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제4장. 르베이나 (65)
“‘다니아’를 주는 건 안 됩니다.”
차게 굳은 유안의 말에 르베나의 눈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막힘없이 자신의 생각을 얘기했다.
“누군가의 희생 위에 목적을 쌓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입니다. 하지만 수많은 피해자가 생길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내 사람들을 지키겠다는 욕심만 채우는 게. 그거랑 뭐가 다릅니까?”
“욕심이라뇨!”
유안의 말에 스릴 공주가 반박했다.
“사실 여기 있는 모두가 자기 사람들, 자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거 아닌가요?
르베나 언니의 그 범위에 아벨디온 기사분들이 들어가 있는 건 당연해요! 그걸 욕심이라고 하면 안 되죠.”
스릴 공주의 말에 유안이 무언가를 더 말하려다 말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바흐란이 스릴의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차분한 어조로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스릴, 유안 님도 그걸 모르진 않아. 하지만 자칸의 기사들을 구하는 것과 자칸 전체를 구하는 것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그건 우리에게도 쉽지 않은 문제일 거야. 하나만 맞다고 할 순 없다는 거지.”
바흐란의 말에 이번엔 스릴이 휙-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하기 시작하며 막사 안엔 많은 의견이 빚어졌다. 그 모습을 보며 르베나는 생각에 잠겼다.
‘‘다니아’는 오직 하나의 소원만을 들어주는 무기. 그리고 그 힘은 이전 생에 내가 이미 사용했어.’
오래된 기억이라 조금 흐려졌지만, 이미 죽었을 자신이 다시 살아 있다는 것. 그 사실이 바로 르베나 자신이 ‘다니아’를 사용했다는 증거였다.
‘그렇기에 ‘다니아’는 소환되지 않을 거야, 아마.’
‘다니아’를 파벤더에게 넘겨주어도 작동하지 않을 이유를 르베나는 알고 있다. 이 사실을 밝히면 여기 있는 모두의 의견을 모으기 쉬워질 터.
하지만 이곳에 있는 똑똑한 이들은 그녀의 회귀에 대해 수많은 의문을 제기할 것이고, 이전의 삶을 모두 밝히지 않으면 설명할 수 없는 것들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 이전 생을 밝히면…….
‘모두가… 흔들리겠지.’
과거의 그녀를 가엾게 여기는 자들도 있을 것이고, 그때의 자신을 자책하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과는 다른 그녀에 대해 실망하는 사람이 나올지도.
“‘다니아’를 넘기고 디온 기사들의 마법이 풀리면 그가 작동하기 전에 칩시다!”
“아니 우리 중 흑마법사가 없는데 마법이 풀린 걸 어떻게 압니까?”
“그거야 우리에게 아한 님이 있으니……!”
점점 언성을 높이는 사람들을 보며 루드바하의 시선이 조용한 르베나에게 향했다. 죽은 줄만 알았던 디온 기사들을 볼 때와는 달리 골똘히 생각에 잠긴 그녀의 얼굴을 보며 루드바하가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에는.”
크지 않은 목소리임에도 그가 소리를 내자 거짓말처럼 모두 입을 닫았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과 함께 르베나까지도 하던 생각을 접고 루드바하의 얼굴에 시선을 집중했다.
조금은 굳어 있는 그의 얼굴을 보며 르베나는 순간 그가 반대할 경우를 떠올리고 있었다. 동시에 조금 전 디온 기사들이 고통당하던 순간조차 ‘다니아’를 사수하려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르베나는 그런 그가 밉지 않았다. 물론 기사들이 진짜 죽었다면 다른 감정이 생길 수도 있었겠지만, 라웅과 유안이 같은 상황이라도 그는 동일한 선택을 했을 것임을 알기에.
자신이 생각하는 옮음을 믿고 나아갈 세츠들의 왕, 유파시드가 그라는 것을, 르베나는 이미 마음속 깊이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곧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아내며 루드바하가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다니아’를 파벤더에게 넘겨주는게 좋지 않을까 합니다.”
이어진 루드바하의 말에 모두가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그중 가장 놀란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르베나였지만.
* * *
“정리가 된 건가?”
어느새 다시 모습을 드러낸 사람들을 보며 파벤더가 다가와 물었다. 조금 전 디온 기사들을 잃고 힘들어하던 모두의 얼굴이 조금 다른 의미로 가라앉은 걸 확인하며. 그의 질문에 르베나가 표정 없는 얼굴로 말했다.
“가져가라.”
르베나의 말에 파벤더가 조금 의심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물론 더 이상의 불필요한 죽음을 피하기 위해 ‘다니아’를 주리라 예상은 했다. 사실 주지 않는다 해도 그녀를 괴롭힐 방법은 여전히 그에게 많았기 때문에 시간이 조금 더 걸릴 뿐.
하지만 정말 아무런 조건도 없이 ‘다니아’를 넘기는 건 그의 예상에 없었다.
“흠-. 디온 기사들이 죽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 건가?”
히죽 웃으며 말하는 파벤더의 소리에 르베나가 시선을 들어 그를 보았지만 그 속에 더이상 흔들림은 없었다. 그 모습에 파벤더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뭐, 상관없다. 간접 체험을 진짜처럼 한 것 같으니.”
순간 파벤더의 시선이 디온 기사들이 회복하고 있는 막사로 향하자 르베나의 몸에서 검붉은 마력이 넘실댔고 가스트의 몸에서도 회색의 마력이 공격적으로 솟아났다. 그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파벤더가 말했다.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지 말게, ‘다니아’만 있으면 저런 기사들은 필요 없으니 말이야.”
그 순간이었다. 자신에게 날아온 물체를 본능적으로 낚아챈 파벤더의 손에 그것이 들려 있었다. 싱겁도록 손쉽게 쥐어진 ‘다니아’가. 그것을 보며 파벤더가 진심으로 웃어 보였다.
“이왕 줄 것이라면 저 많은 이들이 죽기 전에 줬으면 얼마나 좋았겠나.”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시체를 보며 뱉은 파벤더의 말에 르베나가 분노를 감추고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게, 루가 죽기 전에 줬으면 좋았겠군. 그럼 네가 루를 살릴지, 세상을 가질지. 둘 중에 어떤 소원을 빌어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 말이야.”
그녀의 말에 파벤더가 크게 분노한 듯 검은색의 마법을 쏘았지만 루드바하의 금빛 신력에 곧바로 가로막혔다. 그 모습을 본 파벤더가 분노를 식히듯 깊은 숨을 내어쉬며 말했다.
“극적으로 의견을 모은 모양이지만 이게 작동된 후에도 너희가 같은 뜻으로 함께 할지 지켜보지.”
파벤더가 곧바로 그들에게 떨어지더니 ‘다니아’를 꺼내 올렸다. 그리고 한껏 흥분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널… 갖기 위해 얼마나 오래 기다린 줄 아느냐.”
‘다니아’를 보며 중얼거리는 그의 모습은 꼭 다정한 연인을 대하듯 부드러웠다. 그의 모습을 보던 유안이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르베나에게 바짝 다가와 바로 옆자리의 사람도 듣지 못할 만큼 은밀하게 물었다.
“아까 하신 말씀이 진실입니까? 정말 저자가… ‘다니아’를 작동시키지 못하는 겁니까?”
그럴 성격이 아님에도 쉽게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는 유안의 말에 르베나가 파벤더를 주시하며 말했다.
“네. 그가 ‘다니아’를 작동시키지 못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중 첫 번째는.”
파벤더를 바라보는 르베나의 시선이 붉게 반짝였다.
“‘다니아’는 반드시 디오니스 정식 후계자의 피에만 반응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르베나의 말과 동시에 파벤더가 마치 그녀의 말이라도 들은 듯 눈을 마주쳐왔다.
이에 르베나의 곁에 선 루드바하와 아를이 조금 긴장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자 파벤더가 돌연 히죽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조금 과장스러운 말투로 외쳤다.
“이제 드디어 당신이 복수할 시간이 왔군요!”
파벤더의 말이 마법 확성으로 널리 울려 퍼졌다. 동시에 르베나의 미간이 서서히 좁혀졌다. 저 멀리서 한 여자가 이곳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의 모습이 다가올 수록, 더욱 선명해질수록 르베나의 시선은 잘게 떨려오기 시작했다.
“세… 나르.”
르베나의 말과 동시에 그녀, 세나르가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 * *
“드록이… 죽었다고?”
쨍그랑! 마르고 가는 손가락이 들고 있던 찻잔이 차가운 바닥에 부딪혀 자신의 몸을 깨트렸다. 하지만 그녀, 세나르는 가장 아끼던 찻잔이 깨졌음에도 계속 같은 걸 되물었다.
“내 아들. 디오니스의 후계자가 될, 드록 왕자가… 죽었단 말이냐?”
작은 섬에 유폐된 지난 몇 년의 시간은 놀랍도록 아름다운 한 여성의 외모를 늙고 어둡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관리받지 못해 늘어난 검버섯이 가득 핀 메마른 얼굴로 세나르가 또다시 물었다.
“내 아들이… 죽었다고?”
아름답지 않은 외모에 남은 건 일그러진 욕망과 추악한 욕심뿐. 보기만 해도 눈을 돌리고 싶은 모습의 세나르가 같은 질문을 계속하자 그녀의 시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바로 방을 벗어났다. 한때 디오니스를 쥐고 흔들었던 세나르의 충신을 자처한 죄로 이곳까지 같이 끌려온 것도 서러운 처지. 더는 세나르의 패악을 감당하기도 싫었기 때문이다.
쨍그랑! 와장창……!
그로부터 몇 달. 그 섬에서 일하는 고작 몇 명의 사람들조차 세나르의 방에 가기를 꺼려 하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세나르는 거의 먹지 않았고 깨어 있는 시간마다 르베나의 이름을 외치며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저주를 쏟아부었다. 가끔씩 그녀의 저주에는 제노스가 등장하기도 했고 이미 죽은 루아나 공주가 나타나기도 했다.
그녀는 몇 날 며칠을 울었고 그러다 또 며칠간을 웃었다. 그렇게 모두의 외면 속에 하루하루 미쳐가는 그녀가 어느 날 작은 창문 밖 아득한 바다를 바라보았다.
“네가 나의 마지막 희망이었거늘…….”
어둡게 일렁이는 바다를 보며 세나르가 말했다.
이곳에 유폐되어 있는 것은 잠시일 뿐이라고, 곧 왕위를 차지한 드록이 가엾은 어미를 데리러 올 거라고. 그 잘못된 믿음을 그녀는 단 하나의 구절처럼 외우고 또 외웠더랬다.
그리고 이제 그 희망은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드록, 내 아가.”
태어나서부터 아비의 온전한 사랑을 받지 못한 드록을 떠올리며 세나르의 건조한 뺨에 눈물이 흘렀다. 건조하고 갈라진 피부는 그 하나의 눈물에도 따끔거리며 통증을 호소했다.
“널 왕으로 만들지 못한 날, 용서하거라.”
세나르의 텅 빈 시선이 저 아래 찰랑이는 바다를 향했다. 그리고 마지막 말을 속삭였다.
목숨을 건 소원은 꼭 이루어진다는 어느 전설을 되새기며.
“르베나 드 디오니스. 그년이 영원불멸의 지옥불에 타오르길.”
세나르가 아래로 몸을 던졌다. 세차게 불어온 바람이 그녀의 전신을 감싼 순간조차 세나르는 르베나를 저주하는 말들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소원을 누군가 들은 걸까? 바람을 휩싸여 바다에 떨어질 줄 알았던 마른 세나르의 몸은 다시 방으로 돌아와 있었다.
놀란 세나르가 번쩍 눈을 떠 다시 보지 못할 거라 생각한 자신의 방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눈물에 젖은 눈을 반짝이며 중얼거렸다.
“내 소원을 들어 주셨군요!!”
그곳에, 폭풍이 지나갔다고 해도 믿을 만큼 엉망진창이 된 그녀의 방에, 금빛의 신력을 휘감은 젊은 사내가 서 있었던 것이다.
그, 파벤더가 그날 나타난 건 어쩌면 불쌍한 그녀에게 내려진 마지막 축복이었을지도.
* * *
자신의 이름을 불러준 파벤더에게 고개를 까닥해 감사를 표한 세나르가 감격한 표정으로 르베나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이로구나, 르베나 드 디오니스.”
그녀의 얼굴에는 예전과 같이 여유로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