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화
제4장. 르베이나 (64)
“아한.”
아한을 부른 아를의 목소리가 한껏 감겨 있었다. 방금까지 르베나와 디온 기사들을 향하던 시선에 가득 찬 고통스러움 때문일까. 동시에 아한의 시선이 잘게 떨리는 아를의 손과 억지로 삼켜내는 그의 붉어진 눈시울을 향했다.
“여긴 위험해.”
르베나 곁의 자신을 못 마땅해할 때는 언제고 언젠가부터, 그리고 이런 상황에까지. 자신부터 걱정하는 아를의 모습이 이제는 조금 익숙해졌다. 이에 아한이 그런 아를을 보고 한번 웃어 보였다. 그리고 서늘한 아한의 눈이 멀리서 히죽이는 파벤더를 향하자 그가 아한을 한 번, 아한의 손에 들린 ‘다니아’를 한 번 보고는 크게 웃어젖혔다.
“하하하, 디오니스에도 현명한 이가 있구나. 크하하! 그래, 더 이상의 희생이 싫어 드디어 그것을 받치러 온 것인가?”
파벤더의 말과 동시에 루드바하와 칸, 루시드와 아사드. 스릴 공주와 호안 왕자, 레턴이 아한의 주위를 둥글게 감싸기 시작했다. 아한의 손에 들린 ‘다니아’를 확인한 루드바하가 말했다.
“아한, 아를 경의 말대로 여긴 위험합니다. 그리고 ‘다니아’는 절대 가지고 나와선 안 됩니다.”
‘다니아’에 관한 얘기를 할 때는 조금 서늘하게까지 들리는 루드바하의 말에 아한이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는 입을 뗐다.
“누나가 울잖아요, 폐하.”
짤막한 말. 아한의 그 말에 루드바하의 시선이 움찔 흔들렸다. 그러자 아한이 여전히 멍한 얼굴로 룬과 랄프, 디온 기사들의 시체 곁에 앉아있는 르베나를 보고는 물었다.
“지금 이걸 주면 누나의 눈물을 멈추게 할 수 있어요. 어떻게 하실래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아한의 말에 루드바하의 시선이 고민에 휩싸인 채 힘겹게 르베나에게로 향했다. 자신의 머뭇거림에 그녀가 자신의 기사들을 잃은 건 아닌지. 자신이 정의한 올바른 기준에 그녀가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닌지. 루드바하의 마음에 혼란이 들어섰다. 그 순간 유안이 루드바하의 흔들리는 시선을 보고는 제법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다니아’를 건네주는 건 안 됩니다. 이미 디온 기사… 분들은 눈을 감았고 그 ‘다니아’를 파벤더가 갖게 되면 얼마나 더 많은 이들이 죽을지 모릅니다.”
“일단 줘요! 언니가… 언니가 안 움직이잖아요!!! 너무… 아파 보이잖아요!! 흑…….”
유안의 말에 스릴이 소리치자 모두가 적막에 사로잡혔다. 흡사 넋이 나간것처럼 보이는 르베나와 아를, 다한, 그리고 아벨디온의 슬픔을 감히 모른 척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아한이 파벤더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우리끼리 의견을 조율할 시간이 필요해요. 하지만 아마도, 될 거예요. 그러니 잠시 시간을 줘요.”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아한의 말에 루드바하를 비롯한 사람들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하지만 파벤더만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래. 얼마든지 주지. 현명한 꼬마로구나, 하하하하.”
사실 아한이 ‘다니아’를 들고 나온 시점에서 파벤더는 곧바로 주변을 모두 몰살시키고 ‘다니아’를 빼앗을 수도 있었다. 그에게 그 정도의 힘은 충분히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곧바로 멀리 떨어져 남은 ‘보토니에’ 마법사들을 모아 성큼 물러나는 것을 선택했다.
“아한, 어째서 제멋대로……!”
아한은 목소리를 높이려는 유안을 무시한 채 루드바하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지금 당장 르베나 누나와 죽은 디온 기사들을 막사 안으로 텔레포트 해 주세요. 마치 장례식이라도 치르는 것처럼.”
“잠깐…….”
유안이 다시 말리려 했지만, 아직 앳된 얼굴의 청년은 또렷한 눈동자로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를 믿어 주세요. 지금은 이 방법뿐이에요.”
* * *
“저들을 그냥 놔둬도 괜찮을까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흑마법사들을 둘러보며 조금 두려워하는 듯한 베이라의 말에 파벤더가 답했다.
“르베나 왕녀는 과거부터 자신의 사람들을 잃는 걸 이상하리만치 무서워했다. 그러니 상관없다.”
“예?”
상관없다는 파벤더의 말에 베이라가 되묻자 장례를 치르려는 듯 디온 기사들의 시신과 멍해 보이는 르베나를 막사 안으로 이동시키는 금빛 신력을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일단 ‘다니아’를 밖으로 꺼냈으니 자진해 주면 좋은 것이고. 아니면…….”
순간 파벤더의 눈빛이 날카롭게 벼려졌다.
“또다시 죽이면 되니까. 그 기사들을 말이다. 크크크. 결국 이제부터는 시간의 문제일 뿐, ‘다니아’는 우리 것이다.”
자신만만한 얼굴로 웃은 파벤더의 말에 베이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또 죽이다니. 방금 죽은 기사들 말고 다른 기사들까지 죽이겠다는 소리인가?
하지만 파벤더는 더이상 그 베이라를 보지 않았다. 오로지 그의 시선은 조금 전 디온 기사들을 고문하는 동안 저들의 시선을 빼앗고 얻은 것, 차갑게 식어있는 루의 시신에 고정되어 있었다.
눈을 감은 루의 이마에 긴 입맞춤을 남긴 파벤더가 말했다.
“루, 유파시드는 절대로 ‘다니아’를 넘겨주자고 하지 않을 거다. 그게 세츠의 저주 같은 정의거든. 그러면 르베나 왕녀와 서로 척을 지게 되겠지. 그게 저들의 사랑이 우리와 달리 불완전한 이유다.”
씩 웃은 파벤더가 루의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말했다.
“그러니 ‘다니아’는 내 것이다. 내 소원은 이루어질 거야.”
파벤더의 말이 끝나자 그의 머리 위, 하늘에서 무엇인가가 반짝이는 것만 같았다.
아한의 말대로 디온 기사들과 르베나를 텔레포트시킨 루드바하가 늘어난 인원에 막사의 크기를 늘렸다. 그 순간 막사를 열고 가스트가 들어섰다.
“아한.”
염려가 가득 담긴 눈빛의 그가 모두의 중심에서 ‘다니아’를 들고 있는 손자를 보았다가는 디온 기사들의 시신, 그리고 그 옆에 멍하니 서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 순간 가스트의 시선이 아프게 떨려왔다. 너무도 익숙한 기사들의 시신. 그리고 그 옆을 지키고 선 르베나와. 그녀의 곁을 지키는 루드바하와 아를, 다한 그리고 칸.
“맙소사, 왕녀님!”
이 모든 상황을 확인한 가스트가 떨리는 음성으로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르베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가스트가 서둘러 르베나에게 다가가자 그녀의 곁을 지키던 루드바하와 아를이 자리를 내어주었다. 지금 그들의 온기조차 르베나에게는 닿지 못함을 알기에. 오직 르베나를 보며 아픔을 삼키는 칸만이 그녀의 오른쪽을 지킬 뿐이었다.
“르베나 님.”
가스트가 르베나를 한 번 더 소리 내어 불렀다. 하지만 대답 없는 그녀의 텅 빈 눈은 죽은 기사들의 사이, 그 어딘가를 향할 뿐이었다. 가스트가 그런 르베나를 가만히 보다가는 가만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간절함을 담아 한번 더 불렀다.
“르베나 님.”
그제야 들린 것일까. 르베나의 시선이 스르륵 가스트를 향했고 무거운 그녀의 입이 열렸다.
“또… 죽었어, 가스트.”
가스트는 순간 르베나의 또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몰랐다. 하지만 아마도 어린 시절의 그녀를 지키다 죽어간 제1기사단을 두고 한 이야기일까 싶어 가까스로 차분한 미소를 내보이며 말했다.
“아닙니다, 르베나 님. 저들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가스트의 말에 르베나의 시선이 기계적으로 그를 향하자 가스트가 좀 더 포근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한이… 저 아이가 저들을 살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르베나 님께서 먼저 중심을 잡으셔야 합니다.”
이어진 가스트의 말에 르베나의 눈에 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게 정말이야, 아한?”
가스트의 말을 들은 스릴이 조금 흥분하며 묻자 아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방금 들으신 그대로예요.”
어느새 영민한 연구자의 눈으로 돌아간 아한이 지난날의 일을 고백했다.
“사실 동굴에서 마주쳤다는 타나투라에 대해 알고 싶어 디온 기사분들을 따로 찾아간 날. 조금 이상한 느낌을 받았어요.”
아한이 자신을 주시하는 르베나의 눈빛을 확인한 후 차분히 말을 이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헬리오에게서 느껴졌던 그런 묘한 기분이요. 그래서 타나투라에 대한 조사는 중단하고 곧바로 아를 형을 찾아가 봤지만 형은 괜찮더라고요. 오로지 그날 타나투라의 굴에 들어갔던 다른 디온 기사분들께만 그 느낌이 났어요.”
아한이 순간 르베나의 눈에 조금씩 빛이 돌아오는 걸 확인했다. 아를과 다한 다른 아벨디온의 눈에도 솟아오르기 시작한 그 희망의 빛이.
“그래서 양해를 구하고 그분들에게 제 마력을 조금 흘려 넣어 그 원인을 찾고자 했어요. 하지만… 그건 마치 실체가 없는 것처럼 온몸을 전부 뒤져도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저도 확신하긴 어려웠죠.”
아한의 말에 루드바하가 물었다.
“그래서 그대의 마력으로 그들의 몸 안에 무엇인가를 한 건가요?”
루드바하의 물음에 아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불안했거든요.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그분들은 르베나 누나와 아를 형, 다한 경께 그러하듯, 제게도 아주 소중한 분들이니까요. 그래서 만약, 아주 만약에라도 파벤더의 세뇌로 자폭이라도 할까 싶어 아주 조금씩… 가장 중요한 심장 부근에만 실드를 쳐 놨어요.”
아한의 말에 루시드가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노여움이나 당황보다는 젊은 연구자의 새로운 발상에 대한 놀라움과 감탄을 담고 있었다.
“하, 정말 이제껏 없던 방법이군 하군요. 사람의 몸 안에 실드를 치다니……! 그래서 말을 더 못했군요? 아무래도 첫 시도였을 테니.”
루시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아한이 순간 눈을 빛내며 말했다.
“하지만 통했어요. 전 비록 자폭 세뇌인 줄 알고 한 일이지만 아까 파벤더가 마지막 공격을 할 때 제 실드가 모두 깨지는 걸 느꼈거든요. 그러니까 그 말은.”
아한의 말에 르베나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이으며 누워있는 디온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저들이 큰 고통에 잠시 기절해 있을 뿐… 이라는 건가?”
르베나의 말에 아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요. 심장박동이 거의 들리지 않는 건 아마 몸 안에 있던 실드가 깨지며 오는 반작용인 거 같지만 전 느껴져요, 형들 모두 살아있다는 걸.”
모두가 더 이상 박동하지 않는 그들의 심장 소리를 다시 확인했다. 그런데 살아있다니. 그 순간이었다.
“맙소사……!”
놀란 스릴 공주의 말과 동시에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으… 으……!”
죽어있던 룬의 입에서 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걸 시작으로 랄프를 비롯한 다른 기사들의 입에서도. 순간 모두가 경악과 놀람 그리고 믿을 수 없는 기적에 흥분하기 시작했다.
“흥분하지 말아요. 파벤더가 알아차릴 수 있으니.”
그럼에도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아한의 당부에 모두가 숨을 죽이며 아한을 보았다. 그러자 아한이 무거운 얼굴로 ‘다니아’를 보며 말했다.
“하지만 기적은 한 번뿐이에요. 제 실드는 이미 깨졌고 파벤더의 흑마법은 여전히 형들의 몸에 남아있어요. 게다가 심장의 실드를 또 친다 해도 그게 깨질 때의 반동을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고요. 그러니 파벤더가 이걸 눈치채고 또다시 공격하면 그때는… 형들이 모두 죽을 거예요.”
아한의 말에 루드바하가 그를 보며 말했다.
“아마 파벤더는 이미 알고 있을 겁니다. 그만한 실력은 있는 자니까요. 결국 이번 일은 보여 주려 벌인 이벤트 같은 거 같군요”
루드바하의 말에 아를이 분노한 음성으로 말했다.
“다음번엔 진짜 죽을 거라는 경고성 이벤트 말인가요?”
아를의 말에 루드바하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르베나를 보았다. 하지만 고민에 잠겨있을 줄 알았던 르베나는 언제나처럼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 전에 ‘다니아’를 주고 저들을 살려야 한다는 말이구나.”
동시에 르베나의 입술이 작은 호선을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