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제4장. 르베이나 (58)
루가 검을 뽑자 그대로 고꾸라진 르베나의 몸을 보며 루는 황홀했다.
이제 눈만 깜빡이면 되는 그 찰나, 저 몸이 제 것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한 번, 두 번 눈을 깜빡인 순간이었다. 움찔, 르베나의 몸이 움직였다.
“하아… 팅!”
그리고 힘겹게 부른 그녀의 목소리와 동시에 르베나의 품에서 나온 팅이 보석 같은 눈물을 흘리며 그녀의 상처를 치유하기 시작했다.
“티잉… 티이잉.”
눈물을 그치지 못하는 팅을 보고 힘없이 웃은 르베나. 하지만 그 장면을 굳은 채 보는 루의 시선은 공포와 충격으로 얼룩져 갔다. 팅이 르베나에게 마력을 준 지 얼마 되지 않아 르베나가 다시 일어섰기 때문이다.
“무슨……! 왜?”
벌써 몸이 바뀌어도 열 번은 바뀌었을 시간. 어째서 그대로인 건지, 루가 경악한 그 순간. 칸이 서둘러 르베나에게 다가와 미리 준비해놓은 듯한 포션을 먹이며 말했다.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말아라. 부탁이다, 르베나.”
딸의 고통에 숨이 넘어갈 듯 고통스러워하던 조금 전과는 달리 한결 나아진 목소리로 칸이 말하자 르베나가 힘겹게 웃으며 말했다.
“약속할게요.”
르베나의 말에 유안 역시 깊이 한숨을 내어 쉬며 말했다.
“제가 가담한 걸 유파시드께서 아시면 제 목을 날리실 겁니다.”
그의 말에 한 번 웃어 보인 르베나와 거짓말처럼 편안한 얼굴의 주위 사람들을 보며 경악한 건 오직 루뿐이었다. 곧 칸이 어느 정도 회복된 르베나를 마저 살피고는 루를 보며 서릿발 같은 시선으로 말했다.
“너에겐 안타깝게도 핑츠잎에는 숨겨진 비밀이 있다.”
칸의 말에 멍하니 얼빠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 루에게 그가 이어 말했다.
“그것은 요정들의 열매인 그레이풀로 해독이 된다는 것이다.”
칸의 말에 루의 시선이 폭풍을 만난 것처럼 떨려왔다.
“아니… 야,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어디에도 그딴 얘기는 없다고!!”
“없겠지. 이건 요정들만이 아는 이야기니. 흑마법에 물든 너희 따위는 절대 알 수 없는.”
칸의 말에 어느새 먼지를 툭툭 털고 일어난 르베나가 덜덜 떨고 있는 루를 보며 말했다.
“네가 첩자라고 확신한 뒤 네 꿍꿍이가 뭘까 생각했지. 그래서 루드에게 부탁했다. 너에 관한 모든 걸 알아봐 달라고. 그래서 알게 됐지. 네가 몸을 바꾸기 전부터 오랜 시간 그 사람의 곁을 지켰다는 사실을. 핑초잎을 이용해.”
르베나의 말에 어느새 다가온 아를이 그녀의 몸을 살피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 르베나 제발!! 알고 있어도 힘들어.”
아를의 말에 루가 눈을 크게 뜨자 그가 루를 서늘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막사에 있기 싫다며 진영에 나오겠다는 너를 보며 르베나가 그러더군. 분명 몸을 바뀌기 위해 자신의 곁에 있으려고 하는 거라고. 하지만 그레이풀로 이미 해독되어 몸이 바뀔 일은 없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나서지 말라고. 그것만 아니면 너는 이미 백 번도 더 내 검에 죽었을 거야.”
진심이 가득한 아를의 말에 루가 살짝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그것 역시 아벨디온에 의해 막혀 버렸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덜덜 떨며 루가 르베나를 바라보자 붉은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모두 너의 말이 들리지 않는 척했지만 다 들렸다. 단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말이야. 우린 알고 싶었을 뿐이거든. 너와 파벤더가 ‘다니아’로 궁극적으로 이루고 싶은 게 뭔지.”
조금 전 르베나가 죽을 줄 알고 광기에 휩싸여 이런저런 얘기를 모두 털어놓은 자신을 떠올린 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리고 르베나의 주위로 몰려든 모든 이들의 시선이 더없이 두렵게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확인한 그들의 눈에 섞인 것은 엄청난 크기의 분노와 찾기 힘들 만큼의 동정이었기에.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아니야.”
“뭐가 아니라는 거지?”
“우리의 준비가… 나는 위대한 그의 옆에……!”
르베나의 시선에도 지독한 동정이 서린 순간, 루는 반사적으로 악을 썼다.
“아니야! 그렇게 보지 마!! 난… 파벤더 님의 여자야, 그의 여자라고!!”
고개를 젓던 루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며 외쳤다.
“난 영원히 그의 여자야, 파벤더 님!! 구해 주……! 쿨럭.”
하지만 그녀의 말은 하늘 끝까지 울려 퍼지지 못했다.
콱! 푸욱……!
문득 느껴진 이상한 감각에 아래를 내려다 본 루의 시선에 긴 두 자루의 검이 보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을 앞, 뒤에서 꿰뚫은 검.
“이게… 쿨럭, 무슨……?”
그리고 놀란 루의 시선이 뒤를 향하자 날것의 분노가 새겨진 표정의 후벤이 보였다. 그리고 다시 앞을 보자 그곳엔 그녀의 심장을 찌른 채 차가운 눈을 빛내는 아를이 서 있었다.
하지만 루는 그런 것에 놀란 게 아니었다. 정작 그녀가 놀란 것은…….
“파벤더 님……?”
분명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을 그가 그녀가 검에 찔린 이 순간까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순간 그녀의 몸이 서서히 땅으로 허물어졌다. 동시에 후벤과 아를이 뽑아낸 검에서는 붉은 선혈이 허공으로 흩뿌려졌다. 쿵. 바닥에 쓰러진 시야로 다가오는 르베나가 보였다. 그리고 가만히 무릎을 꿇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르베나가 말했다.
“세상은 결코 너와 파벤더의 뜻대로 되지 않을 거다. 우리가 그렇게 만들 테니.”
하지만 이내 조금 안타깝게 바뀐 시선은 아주 작은 안타까움을 담은 채 다시 그녀를 향했다.
“하지만 너에게 일어난 그 모든 불행에 대해 진심으로… 안타깝게 생각한다, 루.”
순간 르베나의 말에 루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 순간 하염없이 차오른 눈물이 툭, 눈가를 흘러 땅에 닿았을 때. 그녀의 눈에 오직 하나의 장면만이 떠올랐다.
어두운 밤을 밝히던 달. 천지에 가득했던 루타 잎. 강하고 독한 냄새, 피에 젖은 손. 그리고
“파벤… 더…….”
툭, 그 순간 르베나를 보고 무언가 속삭이던 그녀의 눈동자에서 모든 생명력의 힘이 사라져 버렸다.
* * *
“루……? 루!!!”
하늘에서 땅을 보며 절규하던 파벤더가 제 몸을 덮친 올가미 모양의 금빛 신력에서 발버둥 치며 외쳤다.
“이거 놔!! 놓으란 말이다!!!”
흡사 악귀처럼 소리치던 파벤더가 맨손으로 제 몸을 결박한 신력을 잡아 뜯으려 하자 그의 손에서 치지직-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루를 부르며 루시드가 구현한 신력의 올가미를 찢으려 했다. 이를 본 루드바하가 서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르베나는 약하지 않다. 그러니 난 그녀가 루를 죽이는 순간을 기다렸을 뿐이다. 그 순간 흔들릴 널, 잡기 위해서.”
곧 루드바하의 몸에서 더 환한 금빛의 신력이 피어올랐고 루시드의 몸에서 뻗어나간 신력의 올가미가 더욱 강하게 파벤더의 몸을 옥죄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처절하게 울부짖고 있었다.
“루!! 안 돼, 안 돼!!!”
당장 그녀의 곁으로 가기 위해 발버둥 치는 그를 보며 루드바하가 읊조렸다.
“그러니 남의 연인에 대해 함부로 말할 때는 그만한 각오를 했어야지.”
루드바하의 속삭임과 동시에 루시드가 땅으로의 텔레포트를 준비했다. 파벤더를 데리고 아래로 내려가기 위해서였다.
팡!!!“파벤더 님!”
그 순간, 누군가의 부름과 동시에 루드바하와 루시드에게 매서운 공격이 날아왔다. 동시에 수십 명의 ‘보토니에’가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루드바하와 루시드의 신력이 느슨해졌고 흑마법사들은 기다렸다는 듯 파벤더의 몸을 구속하던 신력을 끊어냈다.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그리고 뜻 모를 말과 동시에 파벤더가 싸늘하게 누워 있는 루의 시신을 내려다 보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 다시 쇄도해 오는 루드바하와 루시드의 공격에 파벤더는 자신의 마법사들과 순식간에 자취를 감춰 버렸다.
“아버님, 르베나에게 가 주십시오!”
루시드에게 그 말을 남긴 루드바하 역시 파벤더를 따라 사라지고 없었다.
“르베나.”
아를의 부름에 한동안 죽은 루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르베나가 고개를 들었다. 아를이 뜨거운 손이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레 짚은 탓이었다.
“자책하지 마. 이건 전적으로 파벤더와 루의 선택이었어.”
아를의 말에 르베나가 겨우 루의 시신에서 눈을 떼며 말했다.
“알아. 이게 최선이었다는 거.”
그럼에도 르베나의 시선이 어둡게 가라앉아 아를은 그녀에게서 쉽게 눈을 떼지 못했다.
그때였다.
“르베나 왕녀님!”
루드바하와 파벤더를 상대하던 루시드가 내려와 급히 그녀를 부른 것이다. 이에 르베나가 곧장 그를 마주보니 루시드가 말했다.
“파벤더가 그를 구하러 온 ‘보토니에’와 텔레포트로 사라져 유파시드께서 뒤쫓아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뭔가 따로 계획을 세우는 것 같습니다.”
루시드의 말에 르베나가 바로 되물었다.
“계획이요?”
“예, 그들이 시간이 다 됐다고 하더군요. 유파시드께서 돌아와 봐야 정확히 알겠지만 혹시 모르니 따로 알아보심이 좋을 듯합니다.”
루시드의 말에 르베나가 곧장 아벨디온 몇 명을 정찰 보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본 르베나의 눈에는 여전히 디오니스의 국경을 뚫기 위한 ‘보토니에’의 흑마법사들과 몬스터들, 그리고 그들을 막기 위한 디오니스의 치열한 싸움이 보였다. 곧 그곳으로부터 시선을 돌린 르베나가 모여든 이들에게 말했다.
“저는 잠시 정찰을 나간 아벨디온을 기다릴 테니 모두는 다시 전투에 임해 주십시오.”
르베나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흩어지려 했다. 미리 얘기를 해두긴 했지만 그럼에도 고통스러워하는 그녀의 모습에 생각보다 많은 주요 인력이 모여든 탓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들려온 목소리가 몇 걸음 떼지 못한 그들의 발목을 붙잡고야 말았다.
“젠장, 르베나!”
바흐란의 다급한 부름에 그녀의 시선이 바흐란을 향했다가는 허공을 향해있는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곧 그녀의 시선이 잘게 흔들리고 말았다.
“저건… 공중형 몬스터?”
“근데 저것들이 왜 여기가 아니라 다른 곳으로……!”
마찬가지로 허공을 바라본 다한과 유안의 물음에 대한 답이 들려온 건 그 순간이었다.
“르베나! 큰일입니다.”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루드바하가 곧장 그녀에게 다가오며 급히 말했다. 그러면서도 루에게 다친 부분이 제대로 아물었나 확인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파벤더가 조금 전 휴전을 핑계로 시간을 번 사이, 다른 세 곳의 국경 문을 모두 찾은 모양입니다.”
이어진 루드바하의 말에 르베나의 안색이 차갑게 굳어졌다. 남쪽 국경의 전쟁만으로 벅찬 이때, 다른 세 곳의 국경이 모두 뚫려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