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제4장. 르베이나 (62)
“오랜만이에요, 스릴 공주님.”
조금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인 호안 왕자의 인사에 스릴 공주가 웃으며 답했다.
“정말이요. 그리고 왕자님의 신력 잘 봤어요. 엄청나던데요?”
스릴 공주의 칭찬에 호안 역시 그녀의 마력을 떠올리며 칭찬했다.
“공주님의 마력이야말로 르베나 님의 것과 정말 비슷한 느낌이 났습니다. 따뜻하고, 강하더군요.”
호안의 말에 큰 칭찬이라도 받은 듯 스릴의 얼굴에 옅은 홍조가 생겼다. 그런 둘의 모습을 바라보던 아를이 피식 웃으며 호안에게 물었다.
“유리엔 공주님은 같이 안 오신 겁니까? 공주님이라면 같이 오겠다고 하셨을 것 같아서요.”
아를의 말에 호안의 부드러운 얼굴에 사랑과 기쁨이 가득한 미소가 담겼다.
“유리엔은 생명력이 다시 찰 때까지 신력을 쓰지 말라는 어머님과 조부님의 당부 때문에 못 왔습니다. 안 그래도 같이 오겠다 얼마나 울던지. 겨우 떼놓고 오느라 좀 늦었습니다.”
호안 왕자의 말에 모두의 시선에 미소가 가득 담겼다. 각 국경에서의 전투를 마치고 르베나를 돕기 위해 다시 남쪽 국경에서 모인 그들에겐 아주 약간의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마침 남쪽 국경도 어느새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는지 디오니스가 압도적으로 ‘보토니에’를 상대하고 있었다.
화악—! 레턴의 손에서 터져 나온 주홍색의 신력이 주변을 휩쓸자 디오니스를 향하던 몬스터들이 모두 죽어 나갔다.
“그럼 나도!”
레턴의 부드럽지만 날카로운 신력을 본 스릴 공주가 이어 마력을 흩뿌리자 디오니스 베이라들이 따뜻하게 충전되는 힘과 동시에 큰 공격 마법들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이에 ‘보토니에’의 마법사들도 점점 눈에 띌 만큼 수가 줄어갔다.
그리고 휘이잉—! 호안 왕자의 금빛 신력이 일대를 감싸자 부상당한 디오니스의 기사들과 베이라들이 치유되는 자신의 상처를 바라보며 하나둘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완전한 디오니스의 승리. 그것이 이제 모두의 눈앞에 있었다.
“언니!”
전장의 가장 앞, 파벤더를 상대하고 있던 르베나를 본 스릴이 기쁨에 외치며 달려 나간 것도 그때였다.
“으헉!”
하지만 그 순간, 철푸덕 소리와 함께 아를과 함께 걷던 디온 기사 하나가 쓰러졌다.
“바리타!”
놀란 아를이 그를 불렀을 때였다.
“헉!!”
“아흑!”
동시에 수십 명의 디온 기사들이 이곳저곳에서 고통을 호소하며 쓰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모두가 당황한 그때, 레턴이 차가운 목소리로 읊조렸다.
“모두 파벤더의 흑마법에 당한 것 같네요.”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온 것과 동시에 르베나에게서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만해!”
멀리 퍼져 나올 만큼 큰 그녀의 목소리. 그것에 담긴 지독한 고통에 아를이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하하하!! 하하하!!”
쓰러진 룬을 보고 즐겁다는 듯 웃던 파벤더가 르베나를 보며 이죽거렸다.
“내가 얼마나 오래 이날을 기다려 왔는지 아나, 르베나 왕녀?”
파벤더의 말에 르베나가 충혈된 눈으로 그를 노려보자 루드바하가 서둘러 괴로워하는 룬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룬 경이 세뇌당할 만큼의 기회가 있었던가?”
그의 질문에 씨익 웃은 파벤더가 조금 떨어진 곳을 보며 답했다.
“지금 각 국경에서 너희의 지원군들이 오고 있군. 자칸의 스릴 공주. 마를한의 레턴 왕과 호오… 켄느의 왕자까지? 흐흐흐.”
일찍이 다가오던 그들의 힘을 느낀 르베나와 루드바하는 별말을 보태지 않았다. 지금 보이는 파벤더의 표정만으로 이미 충분히 불쾌했기 때문이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며 파벤더가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지원군이 온 들 너희가 나를 이길 수 있을까? 과연 그 기사 하나만 나한테 당했을까 이말이다.”
그때였다. 파벤더가 말을 함과 동시에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디온 기사들이 쓰러지기 시작한 건. 동시에 르베나가 괴로워하는 그들을 보며 절규한 건.
“그만해!!”
외치는 그녀의 목소리와 함께 검붉은 마력이 거칠게 파벤더를 향했다. 정제되지 않은 감정만큼 동요한 그녀의 마력은 불안정했고 그만큼 강했다. 그것이 파벤더의 전신을 후려치는 순간이었다. 파파박!!! 르베나의 마력이 파벤더에게 닿자마자 잔 스파크를 남기며 사라졌다. 그리고
“아아악!!!”
“흐악!!”
쓰러진 디온 기사들이 마치 르베나의 마법에 맞은 것처럼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한 것이다. 놀란 르베나의 시선이 파벤더를 향하자 그가 만족스럽게 웃어댔다.
“크하하! 재미있지 않나?”
곧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기사들이 더한 고통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이에 루드바하가 그를 보며 소리쳤다.
“무슨 짓인가!! 과거 유파시드였던 자로써 할 일이 무고한 기사들을 고문하는 것인가!”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 외치는 그의 분노에 대한 답을 파벤더는 비릿한 미소로 대신했다.
“말도 안되는 소리같이 들리겠지만… 디온 기사들의 고문은 그도 할 수 있지만 우리도 할 수 있는 것 같네요.”
그 순간 들려온 레턴의 말에 르베나의 시선이 매섭게 그를 향하자 레턴이 옆에서 고통스러워하는 룬을 보고는 말했다.
“이건 베이라들에게 건 자폭과는 달리 파벤더의 공격을… 대신 흡수하게끔 하는 흑마법입니다.”
레턴의 말을 들은 아를이 세게 그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레턴의 어깨에 아를의 분노와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런 게 있다고 해도 이들이 어떻게 마법에 걸릴 수 있는 겁니까! 게다가 나와 다한 경은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데!!”
흥분한 아를이 곧바로 레턴을 지나쳐 룬에게 다가갔다. 루드바하 마저 고통스러워하는 룬에게 신력을 퍼붓고 있었지만 룬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양 괴로워하기만 했다.
“룬!! 룬!!”
답지 않게 조금 흥분한 모습으로 룬을 부르던 아를의 눈가가 조금 붉어졌다. 언제나 무뚝뚝하지만 아벨디온을 아끼는 그의 마음을 모두가 좀더 선명하게 확인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룬은, 아를이 부르는 소리에도, 붉어진 그의 눈시울에도,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채 계속 고통스러운 신음만을 흘렸다. 그 모습을 본 르베나가 파벤더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동시에 그녀의 전신에서 차마 마법으로 발현되지 못한 마력들이 공기와의 마찰로 스파크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흥분으로 얼룩진 르베나의 눈을 본 파벤더의 얼굴에도 지나간 분노가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너희가 작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의 마법사들과 몬스터를 죽이고, 감히…….”
순간 파벤더의 눈에서 이제껏 감춰왔던 증오의 불꽃이 튀었다.
“나의 루를 죽여도 너희는 날 이기지 못한다. 왜냐하면 약점이 너무 많거든.”
파벤더가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이곳저곳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아벨디온의 고통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더욱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파벤더가 이어 말했다.
“내가 정말 이들을 죽이고자 타나투라의 소굴로 불러들였다 생각했나? 타나투라는 나로서도 길들이기 어려운 몬스터였는데 내가 정말 고작 기사 수십 명 죽이고자 그런 일을 벌였을까?”
파벤더의 말에 감이 좋은 아를의 시선이 세차게 흔들림과 동시에 그의 말을 부정하듯 소리쳤다.
“하지만 그곳에서 타나투라에게 찔린 건 룬뿐이었어!”
아를의 말에 파벤더가 만족스레 씩 웃으며 말했다.
“그래, 찔린 건 그렇지.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아를 드 메이슨 경. 그날 타나투라의 얇은 거미줄에 스친 모든 이들이 흑마법의 표적이 되었다면. 그래서 표적을 생각하며 발현한 흑마법에 그들이 걸렸다면? 그리고.”
곧 광기로 번진 파벤더의 눈이 점점 비릿한 미소로 번져갔다.
“실력이 유난히 좋은 자네만 그 거미줄로부터 무사했다면 말이지. 자네의 모든 부하들과는 달리.”
파벤더의 말에 아를의 손이 가늘게 떨려왔다. 랄프의 기지로 모두가 무사하다고 안심하고 좋아했던 과거의 제가 우습게만 느껴졌다. 르베나와의 포옹에 들떠 있던 그날의 자신이 머저리 같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순간, 파벤더의 말에 분노한 스릴 공주가 순간적으로 그를 공격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자 이런 짓을 벌인 파벤더가 과거 자칸의 여성들 역시 자신들이 원하는 힘을 위해 희생시킨 사실을 떠올린 탓이었다.
“죽어, 이 나쁜 놈아!!”
빠르게 쏘아진 그녀의 마력이 파벤더를 향했지만 얼마 가지 못해 누군가에 의해 막혀버렸다. 이에 놀란 스릴 공주가 자신의 공격을 막은 사람을 노려보자 그곳에 딱딱하게 굳은 얼굴의 르베나가 있었다.
“지금 파벤더를 공격하면 모두 디온이 타격을 받게 됩니다, 스릴 공주님.”
르베나의 말에 스릴의 시야가 한차례 떨려 왔다. 순간의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공격부터 한 자신이 조금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걸 본 파벤더가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크하하하!! 이래서 안 되는 거다, 르베나 왕녀. 너는 이래서 안 되는 거야! 크하하! 그러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너를 위해 내가 제안을 하나 하지.”
곧 파벤더의 손에 보기만 해도 불길하리만치 검은 마법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만약에라도 디온 기사들을 향한다면 그들 모두를 두 번 다시 못 볼 게 분명할 만큼의 힘이. 이에 르베나와 아를, 다한의 시선이 차례로 흔들렸다.
“내게 ‘다니아’를 가져와라. 그럼 이 힘은 너의 기사들에게 가지 않고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파벤더가 손에 모여든 힘 중 아주 일부의 것을 흘렸다. 그러자 룬이 아득한 고통에 허리를 꺾으며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크… 헉!!”
그와 동시에 호안 왕자가 짙은 치유의 힘을 흘렸으나 그 힘은 마치 목적 없는 허공을 통과하듯 룬의 몸을 스쳐 지났다. 그 모습을 본 파벤더가 모든 허공이 울리도록 웃으며 재촉했다.
“자, 조금만으로도 피를 토하게 만드는 이 힘을 저 기사들에게 쓸까, 응? 르베나 공주?”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이지만 루가 죽은 이후 계속 핀트가 어긋난 사람 같은 파벤더의 얼굴엔 이미 광기가 흘러넘쳤다. 그리고 그의 모습과 르베나의 머뭇거림을 본 모두의 얼굴에도 삽시간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제 겨우 ‘보토니에’의 적을 거의 물리쳤다 생각했다. 각국에서 모여든 지원군과 함께 남아 있는 파벤더만 죽이면 될 줄 알았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이 끝나고 다시 소중한 일상으로 돌아갈 줄 알았다.
하지만 그들 앞에 놓인 선택지는 힘들게 모인 이 많은 힘을 무용지물로 만들 수도 있는 힘겨운 결정이었다.
르베나의 어두운 시선이 고통을 내지르는 룬과 랄프 그리고 수십 명의 디온 기사단을 향했다.
이 중에는 어린 르베나를 구하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제1기사단 소속 기사들이 있었고 르베나와 함께 켄느에서 케투아 왕과 맞선 이들도 있었다. 아를, 다한과 함께 적은 수로 디오니스를 지키겠다 목숨을 건 이들도 있었고 무엇보다 언제나 르베나의 곁을 서슴없이 파고들었던 그녀의 동료들이었다.
디오니스를 구한 그때도, 오늘도. 조금도 자신의 몸을 생각하지 않던 그녀의 사람들, 그녀의 기사들이 이들이었다. 잠시 눈을 감은 르베나가 이내 선명한 눈빛을 다시금 드러내며 파벤더에게 물었다.
“‘다니아’를 건네 주면 이들에게 걸린 마법을 푼다고 어떻게 약속할 수 있지?”
그 순간 들려온 르베나의 말에 루드바하를 비롯한 모두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직 아를과 다한, 그리고 나머지 아벨디온 기사단만이 그녀의 선택에 시선을 돌렸을 뿐이다.
그리고 그때, 모두가 하지 못했던 말을 그, 루드바하가 르베나에게 했다.
“그대의 마음을 모르지 않습니다, 르베나. 그리고 디온 기사단을 구할 방법을 반드시 있을 겁니다. 그러니 저자에게 ‘다니아’를 주는 건 안 됩니다.”
여느 때와 달리 단호한 루드바하의 말, 그 시선에 르베나의 붉은 눈이 그를 뚫을 듯 마주 보았다. 그를 마주보는 르베나의 시선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