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제4장. 르베이나 (66)
여유롭게 지어 보인 미소와는 달리 사납게 변해 버린 얼굴과 주름진 피부, 그리고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지저분한 드레스가 세나르의 현재를 여실히 말해 주었다. 그리고 자신을 훑어보는 르베나의 시선에 수치심을 느낀 세나르가 조금 전의 여유를 던져버리고 광기에 얼룩진 눈으로 짓씹듯 말했다.
“르베나 드 디오니스. 넌 내가 어떤 시간을 견뎌 왔는지 결코 모를 거야.”
정제되지 못한 세나르의 분노에도 르베나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자 세나르가 한 걸음 더 다가서며 독기어린 얼굴로 소리쳤다.
“감히 천한 네가! 내 아들을 죽이고 왕녀가 된 괘씸한 네가! 사라지지 않는 지옥의 불구덩이에 떨어지길 매일 밤 자지 않고 기도했지. 먹지도 자지도 않고 말이야! 그리고 드디어 오늘이 왔어. 내 손으로 직접 내 아들의 원수인 너와 디오니스를 무너뜨릴 오늘이!”
곧 세나르가 비척비척 걸어가 파벤더에게서 ‘다니아’를 넘겨받았다. 그 모습을 본 르베나가 이제까지 변함없던 표정을 살짝 허물며 말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그건 디오니스 왕의 피로만 발현된다. 그러니 세나르 당신은 할 수가 없다는 말이지.”
조금 서늘한 르베나의 말에 세나르가 웃어 보인 순간이었다. 그녀가 보존마법이 걸려있는 어느 작은 병을 꺼내든 건. 곧 그 병을 열어 그 속에 담긴 검붉은 액체를 ‘다니아’에 천천히 떨어트리며 세나르가 말했다.
“멍청한 르베나. 도대체 파벤더 님께서 왜 자신의 수하를 젠픽스에 넣은 거라 생각하니? 고작 아한과 스릴 공주 같은 어린아이들을 납치하자고? 아니! 그 모든 건 네가 죽인 내 아들의 피를… 받기 위해서였단다. 내 복수를 위해서!”
이제까지와 달리 세나르가 만족스럽게 웃어 보이자 그 모습에 스릴 공주가 외쳤다.
“바보 같긴! 드록 왕자님을 죽인 게 바로 파벤더라고요!!”
하지만 스릴 공주의 말을 들은 세나르는 오히려 피식 웃어 보였다.
“파벤더 님께서 멍청한 너희들은 르베나에 대한 잘못된 믿음으로 그리 말할 거라 하더구나.”
그 말에 스릴 공주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세나르는 이를 무시한 채 말했다.
“르베나 드 디오니스. 똑똑히 보아라. 왕이 아니어도 작동되는 ‘다니아’를. 그리고 나의 드록의 복수를!”
그 순간이었다. 르베나와 루드바하. 그리고 모든 이들의 눈에 드록의 피가 닿은 ‘다니아’에서 새어 나온 빛이 담긴 것은.
‘만약 젠픽스에서 잡힌 드록의 살인자가 사실 나를 모함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늘을 위해 그의 피를 가지러 온 거라면? 드록이 혹시라도 언젠가 그의 계획에 방해가 될까 죽이러 온거라면?’
순간 깨달은 사실에 놀라움이 깃든 르베나의 시선이 환한 빛을 뿜어내는 ‘다니아’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파벤더와 세나르의 얼굴에는 미처 숨기지 못한 욕망과 분노 그리고 희열이 차례로 지나갔다.
“죽여 주마, 르베나. 지옥에 가서 내 아들의 발에 무릎 꿇거라!”
빛나는 ‘다니아’를 보며 세나르가 외치자 르베나가 선연한 목소리로 떨림을 누르며 말했다.
“네 아들도 지옥에 있다는 걸 알긴 하나 보지?”
도발적인 르베나의 말에 세나르가 분노하며 소리치려 했다. 하지만 파벤더가 그녀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은 채 부드럽게 말했다.
“이제 곧 다 죽을 인간들입니다. 왕비의 체통을 지키시지요.”
파벤더의 말에 세나르가 르베나를 노려보던 눈을 겨우 돌리며 간절하게 부탁했다.
“부디 저것을, 그리고 디오니스를 없애 주세요.”
빛을 내뿜는 ‘다니아’를 넘기며 전한 세나르의 부탁이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파벤더가 르베나와 루드바하 그리고 그들의 곁에 선 수많은 지원군과 디오니스의 기사들, 아벨디온을 보며 말했다.
“이제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다. 너희가 감히 상상하지 못한!”
반백 년의 소망을 담은 그의 손은 빛을 발하는 ‘다니아’를 쥔 채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의 흥분과 떨림이 그것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윽고 그가 ‘다니아’를 높게 치켜들며 입을 열었다.
“적법한 절차를 통해 ‘다니아’를 얻은 파벤더 라 유파시드가 명한다. 태초부터 시작된 신성한 계약을 지금 이곳에서 행하라. 내가 명한다. 그대여! 피와 생명으로 이어진 우리와의 약속을 기억하라!!”
앞부분이 조금 다르긴 했지만 언젠가 르베나가 읊었던 것과 비슷한 내용의 주문이 파벤더의 입에서 나오자 르베나의 시선이 잘게 떨려왔다.
* * *
“‘다니아’. 디오니스 전설 속 무기라고 알려진 그것을 쓰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제약이 있어요.”
조금 전 막사 안. 루드바하가 자신의 편을 들었지만 여전히 파벤더에게 ‘다니아’를 넘기는 것에 회의적인 사람들을 위해 르베나가 입을 열었다. 그녀를 지지하듯 옆에 선 루드바하의 존재와 칸, 아를과 아벨디온이 그녀에게 그럴 만한 힘을 주었다.
“첫 번째는 적법한 절차를 통해 왕위에 오른 디오니스 혈통의 피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조건을 말하며 르베나가 잠시 생각에 잠기었다.
‘하지만 이전 생의 나는 로드의 길을 걷지 않은 왕임에도 ‘다니아’를 작동시킬 수 있었어. 그 말은 왕위를 받지 않은 드록의 피도 어쩌면 가능하다는 걸지도.’
모두의 집중된 시선을 느낀 르베나가 말을 고르며 이어 나갔다.
“하지만 모든 전설은 과장되는 법이니 범위를 넓혀 디오니스 혈통만으로 작동된다 쳐도, 드록은 죽었으니 그들이 저걸 작동시킬 방법은 없습니다.”
르베나의 말에 유안이 날카로운 눈으로 반문했다.
“하지만 파벤더는 바보가 아닙니다. 분명 그에게 그걸 작동시킬 방법이 있지 않겠습니까?”
유안의 말에 르베나가 고개를 들어 그를 직시하며 말했다.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니아’를 작동시키기 위한 조건은 더 있습니다. 그건 바로 ‘다니아’의 정체를 숨기기 위한 고서의 암호를 풀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니아’는 오직 한 번밖에 작동하지 않는다는 거죠.”
르베나의 말에 이번에는 바흐란이 조심스럽게 의문을 표했다.
“근데 예전에 유파시드로 군림한 파벤더라면 이미 주문도 알고 있을 거 같은데? 그렇게 되면 결국 걸리는 제약이 모두 없는 거 아니야?”
바흐란의 말에 르베나가 조금의 망설임을 느낀 후 모두를 보며 말했다.
“그렇다 해도 ‘다니아’는 작동하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르베나의 시선이 누구도 알지 못하는 곳을 향해 작게 빛났다.
“‘다니아’는 이미 작동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순간 그녀의 말에 막사 안에 소란스러움이 빚어졌다. 그 ‘다니아’를 지키기 위해 모두가 목숨을 걸었고 실제로 죽은 이들도 많았다. 그런데 그 ‘다니아’가 작동되지 않는다니?
잠시 후 먼저 정신을 차린 세츠 중에 하나가 르베나에게 화를 내며 말했다.
“아니 그럼 애초에 이런 전쟁이 필요 없었던 것 아닙니까? 작동되지도 않은 ‘다니아’ 때문에 지금 이게 무슨 일입니까!”
그의 외침에 루드바하가 조용히 그를 노려보자 그가 서둘러 입을 닫았다. 하지만 르베나는 그런 루드바하를 부드럽게 제지한 후 그 세츠를 보며 말했다.
“나는 이것에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거 어느 왕이 ‘다니아’를 쓴 사실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르베나가 잠시의 망설임을 모른 척하지 않으며 솔직하게 말했다.
“그 사실은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저 역시 우연히 안 사실일 뿐 증거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그 가능성 하나만 믿고 ‘다니아’를 선뜻 넘겨 주기엔 위험 부담이 너무 높았지요.”
르베나의 말을 듣고 있던 아를이 모두에게 그녀의 입장을 대변했다. 아를 역시 ‘다니아’가 사용된 적 있다는 건 지금 처음 들었지만 르베나에 대한 믿음이 더 크기 때문에 별 문제가 되진 않았기 때문이다.
“‘다니아’가 이미 사용된 적 있다는 걸 파벤더에게 말했다고 해도 그는 그걸 얻기 위해 무슨 짓이든 했을 겁니다. 그렇다고 그냥 넘겨주었다가 아주 만약에라도.”
아를의 시선이 잠시 르베나를 스쳐 지났다.
“르베나가 아는 진실이 혹시라도 거짓이라면 그 대가로 온 세상이 뒤집혔겠죠. 르베나는 자신의 확신만으로도 그만한 대가를 걸고 싶진 않았을 겁니다. 사실 그건 모두 마찬가지 아닙니까?”
아를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 ‘다니아’가 사용된 사실을 알고 있지만 증거만 없다면. 그것 하나로 모든 걸 감수하고 파벤더에게 ‘다니아’를 넘기진 않았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아직도 혼란스러워하는 몇몇을 둘러보며 르베나는 말했다.
“하지만 이제 우리에겐 더 이상 선택지가 없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인질이 디온 기사들 말고도 많다면, 그래서 우리가 파벤더를 공격할 때마다 그가 무기로 그들을 내세운다면… 그리하여 우리가 그때마다 ‘다니아’를 끝까지 지키느라 정작 소중한 이들을 모두 포기한다면 ‘다니아’를 지킨 의미가 없으니까요.”
르베나가 흔들리지 않는 시선을 빛내며 모두에게 말했다.
“그러니 지금에서야 저도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변하지 않을 불변의 진리같이 모두의 귀를 울렸다.
“‘다니아’는 절대로 작동되지 않을 겁니다.”
* * *
빛을 뿜어내는 ‘다니아’를 보며 르베나의 시선이 자꾸만 떨려 왔다.
“르베나.”
하지만 그 순간조차 루드바하의 크고 따뜻한 손은 르베나의 손을 찾았고 그의 부드러운 시선은 흔들림 없이 그녀를 향했다.
‘당신을 믿어요. 그대의 말을 믿어요.’
눈으로 전하는 그의 믿음. 그 믿음이 전해주는 온기와 다독임에 르베나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떨림을 겨우 가라앉혔다. 그리고 파벤더의 손에 들린 ‘다니아’를 보며 생각했다.
‘그래, 저건 이미 한 번 작동됐어. 절대 두 번은 깨어날 수 없어. 그… 드래곤은.’
‘다니아’를 넘기면서도 르베나가 모두를 설득할 수 있었던 이유가 그것이었다. 아한 또한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다니아’를 지키며 살펴본 결과 ‘다니아’에 엄청나게 큰 힘이 사용된 흔적이 있어 의아했다고 말하며 그녀의 말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파벤더라는 자가 ‘다니아’를 직접 본 적이 없다면 결코 이 흔적을 단번에 눈치 챌 수 없을 거예요.”
르베나는 아한이 한 말을 떠올리며 확신을 담아 소리를 내었다.
“절대로 ‘다니아’는 두 번 작동할 수 없어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단언을 담은 듯한 그녀의 말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사위가 고요에 잠겨 들었다.
파벤더를 바라보는 소수의 ‘보토니에’ 마법사들은 신이라도 대하듯 그를 바라보며 무엇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고, 세나르 또한 불길이 이는 눈으로 ‘다니아’와 르베나를 번갈아 보았다.
반면 르베나와 루드바하가 선두에 선 디오니스 진영은 모두가 긴장된 시선으로 ‘다니아’를 바라보며 침을 삼켰다.
그때였다. 온 세상이 반으로 쪼개지는 것 같은 엄청난 힘이 세상에 또다시 몰아친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