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제4장. 르베이나 (59)
루드바하가 차분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그를 따라 텔레포트 하니 그곳에 수천의 몬스터와 아직까지 드러나지 않은 ‘보토니에’ 마법사만 수백에 달했습니다. 아무래도 시간과 전력을 버리더라도 르베나가 백성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이용할 생각인 것 같아요.”
루드바하의 말에 바흐란이 질린다는 듯 소리쳤다.
“아니, 저기서 싸우고 있는 쟤네가 끝이 아니란 말입니까? 게다가 수백이라니? 저번에 약을 먹은 보토니에의 마법사 한두 명도 힘들었다며!!”
바흐란의 말에 아를이 얼굴을 굳히며 답했다.
“무려 50년간 이날만 준비해온 자들이니 충분히 가능하겠지. 르베나,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모두 흩어져야겠어. 미리 얘기한 대로.”
아를의 말에 르베나의 얼굴에 잠시 망설임이 생겨났다. 그걸 알아본 칸이 곧바로 그녀에게 말했다.
“이럴 경우를 대비해 각 국경에 갈 사람들을 미리 나눠 놓은 거 아니냐, 르베나.”
하지만 칸의 말에도 르베나가 별도의 말이 없자 모두를 대신해 룩센 공작이 나서 말했다.
“르베나 왕녀님. 나는 단순히 디오니스를 지키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다니아’를 저들에게 빼앗기지 않음으로써 젠을 지키고 또… 내 아이의 복수를 하러 온 겁니다. 그걸 분명히 알아 주었으면 좋겠군요.”
룩센 공작의 시선이 어느새 칸에게 다가와 무엇인가를 말하는 루안에게 잠시 닿았다 떨어졌다. 그가 놀란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르베나에게 이어 말했다.
“그러니 저희가 다칠까 봐 두려운 마음은 거두십시오. 저희 모두 왕녀님 못지않은 마법사들이니.”
언제나 르베나보다 더한 무표정을 고수하던 룩센 공작의 말에 르베나가 진한 고마움을 담은 눈빛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냉정해진 시선으로 모두에게 말했다.
“그럼 모두 사전에 얘기한 대로 각 국경을 담당해 주십시오. 현재 남쪽 국경에 몰린 적군으로인해 다른 국경에 지원군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 적은 인원일지라도.”
르베나가 순간 떨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궁에서 가장 가까운 남쪽은 이미 포화상태였다. 여기서 다른 국경으로 더 이상의 다니아와 아벨디온 그리고 베이라들을 차출하기는 어려운 상황. 결국 고작 몇 명이서 국경 하나를 책임져야 하는 최악의 상황 앞에서 르베나가 마음을 가다듬는 순간이었다.
“죽지 말고 살아계십시오. 그 전에 끝내겠습니다.”
르베나의 눈빛에서 전해지는 각오는 언제나처럼 단단했다. 이에 그녀의 주위에 몰려있던 사람들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와 동시에 모두들 서둘러 모습을 감추었다.
끝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 디오니스 모든 국경에서의 전쟁이 다시 시작된 순간이었다.
“르베나, 걱정하지 말아요. 그들이 다치기 전 당신과 내가 파벤더를 잡으면 됩니다.”
모두가 떠나고 유일하게 르베나의 곁에 남은 루드바하의 따뜻한 위로에 르베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루드바하가 르베나를 자신의 품에 가득 안으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이 잘못되는 줄 알고… 그럴 리 없는 걸 알면서도 무서웠습니다. 이제 다시는 하지 마세요, 그런 건.”
자신을 안은 그의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져 와서, 사정없이 뛰어 대는 그의 심장 박동이 너무 거세서, 르베나가 그를 마주 안으며 말했다.
“약속할게요. 참아 줘서… 고마워요, 루드.”
르베나의 말에 루드바하가 힘겹게 르베나를 안은 손을 놓았다. 동시에 두 사람의 몸에서 광활한 신력과 마력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
곧 르베나가 불꽃처럼 타오르는 시선을 빛내며 전장 속으로 섞여들었다.
“이제 루를 잡기 위한 전초전은 끝났어요.”
“잘 부탁합니다, 아를 경.”
함께 동쪽 국경으로 오게 된 루시드의 인사에 아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희 역시 잘 부탁드립니다.”
아를의 말과 동시에 그와 그의 뒤에 선 디온 기사단의 검에서 일제히 검기가 뻗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가오는 ‘보토니에’ 마법사들과 몬스터를 보며 루시드가 웃어 보였다.
“지난번하고는 상대도 안 되는 숫자로군요. 게다가 저들 모두… ‘보토니에’의 약을 이미 먹은 듯합니다.”
지난 번 ‘보토니에’의 약을 먹은 몇 명 마법사와의 대치도 힘겹게 끝이 났다. 하지만 그런 이들이 말도 안되는 숫자로 늘어났고 싸울 인원은 모두 남쪽에 집중되어 더욱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점점 가까워지는 적군의 모습에 루시드와 아를, 그리고 디온 기사단의 눈은 날카로운 각오가 단단히 새겨지기 시작했다.
곧 아를의 바스타드 소드가 묵직하게 그어지자 그곳에서 수많은 비명이 그의 검날을 울려댔다. 뺨에 튄 피를 채 닦지도 않은 아를이 서늘한 시선으로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 순간 그를 향해 날카로운 흑마법사의 공격이 다가왔다.
쾅……! 하지만 그것은 루시드가 쏘아낸 실드에 막힌 채 큰 굉음을 내며 사라졌다. 자신의 코 앞에서 일이난 일이건만, 아를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콰과광……!
끝없이 울려대는 남쪽 국경의 소리가 요란스러워서. 그곳에서 모든 힘을 다할 르베나가 생각나서. 혹시라도 다칠 그녀가 걱정돼서. 그래서 아를에게는 멈출 시간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곳을 정리하고 그녀에게 가고 싶은 그 마음 하나로. 그 하나로 아를은 모든 ‘보토니에’의 피를 뒤집어 쓰고 나아갔다. 촤악!! 다시 한번 그어낸 아를의 칼날에 수많은 목숨이 피로 변해갔다.
하지만.
“단장, 끝이 없습니다.”
어느새 옆을 지키기 위해 다가온 마룬의 굳어진 말에 아를이 무감각한 시선을 들어 올렸다. 자신들의 수가 무색하게 끝없이 뻗어오는 ‘보토니에’. 그나마 루시드가 펼쳐낸 실드가 아니었다면 국경은 이미 뚫렸을지도 모를 상황.
쾅!! 마룬의 말을 듣기라도 한 듯 국경 바로 앞에서 실드를 유지한 채 루시드가 공격 마법으로 디온 기사단과 아를의 앞 넓은 공간을 깔끔하게 정리해 줬다. 그걸 본 아를이 제 뺨에 눅진하게 붙은 피를 거칠게 쓸어내며 말했다.
“끝이 없으면 만들면 된다. 그게 르베나의…그분의 아벨디온이다.”
“우리로 충분한 거 맞지?”
다가오는 적을 보고 살짝 긴장한 듯한 라웅의 말에 유안이 커다란 실드를 쳐내며 말했다.
“내가 있으니 그렇겠지.”
유안이 답지 않게 농담을 한 그 순간 다한이 우직하게 검을 세우며 말했다.
“함께 싸우게 되어 영광입니다.”
앞을 보고 꼿꼿한 자세로 전한 다한의 말에 그의 옆에 있던 바흐란 왕자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유언같은 소리 하지 마!!”
그의 외침에 다한의 얼굴에 비로소 살짝 미소가 감돌았다. 좀처럼 보기 힘든 그의 미소에 바흐란과 라웅이 놀란 듯 그를 바라보자 뒤에 도열하고 있던 아벨 기사단을 흘끗 본 다한이 다시 말했다.
“디오니스를 위해 검을 들어준 자칸과 젠의 마음을. 저희는 모두 잊지 않을 겁니다.”
곧 다한의 눈에 날카로운 예기가 배어들었다. 그와 함께 아벨 기사단과 라웅, 바흐란의 검에서도 강렬한 검기가 피어올랐다.
“악! 무서워!!”
말과는 달리 다가오는 물고기 모습의 흑마법사를 한 번에 베어낸 라웅의 몸이 훌쩍 하늘 위로 떠올랐다. 그리고 착지와 동시에 세 명의 흑마법사가 갈라지며 그의 검에 녹색의 신력이 반짝였다.
“나는 하나도 안 무서워!”
라웅에게 들으라는 듯 외치며 내리그은 바흐란의 동그란 칼날에 두 명의 흑마법사가 쏘아 낸 공격 마법이 충돌하며 폭발을 일으켰다. 그 반동에 뒤로 날아간 바흐란의 몸을 라웅이 발로 차자 바흐란이 다시 앞으로 날아가며 외쳤다.
“너 이거 왕족 불경죄야!!”
외침과 동시에 그를 향해 마법을 준비하던 흑마법사 둘을 베어낸 바흐란이 땅에 착지하며 검날의 피를 털어냈다. 곧이어 그의 옆으로 다한의 서늘한 눈빛과 수십 명의 아벨 기사단의 검기가 빠르게 지나갔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조금 지친듯한 바흐란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서쪽 국경으로 온 게 오후였는데 어느새 해가 진 하늘은 어두웠다. 고작 열댓 명의 인원으로 끝없이 몰려오는 몬스터와 수십 명의 흑마법사. 그것도 ‘보토니에’의 약을 먹은 자들까지 상대하는 건 벅찬 일이 분명했다. 하지만.
펑!! 콰과광……!!
남쪽 국경에서 광활하게 타오르는 검붉은 마력과 금빛 신력. 그리고 그에 맞서는 흑마법의 충돌을 보면 감히 힘들다고 투덜거릴 수가 없었다.
“끝나는 건 맞는 거지?”
또다시 다가온 흑마법사의 공격 마법을 피하고 베어낸 바흐란이 소리쳐 물었다. 하지만 라웅도, 다한도, 수십 명의 아벨기사단도 선뜻 대답하지는 못했다. 그 순간 화아악—! 유안의 광범위 공격 마법이 다가오는 보토니에의 마법사들을 또 한 차례 휩쓸었다.
“모든 일에는 끝이 있기 마련입니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조금 지친 기색으로 말을 마친 유안의 시선이 우뚝 솟은 디오니스의 궁에 잠시 닿았다 떨어졌다.
* * *
“할아버지.”
방에 난 큰 창으로 각 국경에 밀집되는 이들을 바라본 아한이 가스트를 부르자 그가 흐린 눈으로 손에 마력을 집중하며 답했다.
“그래, 이제 해야겠구나.”
“만약. 아주 만약 저들이 각 국경의 숨겨진 문을 찾아낸다면… 그래서 모든 국경에서 전쟁이 시작되면 내 지시가 없어도 디오니스에 결계를 발동해.”
전쟁 시작 전 르베나의 말을 되새긴 가스트의 손을 지나 전신에서 회색의 마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를 본 아한의 시선이 커다란 마석 옆에 있는 ‘다니아’에 향했다.
주변의 수많은 마법에 반응이라도 하는지 작게 몸을 떠는 달걀 모양의 그것을 아한이 손에 쥐었다.
“르베나 누나를 지켜줘. 제발.”
그 순간 아한의 손에서도 선명한 녹색의 마력이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