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248화 (248/276)

248화

제4장. 르베이나 (68)

머릿속을 지배하던 모든 영상이 끝나자 파벤더와의 전쟁에 참여한 많은 이들이 넋이 빠진 듯 보였다. 어떤 이는 알지 못하던 삶이었으나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르베나에게 칼을 겨눈 자신을 부끄러워하였고, 어떤 이는 죽어간 가족과 동료의 죽음에 슬퍼했다. 또 어떤 이들은 그곳에서도 디오니스와 백성들 지키다 죽어간 자신을 떠올리며 조용히 눈물 흘렸다.

“뭐야, 폐하가 죽었어? 왕녀님 살리려고?”

갑작스러운 영상에 어안이 벙벙한 라웅이 큰 소리로 묻자 루드바하 역시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르베나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가스트의 죽음과 르베나의 희생을 보게 된 아한과 후벤도, 과거 르베나를 겨누던 칼날이 잘못됨을 깨닫고 뒤늦게 백성들을 지키다 죽어간 아를도.

모두가 혼란스러운 시선으로 르베나를 보았다. 그녀라면 왜인지 그 영상이 무얼 말하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에. 하지만 르베나는 흔들리지 않는 시선으로 모두에게 말했다.

“이건 드래곤의 장난일 뿐입니다. 그러니 동요하지 마십시오.”

자신이 희생했던 시간. 서로가 서로에게 칼을 겨눈 전쟁. 그 모든 것을 알게 되면 사람들이 혼란스러울까 르베나는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번만큼은 쉽게 속아 주지 않았다.

특히 어리지만 누구보다 이면을 정확하게 파악할 줄 아는 아한은 절대 도망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누나는 항상 뭐든 걸 다 아는 사람 같았어. 아니, 경험한 사람 같았어.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미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태연해 보였고 또 가끔은 슬퍼 보였지. 그리고 우리의 안전을 이상할 정도로 과하게 신경 썼어. 마치 우리의 죽음을 겪기라도 한 사람처럼.”

아한이 말하자 후벤 역시 르베나를 바라보며 떨리는 눈빛으로 말해다.

“그리고 처음부터 저와 사나를 일부러 피하셨지요. 마치 저희가 르베나 님께 가까워지면 안 되는 사람들처럼. 반대로 르베나 님과 가까이하면 저희에게 무슨 일이라고 생길 것처럼.”

떨려오는 후벤의 말에 르베나는 그 순간까지 시선이 흔들리지 않도록 노력하며 침착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대는 ‘다니아’가 이미 작동된 걸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다니아’를 어느 왕이 썼는지는 말해 주지 않았죠.”

루드바하의 말에 르베나가 태연한 척 가장하며 빠르게 답했다.

“말했잖아요, 루드. 그저 우연히 알게 된 거고 자세히는 모른다고.”

르베나의 말에 순간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얼굴로 루드바하가 소리쳤다. 르베나에게 소리치는 그의 생소한 모습에 모두가 상황도 잊은 채 놀랄 정도로.

“거짓말은 그만해요, 르베나!! 그대는 그 정도로 불확실한 정황에 ‘다니아’를 넘길 사람이 아니에요. 그보다 더 많이 사람들을 아끼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당신에게 캐묻지 않은 건, ‘다니아’를 사용한 왕이 누군지 묻지 않은 건. 그대가 언젠가 스스로 말할 거라 믿었기 때문이에요.”

잠시 울컥한 루드바하가 이어 말했다.

“하지만 지금 당신의 표정을 봐요! 침착해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아요, 르베나. 그대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일로 지금 불안해하고 있고, 걱정에 가득 차 있어요. 그리고 그게…….”

루드바하의 눈시울이 붉어짐과 동시에 르베나의 몸이 움찔 떨렸다.

“르베나, 그대와 관련된 거라면 난 더 이상 모른 척하지 않을 겁니다.”

‘다니아’가 작동되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니 자신의 과거를 알게 될 사람은 절대 없으리라 확신했다.

하지만 지금 그가, 언제나 그녀에게 웃어주던 그가, 그녀에게 무한정의 믿음을 주던 그가 그녀를 책망한다. 모두에게 숨긴 죄를, 모두를 속인 죄를, 다른 사람도 아닌 루드바하가.

떨리는 시선의 르베나를 보며 루드바하가 애가 탄 목소리로 소리쳤다.

“왜 나를, 우리를 이렇게 힘들게 만들어요, 르베나. 드래곤이 허상을 보여 줬다고요? 그게 전부 거짓이라고요? 당신이 함정에 빠진 그 순간 얼마나 지독한 배신감을 느꼈는지, 당신이 혼자가 된 그 순간 얼마나 두려웠는지! 후벤과 가스트가 당신을 구하다 팔이 잘리고 생을 마친 순간 얼마나 아파했는지! 그래서 그대가 뭘 걸고 다시 우리를 살린 건지 그 감정까지도 고스란히 머릿속에 새겨졌는데… 그게 전부 거짓이라고요?”

“아…….”

루드바하의 이어진 말에 르베나가 자신도 모르게 짧은 소리를 내었다.

책망이 아니다. 그의 말은 이 순간마저 책망이 아니었다. 모두를 속인 이 순간마저.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르베나의 시선이 세차게 흔들리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루드바하는 결국 그의 청명한 눈동자에서 눈물을 떨어뜨리고야 말았다.

“드래곤은 모든 마법의 시초이기에 절대 거짓을 담지 않는다지요. 르베나, 내가 지금 묻고 싶은 건… 우리가 본 내용의 진실 여부가 아니라, 어째서 그대가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았던 과거의 시간을, 그 무게를 왜 우리에게, 아니 최소한 나에게라도 나눠 주지 않았는지예요.”

한 방울로 시작한 그의 눈물은 어느새 여러 줄기로 변해 있었다. 이어 칸의 눈에서도.

가스트와 후벤, 아한은 물론이고 아를마저도 괴로운 표정으로 르베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들을 본 르베나의 손이 옅게 떨려 왔다.

‘무서웠어요. 내가 겪은 과거를 알게 되면 날 싫어할까 봐. 오지 않을 일은 알 필요가 없다고, 내가 다 짊어지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루드, 당신이 내게 다가오고, 사나와 후벤, 가스트와 아한이 다시 미소 짓고, 이전의 삶에서 나에게 등을 돌린 채 가까워질 수 없었던 아를이 친구가 되고.’

그 순간 르베나는 눈조차 깜빡일 수 없었다. 그러면 혹여 간신히 숨겨 둔 자신의 감정이 감았다 뜬 눈에 비치기라도 할까 싶어.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오만방자하고 나밖에 모르던 그때의 나를 알게 되면 모두가 내게 등을 돌릴까 봐. 사실은 그게 무서웠어요.’

툭. 소리를 타고 나오지 못한 르베나의 말은 눈물이 되어 떨어졌다.

‘그대들이 좋아하는 지금의 나랑은 다른, 후회와 번민으로 가득 찬 그때의 나를 알려 주고 싶지 않았어요. 내가 조금 더 아프면, 내가 조금 더 버티면, 조금 더 힘들면… 그러면 그건 내 기억 속에만 영원히 머물 줄 알았어요.’

후두둑. 또다시 전하지 못한 말은 더 많은 양의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그리고 눈물로 흐려진 시야 속으로 모두의 얼굴이 유난히 선명하게 박혀 왔다.

누구보다 고통스러운 얼굴을 애써 고개 돌린채 울고 있는 칸, 역시 숨죽여 울고 있는 아한. 끝까지 자신의 주군을 지키지 못한 죄스러움에 고개를 떨군 가스트와 후벤, 그리고 아벨디온.

기억조차 나지 않는 어느 시간, 수많은 적군 앞에서 홀로 외로이 서 있던 그녀에게 한순간이나마 검을 겨눴다는 자책에 혼란스러워하는 아를. 그리고 그녀의 희생에 눈물을 떨구는 수많은 이들. 그리고 루드바하.

르베나가 그들을 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입을 여는 그사이에도 모두의 모습이 아프게도 박혀 들어 자꾸만 목이 메었다. 하지만 지금마저 침묵한다면 르베나는 이제 이들을 영원히 잃게될까 두려워졌다.

그 두려움을 이제는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여러분이지만 여러분이 아니었어요. 그때의 저와 지금의 제가 다른 것처럼.”

잠시 말을 끊은 르베나가 조금 더 차분함을 유지하려 애쓰며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노력과는 달리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슬퍼 마세요. 괴로워 말고 자책하지 마세요. 그때의 여러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했습니다. 절대 그대들을 아프게 하려고… 숨긴 게 아니에요. 잃을까 봐 두려워서… 그래서 숨겼어요. 그대들을 책망해서, 원망해서 숨긴 게 아니에요.”

후두둑. 또다시 떨어진 눈물이 르베나의 앞을 가렸다.

“일국의 왕으로서 나라 하나 지키지 못한 내가 부끄러워서. 주위를 돌아보지 못한 내가 실망스러워서. 그런 나를, 알리고 싶지 않아서… 숨긴 거예요.”

꽉 막혀 나오지 않는 목에 르베나가 힘을 주었다.

“무엇보다 그 모든 건… 제겐 이미 지나간, 여기 있는 모두에겐 기억에조차 남지 않은 어느 이야기일 뿐입니다.”

말을 끝낸 르베나가 미처 불안함을 모두 감추지 못한 시선으로 모두를 둘러보았다. 이전 생의 일에 대해 처음 꺼낸 그녀의 진심에 모두가 실망할까 두려운 것처럼.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루드바하가 다가와 그녀를 자신의 품에 안았다. 차분한 말투와는 달리 사정없이 떨리는 그녀의 몸을 당겨 안으며 그가 말했다.

“하지만 당신에겐 모두 일어난 일이죠, 르베나.”

그의 말에 르베나의 시선이 한 번 더 떨려왔다. 하지만 루드바하는 그런 르베나를 더 꼭 안으며 말했다.

“당신에겐 생생하게 남은 아픔이죠, 르베나. 그래서 미안해요. 그곳에서 그대를 더 일찍 못 알아봐서. 그 무섭고 아픈 곳에 혼자 세워 둬서. 그대의 눈물을 닦아 주지 못해서. 너무 늦게 알아서 미안해요, 르베나.”

루드바하의 말에 겨우 말라가던 르베나의 눈에서 또다시 눈물이 흘렀다. 그의 품이 너무 따뜻해서. 그리고 외로웠고 아팠던, 그래서 무서웠던 그때의 르베나도 이제야 겨우 그 온기에 닿아서.

지나간 일이라 그저 무표정으로 바라보았던, 강해진 몸 뒤에 숨겨 놓았던 그때의 르베나를 비로소 마주 보게 되어 눈물이 났다.

하지만 드래곤은 그들이 오래도록 마음을 나누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드래곤의 압박이 다시 한번 모두를 조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모두에게서 영상을 거둔 그가 말했다.

「르베나 드 디오니스. 이번 생의 네 목숨은 그냥 준 것이 아니었다.」

곧 그의 시선이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채 굳어 있는 파벤더와 흑마법사들을 향하는 게 느껴졌다.

「네가 생을 다시 얻음으로써 너에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다행히도 넌 그걸 잘 해 주었지.」

다시 드래곤의 시선이 닿자 파벤더와 흑마법사들이 고통이 더해진 듯 시선을 격렬하게 떨었다. 아까부터 계속된 고통에 이미 이지를 잃은 자도 보였다. 생명을 유지시키는 힘마저 몸에서 빠져나가는 상황 속에서 그들은 이윽고 서서히 죽음에 이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본 르베나가 어느새 루드바하의 품을 벗어나 서늘한 눈으로 물었다. 입 밖으로 내고 싶지 않지만 더 이상 도망칠 곳조차 없기에.

“그게 ‘보토니에’를 처단하는 일이었나?”

서릿발 같은 그녀의 말에 드래곤이 활짝 미소 지은 느낌이 드는 건 착각일까. 곧 파벤더를 자세히 들여다 보던 드래곤의 시선이 르베나를 향하는 게 느껴졌다.

「맞다, 그때의 네가 ‘다니아’를 쓰지 않았다면 세상은 저들의 손에 들어갔을 것이다. 너를 잃은 유파시드는 자괴감에 시들어 갔을 테니 세상을 구할 이는 없었겠지. 그리고 지금의 세계 역시 네 존재가 없었다면 유파시드가 저들의 존재를 아는 것도 늦춰졌겠지.」

“그걸 막기 위해… 르베나의 시간을 되돌렸다고……?”

「더러운 것이 없는 세계를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을 듯하여.」

드래곤의 말에 이번엔 루드바하가 낮은 목소리로 분노를 담아 말했다.

“결국 이전 생의 내가 아니었어도 너는 르베나를 살려 뒀겠군.”

그의 말에 홀홀 미소 지은 드래곤이 고개를 젓는 느낌이 났다.

「아니, 난 계약을 중요시하는 자. 그것은 나와 그녀의 신성한 계약. 그때의 난 르베나 드 디오니스의 소원을 들어주는 대가로 그 목숨을 거두고 무너져 가는 세계를 그냥 관조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가 내뿜는 주변의 공기에서 무언가 아주 조금 따스한 느낌이 흘러나왔다.

“처음 본 그녀를 위해, 또 자신을 죽이려는 이들과 디오니스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는 너희를 보며 한 번 더 기대하고 싶어졌지. 어쩌면 아직 이 세계의 가능성이 조금 더 남았을지 모른다는. 아주 어쩌면 너희 스스로 이 세상에 생명을 불어넣을지 모른다는 기대 말이다.”

그러나 이내 옅은 따스함은 거두어졌고, 드래곤의 표정에서도 미소가 사라졌다.

「너희가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으니 이제 우리의 계약을 마무리하겠다.」

그 순간이었다. 이제껏 모두를 가만히 옥죄고만 있던 공기가 말도 안 되게 그 밀도를 높인 것은.

“크… 윽!!”

수많은 이들이 그것을 버티지 못한 채 굳어지는 자신의 몸을 놀라 바라보았다. 이에 아를이 억지로 몸을 움직이며 소리쳤다.

“계약을 마무리하다니!! 무엇을!”

아를의 외침에 드래곤이 답했다.

「나는 분명 경고했다. 내가 다시 너희 앞에 나타나는 날. 너희는 르베나 드 디오니스를 영원히 잃게 될 거라고.」

그의 목소리는 지금까지와 달리 모두의 머리가 아프도록 강하고 견디기 힘든 무거움을 담고 전해졌다.

「그것은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담보로 한 계약이었고.」

쾅!! 그의 말에 동의하듯 하늘에서 거대한 천둥의 소리가 내리쳤다.

「절대로 깨지 못할 나와의 신성한 약속이었으며.」

아르릉-!! 곧 사방에서 거대한 존재들이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모두의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절대로 회수하지 못할 조건을 건 맹세였다.」

그 순간 온 세상을 울릴 듯한 그의 목소리가 하늘에서 쏟아지는 거대한 크기의 검은 늑대 수십 마리와 함께 울려 퍼졌다.

「르베나 드 디오니스. 너는 이전의 삶에서 유파시드의 목숨을 대가로 존재해서는 안 될 이번 생을 살았다. 그리고 너의 모든 바람을 채웠다.」

곧 르베나의 시선이 잘게 떨려 왔다. 그것을 마주한 드래곤의 눈빛이 강하게 빛났다.

「너는 외로웠던 유년 시절을 충만한 애정으로 채웠고, 네가 소중히 한 이들의 목숨을 지켰으며, 너의 진짜 적이 누구인지 찾아냈고, 끝내 네 왕국의 멸망을 막아냈다.」

선연한 말은 르베나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 가졌던 후회와 번민을 숨길 수 없게끔 드러내고 있었다. 르베나는 적나라하게 드러난 속내를 되새김질하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드래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러니 나는 너와 한 계약에 따라 이제 너의 생을 거두겠다.」

콰르릉!!! 드래곤이 지엄한 목소리로 선언한 것과 동시에 그가 소환해 낸 거대한 늑대들이 곳곳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어둠을 닮은 털과 성채만 한 몸, 그리고 태양을 닮은 눈을 가진 그것들이 르베나를 보호하려 다가선 모든 이들의 앞에 대치했다.

그리고 드래곤의 판결이 그곳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들에게 지엄하게 선포되었다.

「이제 나와의 계약을 이행해라, 르베나 드 디오니스!」

드래곤의 목소리는 마치 어길 수 없는 하늘의 명령과도 같이 천둥을 닮은 소리로 쏟아졌다.

그리고 그가 보낸 거대 늑대들의 눈빛은 그 명을 수호하는 존재들처럼 아무도 르베나의 곁에 다가서지 못하도록 빛났다.

세상이 울부짖고 어둠에 찢긴 햇빛이 산산조각 난, 어둡고 슬픈 아침. 그곳엔 더 이상 모두를 따뜻하게 안아 줄 빛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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