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241화 (241/276)

241화

제4장. 르베이나 (61)

“유안, 막아!!!”

북쪽 국경과 마찬가지로 마지막을 예상한 듯 광범위한 흑마법을 발현하는 적을 보고 라웅이 외쳤다. 동시에 바흐란과 다한, 아벨 기사단이 미리 약속한 대로 그들 중 유일한 마법사인 유안의 뒤로 갔다. 그리고 최대한의 검기로 보호막을 만들며 위로 치켜들었다. 하지만 흑마법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모래폭풍이 다가오는 모습을 보며. 또 그 주위로 흩날리는 작은 바위들이 사정없이 부스러지는 모습을 보며 유안이 굳은 목소리를 내었다.

“단단히 버티십시오.”

자신이 가진 모든 신력으로 거대한 실드를 만들어 내며 유안이 문득 멀리 솟아 있는 디오니스의 궁을 바라보았다.

“유안, 꼭 무사히 돌아와야 해.”

바로 귓가에서 들리는 것만 같은 루안 공녀의 목소리에 조용히 웃어보인 유안의 오른쪽 뺨에 붉은 생채기가 터져나왔다.

“우리 결혼해서 꼭 예쁘게 살자. 유안 닮은 아이도 많이 낳고.”

한 번 더 루안 공녀의 수줍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그를 비롯해 뒤에 선 모든 이들의 몸이 사정없이 휘청이기 시작했다. 모든 힘을 다해 강타한 적의 마법은 그만큼 강했고, 악랄했으며 끈질겼던 것이다. 그 힘에, 그 어두움 힘을 만들기 위해 희생된 수많은 이들의 눈물과 고통에 유안을 비롯해 바흐란과 라웅, 다한과 아벨 기사단의 몸이 크게 휘청이기 시작했다.

“아직 르베나한테 고백도 못 했는데!”

휘청이는 몸에 가까스로 힘을 주며 외친 바흐란의 말에 라웅이 검을 좀 더 세게 잡으며 외쳤다.

“우리 폐하, 왕녀님 거야!! 그러니까 자칸의 왕자님은 좀 빠져!!”

위급한 상황에서도 불안함을 떨치려 농담을 주고받는 두 사람의 모습에 유안과 다한의 얼굴에도 실없는 미소가 피어올랐다. 두려움이라는 존재는 인지하는 순간 속절없이 크기를 키우는 몬스터 같기에. 하지만 애써 지어보인 웃음이 무의미하게도 흑마법은 더 강하게 사위를 감싸왔다. 펑! 소리와 함께 유안의 실드가 속절없이 깨져 버렸고 일행을 향해 검게 물든 ‘보토니에’의 힘은 성큼 그 크기를 불려 다가왔다.

‘미안합니다, 루안.’

그녀에게 전하지 못할 사과를 유안이 조용히 되뇌였다. 휘익---! 그때였다, 기분좋은 바람이 그들을 감싸온 것은.

“그런 꼴로 감히 르베나 언니한테 고백을 한다고요?”

‘보토니에’의 마법과 함께 불어오는 강풍이 강인한 기사들의 몸마저 흔드는 무자비함 속, 모두의 귀에 태연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동시에 영롱한 녹색의 마력이 만들어내는 커다란 공격 마법이 홀로 흑마법사들의 강대한 마법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아니, 그 마법은 그리고 그것을 시전한 마법사의 모습은 대항이라고 표현하기엔 부족함이 있었다. 강풍에 흩날리는 그녀의 머리카락은 풍성했고 흔들림 없이 앞을 바라보는 녹안에는 한 점의 흔들림도 없었으며 적을 향해 발현한 강대한 마력은 따뜻하고 올곧았으며 무엇보다 강했기 때문에.

“…르베나 왕녀님의 미니미?”

넋이 나간 듯한 라웅의 중얼거림에 순간 뒤를 돌아본 그녀, 스릴 공주가 씩 웃으며 말했다.

“칭찬 감사해요, 라웅 경.”

라웅의 말이 진심으로 마음에 든 것인지 활짝 웃은 스릴 공주가 고개를 돌려 놀란 얼굴을 한 바흐란을 보았다. 그리고 쯧쯧 혀를차며 말했다.

“오라버니, 그런 꼴 사나운 모습으로 우리 언니한테 고백할 생각같은 건 꿈도 꾸지 말아요. 그리고 다한 경.”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놀라 커다라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다한에게 스릴의 선명한 시선이 향했다. 그리고 그녀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렇게 놀라실 것 없어요. 자칸은.”

곧 다시 앞을 보며 더 광활한 마력으로 ‘보토니에’의 공격을 몰아내며 스릴이 말했다.

“절대 은혜를 잊지 않으니까요.”

그녀의 말과 함께 스릴의 곁에 나타난 수백 명의 자칸 기사들이 일제히 그들의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바흐란이 든 것과 닮아있는 동그란 검에서 피어오른 수백의 검기가 당황한 채 굳어있는 ‘보토니에’를 향해 망설임 없이 나아갔다.

“아를 경!!”

루시드의 부름과 동시에 아를이 다가오던 흑마법을 자신의 검으로 가까스로 막아냈다. 동시에 그의 시린 눈이 방금 마법을 쏘아낸 ‘보토니에’의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온몸이 단단한 강철로 되어 있어 좀처럼 베기가 힘든 이 자와 벌써 몇 시간째인지. 여기저기 상처투성이가 된 아를이 겨우 그의 목을 빗겨 어깨를 베어내자 그의 거대한 몸이 비틀거렸다. 그 틈에 아를이 훌쩍 흑마법사와 거리를 벌리고는 바라보자 루시드가 외쳤다.

“그자, 몸속 마법의 흐름이 이상합니다. 바로 피하십시오!!!”

루시드의 말과 동시에 아를의 몸이 용수철처럼 튀어 그에게서 더 멀어졌다.

펑!! 퍼버벙!!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그곳에 있던 모든 ‘보토니에’ 흑마법사들의 몸이 폭발하기 시작한 건. 생명력을 다한 그들의 폭발은 단 한 명만으로도 주위의 수십 명을 죽일 만큼 강했다. 그리고 그런 폭발이 지금 아를과 디온 기사들의 앞에 연쇄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과 이곳에 함께 온 기사들을 한 번씩 훑어본 아를이 서둘러 루시드를 향해 소리쳤다.

“디온을 부탁합니다, 루시드님!!!”

들려온 아를의 외침과 동시에 루시드의 미간이 살짝 구겨지며 그의 신력이 크기를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장 디온 기사단의 몸을 가까스로 감싸며 더욱 커다란 실드를 만들어 냈다. 짧은 시간, 모든 디온 기사들을 감싼 루시드가 서둘러 조금 떨어져 있는 아를을 바라보았다. 아를의 몸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기사들을 먼저 루시드에게 부탁하고 남아있던 흑마법사들을 상대하던 아를의 곁에는 이미 강철로 구성된 흑마법사가 성큼 다가와 있었다. 퍼버벙!! 그리고 루시드의 신력이 아를에게 채 닿기도 전, 강철 흑마법사의 폭발이 일어났다.

“아를 경!!”

“단장!!”

“아를 단장님!!”

루시드의 외침과 동시에 디온 기사들이 실드에 싸인 채 아를의 이름을 힘껏 외쳤다.

그리고 아를 역시 그들의 외침을 들음과 동시에 자신의 검에 힘을 실었다.

‘제발, 제발……!’

짧은 시간. 눈앞의 흑마법사가 터지고 그의 몸을 이루던 강철이 산산조각 나 날카롭게 퍼지는 그 잠깐의 순간. 르베나에게 엉망으로 전한 고백과 그걸 듣고 미안해했던 그녀의 얼굴이 너무도 선명하게 아를의 머릿속을 점령했다. 그때 아를의 시선이 문득 자신이 들고 있던 검으로 향했다.

[아를 드 메이슨, 나의 영원한 친구에게.]

르베나가 선물한 검에 새겨진 그녀의 마음. 순간 아를이 검을 든 손을 치켜들며 더 환한 검기를 흩뿌리기 시작했다.

‘포기는 안되.’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그의 빛에 날카로운 강철 조각들이 닿자 모래로 변하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계속 터져나오는 흑마법사들의 숫자는 많았고 아를의 검기가 그 모든 것을 감당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생각지도 못했던 누군가의 목소리가 아를의 앞에서 들려온 것은 그 순간이었다.

“더러운 힘으로 감히 그를 범하지 말아라.”

나긋하면서도 서늘한 목소리. 동시에 눈이 부실만큼 황홀한 금빛의 신력이 그들이 있는 동쪽 국경 전체를 거칠게 휘몰아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놀란 듯 치켜뜬 아를의 시선이 홀로 국경 하나를 손쉽게 휘어잡은 신력의 주인을 향했다. 스스로 걸었던 봉인을 푼 건지. 어느새 훌쩍 큰 키와 허리까지 내려오는 차분한 금발, 호리호리한 몸과는 어울리지 않는 광폭한 신력.

“...호안 왕자.”

아를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로 그를 부르자 휙 뒤로 돌아선 호안 왕자가 언젠가처럼 선한 눈매로 웃어 보이며 말했다.

“만약 왕자님의 첫걸음에 기쁨과 환희보다 걱정과 두려움이 앞선다면, 왕자님은 지금 제대로 된 길을 내고 계신 겁니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이어 뜻 모를 소리를 하는 호안 왕자를 아를이 그를 조금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그러자 호안 왕자가 아를의 몸에 난 상처들을 차분히 치유하며 덧붙였다.

“이건 르베나 왕녀님이 아니라 아를 경이 한 말이더라고요?”

예전, 아버지 케투아 왕에게 처음 신력을 발현하고 힘들어하던 호안 왕자에게 전했던 말.

르베나의 말 뒤에 살짝 덧붙였던 작은 위로. 그걸 떠올린 아를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랬나요.”

분명 알고 있음에도 모르는 척 웃어버린 아를의 얼굴을 보고 부드럽게 따라 웃은 호안 왕자가 ‘보토니에’를 휩쓰는 자신의 금빛 신력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때의 빚을 갚으러 왔습니다, 아를 경.”

마주 보는 호안 왕자의 눈에는 더 이상 어떤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동시에 그의 호박색 눈과 아를의 금안 뒤로 금빛의 신력이 부드럽게 그들을 보호하며 ‘보토니에’를 매섭게 휘감아 치고 있었다. 그 광경이 동쪽 국경을 배경으로 광활하게 펼쳐지는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루시드 또한 보고 있었다.

‘루드바하만큼의 강함은 아니지만 그만큼 환하고 밝은 금빛 신력을 가진 호안왕자라.’

잠시 생각에 잠긴 그에게 누군가의 놀림이 들려온 것도 그때였다.

“아를 경도 지키지 못하다니. 죽을 때가 다 됐군, 루시드.”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루시드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처음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모든 긴장을 풀어내듯 피곤한 눈가를 가리며 말했다.

“왜 이제 왔나. 조금만 늦었으면 정말 그렇게 될 뻔했네.”

아주 조금 떨리는 루시드의 말에 그의 상처들을 치료하기 시작한 그, 아사드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만개한 손자의 신력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 * *

“이제 우리도 끝을 내야겠군.”

세 개의 국경에서 연달아 터져 나온 힘을 본 파벤더가 부쩍 지친 얼굴로 르베나와 루드바하를 보며 말했다. 역시나 그만큼 지친 기색의 르베나가 그에게 말했다.

“그 얘기는 벌써 백 번도 더 들은 거 같은데. 지겨워 죽을 것 같군.”

벌써 하루가 꼬박 지나 버린 전쟁에 조금 힘이 빠진 르베나의 말. 이에 피식 웃어 보인 파벤더가 루드바하를 보며 말했다.

“그대의 연인은 생긴 거와 달리 조금 입이 험하군.”

이에 곧바로 쏘아진 검붉은 마력을 막아낸 파벤더의 모습을 본 루드바하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더 매력적이지.”

루드바하의 말에 허탈하게 웃어 보인 파벤더가 조금 아쉬운 눈빛으로 말했다.

“아쉽군. 그대들을 이렇게 적으로 만나야 하는 지금이.”

잠시 씁쓸한 그의 목소리에 과거 너무 강했기에 더 외로웠던 어느 유파시드의 외로움이 깊이 배어들었다. 하지만 곧 이전처럼 파벤더가 그들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돌이킬 순 없지. 나의 루가… 죽어 버렸으니.”

파벤더의 눈에 진한 그리움과 분노가 차례로 스쳐 지났다. 곧 그의 눈에 독기가 흘러 넘쳤다.

“내가 아까 말했지? 아무리 사랑해도 원하는 게 같아야 그 사랑이 진짜가 된다고. 그러니 이제 정말 알아보도록 하지. 평화와 정의를 수호하는 젠의 유파시드와 그 무엇보다 자신의 사람이 소중한 르베나 왕녀의 선택이 언제나 같을지 말이야.”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파벤더에게 르베나가 다시 한번 공격 마법을 퍼부었다. 아니 그러려던 찰나, 누군가 그녀의 마법을 막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루드바하가.

“루드?”

이에 르베나가 의아한 듯 그를 불렀다.

“르베나.”

하지만 대답이라고 하기에 들려온 그의 음성에 담긴 떨림은 지금 상황과 너무도 어울리지 않았다. 곧 르베나가 그를 의아한 듯 바라보았지만 루드바하의 시선을 그녀를 향해 있지 않았다. 이에 르베나 역시 루드바하의 시선과 파벤더의 미소가 향한 곳으로 자신의 시선을 돌렸다.

“룬……?”

곧 의문을 담은 르베나의 목소리가 자신의 뒤를 지키던 기사, 룬에게 향한 순간……!

룬의 전신에서 생명력을 담은 미약한 마력이 폭주하듯 날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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