 가스트의 깊은 시선. 필사적인 후벤, 눈물을 멈추지 못하는 스릴과 아한. 그리고 못 견디게 화가 나 보이는 다한과 바흐란. 절실한 표정의 호안 왕자. 르베나의 입에 모든 시선을 모은 채 헐떡이는 숨을 몰아쉬는 아벨디온. 그리고 루시드와 아사드, 룩센 공작과 유안, 루안, 라웅, 레턴. 모두가 그녀에게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안 돼, 누나. 절대로. 차라리 다 같이 싸워. 드래곤이든 신이든… 그냥 다 같이 싸우다 죽어. 흑… 화 낼 거야!! 두 번 다시 안 볼 거야. 그러니까 이상한 선택은, 흑… 제발 하지 마!!”
아한의 비명과도 같은 말. 그 외침에 아한을 바라보고 살짝 미소 지은 르베나가 천천히 모두와 한 번씩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붉은 입술을 열었다.
“우리를 억압하는 이 힘을, 우리는 무슨 짓을 해도 이길 수 없어요.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결국 우리 앞엔 죽음뿐이겠죠.”
“르베나!”
르베나의 차분한 말에 아를이 헛소리하지 말라는 듯 그녀를 불렀다. 루드바하와 칸 역시 절박한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다. 하지만 이제 르베나는 눈을 감고 있어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녀의 입술은 계속 움직였다.
“숨 막히는 지금의 뜨거움은 곧 우리를 태워 버릴 불꽃이 될 거고 드래곤의 브레스에 우리는 모두 고통스럽게 죽어갈 겁니다. 우리가 지키고자 한 모든 생명이 그들의 뜨거운 숨에 한 줌 재가 되어 버릴 거예요.”
르베나의 말에 스릴이 울며 소리쳤다.
“그래도 돼요! 언니가 살린 우리니까 그래도 돼요! 흑… 그러니까 언니, 또 우리만 두고… 흐흑… 가지 말아요!!”
스릴 공주의 말에 눈시울이 붉어진 르베나가 울컥 솟아오르는 감정을 겨우 내리누르며 여전히 감은 눈으로 말했다.
“우리가 지금 드래곤에 대항해 살 수 있는 확률은 한여름에 내리는 함박눈만큼이나 낮아요. 그러니 여러분.”
그 순간 르베나가 번쩍 눈을 떠 반짝이는 시선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녀의 눈이 주위의 모두를 향했다.
“부디 나와 함께 그 희박한 확률의 길을 걸어 주세요. 그 길의 시작은 제가 내겠습니다.”
여느 때보다 붉게 타오르는 르베나의 시선이 오랫동안 감춰 왔던 생명의 불꽃을 터뜨렸다. 그것은 누구도 포기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희생양으로 내던지지 않는 불꽃의 새로운 개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