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제4장. 르베이나 (63)
“아한, 밖이 심상치 않구나.”
가스트의 근심 어린 목소리에 아한이 가만히 창밖을 내다보았다. 온 궁이 들썩일 정도의 병장기 소리와 고함, 함성, 비명은 밤이 지나 새벽이슬이 맺힘과 동시에 서서히 잦아들었다.
동시에 각 국경에 도착한 타국의 지원이 낸 다양한 마법에 가스트와 기뻐한 것도 잠시, 아한은 심상치 않은 남쪽 국경의 소리에 시선을 어둡게 빛냈다.
“누나가 슬퍼하고 있어요, 할아버지.”
아한의 음성에 지독한 아픔이 배어 나왔다. 그 감정을 공유하기라도 하듯 가스트 역시 회색 눈에 어린 오랜 감정으로 아한의 말에 동조했다.
“그래, 르베나 님의 마력이 울고 있구나.”
곧 그의 차분한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파벤더의 흑마법이 곳곳에서 느껴지는 그 중간, 가장 슬프게 울부짖는 검붉은 마력의 자락이 안개처럼 흩어지는 남쪽 국경에.
곧 가스트가 아한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쩌면 ‘다니아’를 가지고 나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한.”
가스트의 말에 아한의 시선이 ‘다니아’를 살짝 향했다가는 다시 밖을 향했다.
들썩이는 르베나의 마력과 아를의 슬픔. 그 모든 것이 지나치게 배어 있는 그곳.
지금 당장이라도 뛰어가고 싶은 그곳을 향해.
“루드바하.”
르베나의 딱딱한 음성. 그걸 들은 루드바하의 시선이 아프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는 이 순간만큼은 감정을 지운 채 르베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재차 자신의 의견을 전했다.
“파벤더가 원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디온 기사들을 인질로 잡아 ‘다니아’를 넘겨 받는 거요.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사나와 헬리오가 인질로 잡혔을 때, 국경이 뚫렸을 때. 우린 모두 잘 견뎌 왔어요.”
루드바하가 어느새 곁에 몰려든 이들을 바라보고는 말했다.
“우리가 뭘 위해 싸웠는지 알잖아요. ‘다니아’를 지키기 위해서였어요. 그리고 이건 마지막 고비일 거예요. 그러니 그에게 넘어가면 안 돼요, 르베나.”
단호한 루드바하의 말에 르베나의 시선이 고통스러워하는 기사들을 향했다. 한번 가해진 공격 마법이 쉬이 그들을 놓아주지 않는지 끔찍한 고통에 이미 기절한 이도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버티는 기사들은 하나같이 이제는 신음 소리조차 삼키고 있었다. 그것이 르베나에게 짐이 될까 봐. 르베나의 결정을 흐리게 할까 봐.
그 모습에 아프도록 인상을 쓴 르베나가 말했다.
“그때는 모두 방법이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지금은요? 루드, 물론 우리가 저 흑마법을 없앨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때까지 저들이, 내 기사들이 살아있을 거라 장담할 수 있나요?”
르베나가 곧 루드바하와 주변의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우리가 시도하는 그 수많은 마법을 이기지 못하고 저들이 죽을 수도 있어요. 그리고 난.”
르베나의 시선이 여느때보다 단호하게 빛나는 순간이었다.
“저들을 단 하나라도 잃을 생각이 없습니다.”
르베나의 결연한 말에 모두가 침묵을 지키자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칸이 조심스레 나섰다. 르베나의 심정을 헤아리는 것만으로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르베나, 너의 생각을 존중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 같은 마음이야. 여기 있는 누구도 디온의 희생을 바라지 않아. 하지만 지금 ‘다니아’를 넘기면 그때는 디온 기사들을 포함해 우리 모두가 죽을 수도 있어. 너라면 그걸 모르지 않을 거고. 그렇지?”
다독이는 듯한 칸의 말에 르베나가 입술을 아프도록 짓씹었다. 그가 말한 것을 르베나 역시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파벤더가 언제 죽일지 모를 디온을 그냥 둘 수도 없었다. 아를 역시 고통스러워하는 기사들을 스치듯 보고는 르베나에게 말했다.
“방법을 찾아, 르베나. 디온은 모두 약하지 않아. 그렇게 훈련시키지 않았어. 그러니까 버텨 줄 거야. 우리가 방법을 찾을 때까지.”
루드바하와 칸의 의견에 동의하는 아를의 말에 르베나가 애써 고개를 돌렸다. 지금 자신만큼 괴로울 것이 그들과 동고동락한 아를과 다한, 그리고 애써 동료들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외면하고 있는 아벨디온 다른 기사들임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 왕녀… 님.”
그때 들려온 룬의 숨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저절로 향했다. 그러자 고통스러운 숨을 헐떡이면서도 힘겹게 웃어 보인 룬이 말했다.
“버… 틸만… 합니다. 그… 러니까 주, 지… 마세요.”
힘겹게 내뱉는 룬의 한 마디에 여기저기서 쇳소리같은 목소리들이 이어서 들려왔다.
“이 정도는… 안 아파요.”
입가에 고인 피조차 닦지 못한 랄프가 말했다.
“아를 단장… 주먹이 더, 아플 걸요… 크크, 윽!”
억지로 웃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바리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멍, 청이 바리… 크크크. 헉!”
그런 바리타를 비웃던 마른도.
모두가 르베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던진 말에 순간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끝까지 바보같은 저 기사들은 누굴 닮아서 저럴까? 지금 가장 두렵고 아픈건 그들일텐데. 마찬가지로 이 순간까지 르베나를 생각하는 디온 기사들의 모습에 루드 역시 아프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 명 더. 이제껏 조용히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이가 그 순간 마땅치 않은 목소리를 내었다.
“정말 견딜 만한가?”
어느새 허공에 떠 그들을 바라보던 파벤더가 손에 맺힌 마법을 조금 흘리자 곧장 모든 기사들의 피비린내 나는 비명이 국경을 가득 메웠다. 고작 열댓 명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비명이, 피 냄새가, 고통스러운 신음이. 그 모습에 모두의 얼굴이 아프도록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때.
“결정이 어렵다면 좀 더 쉽게 해 주지, 르베나 왕녀.”
곧 파벤더가 자신의 손에 있던 모든 마법을 발현시키려 했다. 어느새 크기를 불려 구체화된 마법이 디온에게 향한다면? 그 순간 놀란 루드와 호안, 유안을 비롯한 세츠들이 곧장 디온 기사들에게 해가 되지 않을 방어마법을 쐈다. 파벤더에게서 나오는 공격마법이 그들에게 전해지지 않게 막으려던 의도였다. 하지만 그 방어마법조차 디온 기사들에게는 큰 고통으로 다가가 버렸다.
“으악!!!”
고작 방어마법일 뿐인데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에 모두가 놀라 마법을 곧장 멈추었다. 그 모습을 본 스릴이 다급하게 외쳤다.
“레턴 전하!! 한때나마 ‘보토니에’에 있었다면서요? 뭐 아는 거 없어요?”
초조하게 외치는 스릴의 말에 레턴이 파벤더를 한번 보고는 자신의 신력으로 디온 기사들의 주위를 감쌌다. 혹시라도 그들의 몸에 직접 닿지 않는 보호마법으로는 파벤더의 공격을 막을 수 있을까 해서였다. 하지만.
“하하, 어림없다네, 이건 마법으로 이어진 거니까.”
곧 파벤더가 마법의 크기를 키우자 기사들 중 몇 명이 정신을 잃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확인한 파벤더가 일부로 르베나와 눈을 맞춘 후 보란 듯이 마법을 발현시켰다. 다른 것과는 다르게 스르륵- 공기 중으로 사라지는 마법. 그곳에 모인 모두가 그것이 흑마법의 대상인 디온 기사들에게 향할 것임을 알았다.
그 순간 르베나가 곧장 파벤더에게 뛰어들어 번쩍이는 검을 내리쳤다. 마법을 쓰면 기사들이 다칠까 순수한 검술로만 부딪힐 생각인 것 같았다. 하지만 파벤더의 가벼운 손짓 한 번에 그녀의 몸은 훌쩍 뒤로 밀리고 말았다.
“흣……!”
순식간에 밀리는 반동에 르베나가 다시 허공을 딛고 달려 나갔다. 그리고 다시 한번
쾅!!! 그녀의 검이 파벤더를 내려쳤다. 그 충격과 동시에 그를 보호하던 얇은 막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한 번 더. 그리고 한 번 더!!
르베나가 그를 향해 자신의 검을 계속 내리쳤다. 마법이 안 된다면 순수한 인간의 힘만으로……! 그녀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한때 가장 강력한 유파시드라 알려진 파벤더를 내리치는 르베나의 손에 어느새 피가 고이기 시작했다. 단단한 그의 실드에 순수한 물리력을 내리치던 반동에 르베나의 팔도 저릿해졌다.
하지만 살짝 금이 갔던 것조차 허상이었던지 파벤더를 감싸는 실드는 더욱 강해졌고 르베나를 보는 그의 얼굴엔 조소가 가득했다.
“르베나 왕녀의 꼴이 제법 재밌으니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시간을 조금 연기해 주지.”
조롱이 섞인 그의 말에도 불구하고 르베나는 흔들리지 않는 표정으로 더 강하게 그의 실드를 내리쳤다. 그 순간 깡!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이 멀리 밀려났지만 르베나는 다시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모두의 눈시울은 점차 붉어지기 시작했다.
“언니… 흑!!”
마법이 통하지 않는 유파시드에게 달려드는 르베나의 손바닥에 흥건한 피와 실드와 부딪힐 때마다 상처가 더해지는 그녀의 몸을 보며 스릴이 울었다.
“르베나! 그만하거라!”
마찬가지로 칸 역시 고통스러운 얼굴로 르베나를 만류했으나 르베나는 파벤더를 내리치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이내 그녀의 머리칼이 잔뜩 흐트러지고 겁 손잡이가 그녀의 피로 흥건히 물들었다. 하지만 르베나는 마치 훈련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계속 검을 휘둘러댔다.
콰광!! 순간 르베나의 검에 이어 커다란 바스타드 소드가 그녀의 옆을 지켰다. 아를이 그녀의 옆에서 함께 검을 휘두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다한과 아벨디온 모두가 그녀의 곁으로 달려 나갔다.
목숨을 걸고 노력해 얻은 검기를 버린 채, 실드에 비해 너무도 작은 검을 휘두르며 파벤더에게 다가갔다.
캉캉캉!!
쉼 없는 그들의 시도에 어느새 그들의 검날이 깨지고 부러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유로운 파벤더와 달리 거친 숨을 몰아쉬며 피로 얼룩진 손과 지친 몸으로 그를 노려보는 모두의 간절함은 통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는 건재했고 그의 웃음소리는 커다랗게 공기를 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그가 웃음을 멈춤과 동시에 모든 디온 기사들의 소리가 한순간에 뚝 끊겼다. 그 자리에 선 모두가 경악한 표정으로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파벤더의 힘에 의해 허공으로 떠오른 디온 기사들의 몸이 보였다.
“죽여 버릴 거야.”
르베나가 허공에 떠있는 기사들을 보며 불안함과 초조함을 미처 감추지 못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와 동시에 그 자리의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마지막이라는 걸. 이제 저들에겐 미래가 없다는 걸. 그 순간, 자신의 마지막을 자각했는지 의식이 남아 있는 모든 디온 기사들이 힘없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아… 벨디, 온… 의 정의… 를 위해.”
그리고 툭 하고 모두의 목이 힘없이 쳐졌다.
“룬.”
서늘한 아를의 목소리가 룬을 불렀다.
“랄프, 일어나라!”
이어 다한의 떨리는 목소리가 영원한 그들의 막내를 불렀다.
“마른, 바리타!”
이어 다른 기사들이 자신들의 동료를 힘껏 불렀다. 하지만 그중 누구도 그들의 말에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일어나라고!!”
처절하게 울부짖는 동료의 외침에도 모두는 침묵했다.
터벅터벅. 그 때 피에 절은 몸으로 르베나가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에 있던 룬을 들여다보았다. 감은 눈,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입.
감은 눈의 룬을 보며 르베나가 조금 전 분노한 목소리와는 완전히 다른 건조한 소리를 내었다.
“룬, 일어나라.”
하지만 르베나의 말에 언제나 장난스럽게 웃던 룬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명령이다.”
좀처럼 명령이란 말을 쓰지 않는 르베나의 말에도 대답해야 할 룬은 침묵했다.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아벨디온에서 제명시키겠다. 룬, 일어나라!”
조금 격양된 르베나의 목소리. 하지만 룬은 끝내 눈을 뜨지 않았다.
툭. 후두둑. 그의 대답이 없는 자리. 그 자리를 곧 르베나의 뜨거운 눈물이 대신했다.
“룬, 랄프, 바리타, 마른, 롤스.”
목이 메인 듯 르베나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하지만 금방 다시 그들의 이름을 불렀다.
“루키에, 폴, 다이룬, 러바, 플라리, 에귈리, 슈브리, 문스, 토피에.”
아를과 함께 타나투라의 동굴에 들어갔던 모든 디온 기사들. 그들의 이름이 지금 르베나의 음성을 통해 조용한 허공을 퍼져나간 것이다.
“명령이야, 일어나!!!”
호명에 이은 르베나의 처절한 비명 같은 외침. 하지만 언제나 그녀의 말이라면 뭐든 다 하던 그들에게선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툭, 또 한 방울. 르베나의 눈에서 눈물이 더 떨어졌다. 그때, 이제껏 굳게 닫혀있던 국경의 문이 열렸다.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열리지 말아야 할 국경의 문이.
그리고 떨어지는 눈물과 함께 잔 떨림에 온몸을 내맡긴 르베나를 바라보며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활짝 열린 국경에서, ‘다니아’를 들고 선 것은 다름 아닌 아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