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240화 (240/276)

240화

제4장. 르베이나 (60)

“지난번과는 비교가 안 되는군요.”

나지막한 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전신에서 검붉은 마력이 솟아올랐다.

이를 본 룩센 공작이 다가오는 ‘보토니에’ 무리를 보며 말했다.

“유파시드께 전해 듣길, ‘보토니에’의 약을 먹은 흑마법사들의 힘이 제법 세다더군요. 오늘 보여줘야겠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세다 해도 감히 신성한 힘을 정면에서 상대할 수는 없다는 걸.”

이윽고 룩센 공작의 전신에서도 선명한 보랏빛의 신력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점점 퍼지던 그의 힘이 슬그머니 칸의 옆에 있는 루안의 몸을 덮었다.

“죽어라!!”

어느새 다가온 ‘보토니에’ 적들의 그림자가 비친 순간. 루안의 몸에서도 보랏빛 신력의 자락들이 펄럭거리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마법과 마법의 전쟁이라 불러도 될 만큼 북쪽 국경에는 색색의 마법들이 현란하게 허공을 오고가기 시작했다. 국경의 바로 앞에서 다가오는 적들을 섬멸하는 칸의 검붉은 마력과 룩센 공작과 루안의 보랏빛 신력이 특히 그러했다. 마법의 충돌이 빚어낸 굉음과 흙먼지가 사위를 어지럽혔다. 적들을 향해 흔들림없이 발현되는 각자의 힘은 선명했고, 그럼에도 끝이 없는 적들의 수는 셀 수가 없었다.

이윽고 가까이 다가온 흑마법사를 검으로 베어낸 루안에게 흑마법이 쏘아진 건 한시도 쉴 수 없던 국경에서의 전투가 시작되고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였다. 조금 지쳐있던 루안이 검검이 뒤늦게 검기를 피어 올리는 순간 늦었다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이미 깜깜해진 밤. 체력과 정신력은 끝 모를 전투에 이미 지쳐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화악--! 불타오르는 신력이 그의 앞을 단단히 막아섰다.

“조심해야지!!!”

순식간에 다가온 룩센 공작의 신력이 순식간에 루안을 감쌌고 호통같은 그의 외침이 그 뒤를 따랐다. 언제 봤다고 저렇게 말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자신을 구해준 룩센 공작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전한 루안의 시선이 다시 앞을 향했다.

그리고 검붉은 마력의 폭풍으로 수십 명의 적을 한 번에 죽이고 난 칸의 시선은 루안을 걱정스레 바라보는 룩센 공작을 향했다. 적을 상대하면서도 틈틈이 루안이 다칠까 걱정하는 그의 모습에서 조금 전 막사 밖에서 나눈 대화가 생각난 탓이었다.

“루안이 저의 아들이 맞다면 아이의 어깨에 작은 흉터가 있을 겁니다. 아기 때 기저귀를 갈던 루안을 제 딸아이가 할퀴었거든요.”

그의 말에 칸의 시선이 한차례 흔들리자 그것을 긍정으로 이해한 룩센 공작의 시선이 떨려왔다.

“맙소사. 정말 그 아이가… 내 아들입니까?”

공작의 눈에 어린 눈물을 본 칸이 잠시의 망설임 끝에 물었다.

“루안은 제가 발견할 당시 어디선가 탈출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전 그곳이 ‘보토니에’라 확신합니다. 아마 어릴 때부터 발현된 신력 탓에 유괴되어 키워진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당시 아이에게 걸쳐져 있던 허름한 옷자락에 ‘루안’이라고 쓰여 있어 그리 불러주게 되었죠. …만약 루안이 정말 룩센 공작님의 아이가 맞다면 원래 그 아이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칸의 시선이 순간 깊이 있게 벼려졌다. 하지만 룩센 공작은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라피엘입니다. 두 아이가 쌍둥이 인지라 각 아이의 모든 소지품에 각자의 이름을 새기게 했는데 어째서 라피엘이 루안의 옷가지를 걸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 그리고보니 두 아이를 헷갈리지 않으려 아기들에게 이름을 새긴 작은 팔찌를 채웠습니다. 그리고 라피엘이 잠시 영지에 내려가 있을 때 서로를 잊지 말라고 다른 아기의 이름을 새긴 팔찌도 함께 채웠지요.”

그 순간 룩센 공작의 말에 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사실 처음 루안을 발견했을 때, 아이는 ‘보토니에’에서 훈련받는 내내 두 개의 팔찌를 몰래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하나는 루안이라 쓰인 분홍색 팔찌였고, 다른 하나는 라피엘이라 쓰인 보라색 팔찌였다. 칸이 루안에게 어떤 이름이 더 좋냐고 묻자 아이는 ‘루안’을 선택했다.

“이 이름이… 더 많이 불렸으면 좋겠어요. 이름만 들어도 행복해지거든요.”

곧 칸이 룩센 공작을 보며 말했다.

“전쟁이 끝나면 말해주십시오. 루안, 아니 라피엘에게.”

조금 전 대화를 떠올린 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무뚝뚝하지만 정이 많고 착한 루안에게 아니 라피엘에게 친아버지가 생겼다. 그리고 이 전쟁이 끝나면 둘은 서로를 마주 볼 것이다.

그러니.

“서둘러 끝내야겠구나, 르베나.”

어느새 칸의 손에서 폭사해나간 검붉은 마력과 비슷한 마력이 저 멀리서 어두운 밤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 * *

“너희는 내 상대가 안 돼!!”

파벤더의 손에서 나간 검은 마법이 폭풍처럼 전장을 휘저었다. 루가 죽고 이성을 잃은 듯한 그의 마법은 더는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힘이 전장에 닿기 바로 직전, 금빛의 신력이 전장 위를 지나며 디오니스의 모든 이들에게 실드를 씌웠다. 그 위로 광폭한 검붉은 마력이 피어올라 전장에 내리던 검은 바람을 한순간에 몰아내었다.

이에 히스테릭한 소리를 내지르는 파벤더를 보며 르베나가 말했다.

“네가 우리의 상대가 안 되는 거겠지.”

순간 르베나의 손에서 스파크가 이는 마력이 하늘을 뚫을 듯한 기세로 피어올랐다. 파벤더가 이를 보자 르베나가 허공을 울릴 굉음과 함께 그에게 곧장 마력을 쏘아냈다. 이에 곧바로 루드바하가 강한 폭풍우의 힘을 실은 신력을 르베나의 마법에 보태었다.

강한 번개와 폭풍우가 만나 더욱 강해진 마법이 파벤더의 전신을 강타한 순간이었다.

“으아악!!!”

엄청난 괴성을 내지른 파벤더의 전신에서 피어오른 검은 힘이 가까스로 그들의 마법을 몰아냈지만 강한 르베나의 마력과 루드바하의 신력은 꺼지지 않고 그대로 파벤더가 밀어낸 대로 아래를 향해 떨어졌다.

“으악!!”

“파벤더 님!”

그 순간. 그의 아래에서 전투를 치르던 ‘보토니에’ 마법사들이 고통스러운 절규와 함께 재가 되어 흩어졌다. 그것을 본 파벤더가 비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나 입술을 떼는 그의 눈은 이제 아무것도 담지 않은 채 텅 비어 있었다. 마치 루가 없는 세계를 모두 거부하겠다는 듯.

“루를 구하지 못한 너희는 죽어 마땅하다. 흐흐…….”

정신을 잃은 듯한 그의 모습에 루드바하와 르베나의 시선이 깊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파벤더의 몸에서는 또다시 검은 마법이 구체화 되어 르베나에게 쏘아졌다.

“죽어라! 루의 뒤를 따르란 말이다!”

그의 현재 모습을 대변하듯 광폭하게 쏟아진 마법에 루드바하가 르베나의 앞을 부드럽게 막아섰다. 곧바로 이어진 그의 환한 금빛 신력이 파벤더의 마법을 막아 내자 둘 사이 반동으로 엄청난 바람이 불어닥쳤다.

“으악!!”

그 바람의 영향으로 아래 전장에서 비명이 들렸고 곧바로 르베나가 팅을 불렀다.

“팅!!”

그녀의 부름에 르베나의 몸속에서 빠져나온 팅이 전장의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는 디오니스의 기사들과 베이라들의 위로 얇은 막을 형성해 그 바람의 여파를 막아 주었다.

이를 본 파벤더가 이를 갈며 외쳤다.

“끝이라 생각하지 마라. 루가 죽은 걸로 끝이라 생각하지 말라는 소리다!!”

순간 그의 몸이 훌쩍 날아 르베나에게 다가가려 하자 루드바하가 또다시 르베나의 앞을 막아서며 짓씹듯 말했다.

“감히 르베나의 곁으로 오지 마라.”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 금빛의 신력이 폭발하자 파벤더의 몸이 훌쩍 뒤로 밀려났다.

“크크. 그래. 너희의 그 대단한 사랑을 내가 오늘 꼭 끝내 주지.”

순간 이상하리만치 차분해진 파벤더가 르베나와 루드바하를 보며 중얼거렸다.

“연인이라는 건 나와 루처럼 같은 곳을 향했을 때 타오르는 거다. 너희는 서로가… 아니, 르베나 왕녀가 결정적인 순간 너와 다른 선택을 한다 해도 너는 그녀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의미 모를 파벤더의 말에 르베나와 루드바하가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광범위하게 퍼져가는 검붉은 마력에 보라색의 신력이 덧입혀졌다. 두 겹으로 합을 이룬 마력과 신력이 내는 공격에 닿은 ‘보토니에’들이 짧은 비명과 함께 스러져 갔다.

동시에 북쪽의 국경을 끊임없이 향하던 몬스터들과 흑마법사들도 보랏빛 신력에 막혀 더 이상 거리를 좁히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덧 깊은 저녁. 하루 대부분을 끊임 없는 전투에 시달린 이들의 체력이 해와 함께 저물고 있었다.

“얼… 마나 더 가능하십니까?”

또다시 몰려오는 적을 보며 룩센 공작이 힘겹게 묻자 칸이 조금 떨리는 손을 바라보며 답했다.

“신체적으로는 얼마 안 남았습니다. 하지만…….”

쾅!!

단 한 번의 쉼표도 없이 지척을 울려 대는 굉음, 폭발, 빛. 그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남쪽 국경의 르베나와 루드바하. 그들을 생각한 칸이 떨리는 두 손 가득 다시 검붉은 마력을 만들어내며 말했다.

“버텨야죠. 르베나가, 유파시드께서 버티시는 그 만큼.”

그 순간이었다. 칸의 시선이 약간의 두려움을 갖고 앞을 향한 것은.

“제발 죽어라!!”

‘보토니에’의 약을 먹었음에도 이미 만신창이 된 수십 명의 흑마법사들이 생명을 건 마지막 주문으로 발현한 마법.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크고, 어두우며 세상을 모든 암흑을 밀어 넣은 것 같은 힘이 이제껏 보지 못한 크기와 힘을 갖고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걸 본 루안이 떨리는 시선으로 입을 열 찰나, 정갈하던 머리카락이 어느새 한껏 헝클어진 룩센 공작이 루안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남은 모든 힘을 실드에 실어라, 저건 나와 칸 님이 맡을 테니.”

루안에게 말을 하고는 허락의 의미로 자신을 바라보는 룩센 공작에게 칸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칸 역시 당황하는 루안을 보며 언제나와 같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루안, 전쟁이 끝나면 네게 꼭 소개해 줄 사람이 있다. 그러니 온 힘을 다해 너를 지키거라. 부탁이다.”

칸과 룩센 공작의 말에 루안이 반발하려 했다. 모두가 긴 전쟁과 곧바로 이어진 국경에서의 전투로 지쳤다. 하물며 칸과 룩센 공작이 아무리 세다 한들 그들의 나이가 있었다. 그들에게 저걸 맡기고 자신만 실드를 치라니. 루안으로써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다가온 보토니에의 힘은 강하고 감히 그 크기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칸 님!! 공작님!!”

순간 놀란 루안의 보라색 눈이 어느새 다가온 흑마법의 검은색으로 그림자 졌다. ‘보토니에’ 마지막 일격을 향해 발현한 칸과 룩센 공작의 공격 마법에 금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이는 못 속이겠군. 루안 실드를 강화해라.”

자신을 보며 한번 웃고는 멀리 남쪽 국경에서 터져 나오는 검붉은 빛을 바라보는 칸도.

“실드를 단단히 해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대 풀지 말아라. 그리고… 반가웠다.”

알 수 없는 끝말을 삼키며 더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룩센 공작도.

이미 끝을 예견한 듯했다. 그리고 그 순간. 파지직. 파지지직-! 예리한 파열음과 함께 그들의 마지막 공격 마법이 깨져 버렸다.

“루안, 실드!”

“루안, 꼭 살아남거라!”

두 사람의 외침과 동시에 거대한 흑마법의 기운이 그들을 덮쳐 왔다. 루안이 놀라 실드를 풀고 룩센 공작과 칸을 향해 실드를 덮었지만 그의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임이라고. 한껏 다가온 흑마법의 기운이 시리게 전신을 덮쳐왔기 때문이다.

“여기서 돌아가시면 제가 르베나 님을 볼 면목이 없어요, 아버님.”

하지만 그 순간. 환한 다홍색의 신력이 그들의 앞에 광할한 빛과 함께 펼쳐졌다. 그리고 밀려오던 흑마법을 멀찍이 밀어낸 그, 레턴이 화려한 로브를 펼치며 히죽 웃었다. 동시에 콰과광..! 어디선가 더해진 엄청난 무력의 힘이 안그래도 레턴에 의해 밀려나던 흑마법을 단숨에 깨부수며 걸걸한 목소리를 내었다.

“아직 르베나 님을 소개받지 못 했습니다, 칸 님!”

전 대륙 모두가 탐내는 그들, 다이아 용병이 마를한의 왕 레턴과 함께 칸과 룩센, 루안의 앞을 막아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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