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제4장. 르베이나 (57)
르베나의 떨림을 느낀 루가 좀 더 은밀하게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힘들었어요. 그게 가진 고유한 씁쓸함 때문에 우리 왕녀님께서 기가 막히게 그게 들은 것만 피해 먹어서. 하지만 정말 우습게도 딱 하나에 들어간 건 모르더라고.”
루의 말에 르베나의 시선이 다시 한번 깨달음을 가지고 세차게 흔들렸다. 그러자 르베나의 귓가에 숨결이 닿을 듯 더 다가온 루가 웃는 입바람이 느껴졌다.
“맞아요, 밀크티. 우리 왕녀님이 제일 좋아하는 내 특제 밀크티. 후후. 아무것도 모르고 매일 마시던 왕녀님 귀여워 죽는 줄 알았잖아요. 휴- 빨리 가지고 싶어요. 당신의 건강하고 아름다운 몸도, 냉정한 듯 매혹적인 얼굴도. 그 모습으로 빨리 나의 파벤더 님 곁에 서고 싶어요. 그리고.”
루가 즐거워 죽겠다는 듯 마저 입을 열었다.
“당신의 강한 마력으로 내게 걸린 흑마법을 끊어 내고 그의 아이를 가질 거야.”
쿵. 루의 마지막 말에 르베나의 눈앞이 순간 캄캄해졌다.
“내 몸으로 뭘… 가져?”
그녀의 분노가 온몸으로 전해져 오는게 재밌어 루가 깔깔 큰소리로 웃고는 말했다.
“말했잖아요. 영혼을 옮기는 이 흑마법 때문에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하지만 당신의 육체라면. 그 강한 마력으로 나도 꽤 오래 살 수 있잖아. 그러니까 그 몸으로 들어가 흑마법을 끊어내고 그의 아이를 가질 거야.”
루의 말을 들은 르베나가 본능적인 거부감에 몸을 움직였다.
“흡!”
하지만 그 순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몰려오는 고통에 르베나의 몸이 잘게 떨려왔다. 아마 칼에 담긴 흑마법이 르베나의 마력과 마찰하는 순간 몰려온 통증 같았다. 다르게 말하자면 르베나가 몸을 조금 더 움직이면 두 힘의 마찰로 몸이 폭발할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이에 루가 르베나의 어깨에 머리를 콩 기대며 말했다.
“당신은 원래 우리 계획에는 있지도 않던 꼬맹이였어요. 적당히 학대나 받으며 자멸의 길로 걸어 갔어야 했죠.”
엄청난 고통에도 불구하고 루의 목소리가 르베나의 귓가로 선명하게 파고들었다.
“그럼 우리는 당신을 적당히 이용해 멋진 판을 만들 수 있었어요. 그리고 아주 쉽게 ‘다니아’를 손에 넣을 수 있었겠죠.”
루의 말에 르베나의 머릿속, 이전의 삶이 떠올랐다. 루의 말대로 자멸의 길을 걸어가던 르베나. 후츠 백작의 속삭임에 가스트와 후벤을 저버리고 연합군과의 전쟁에 홀로 선 그날.
모든 디오니스가 그녀에게 등 돌린 그때.
“그것조차… 계획된 거였나?”
르베나의 힘겨운 목소리가 흘러나옴과 동시에 그녀의 발밑이 붉은 피로 젖어 들었다. 그러자 루가 잠시 고개를 갸웃하고는 말했다.
“그것조차? 뭐 아무튼 맞아요. 그게 원래 우리 계획이었어요. 그런데 웬걸. 요 귀여운 왕녀님이 스스로 일어나잖아. 그 시궁창 같은 현실에서 멋지게, 그리고 아름답게. 그래서 사실 좀 궁금했어요. 당신이.”
단순한 장기 말 중 하나였던 르베나가 바르게 성장하는 모습에 파벤더는 점점 그녀에게 흥미를 가졌다.
루는 그게 무척 싫었지만 동시에 궁금해졌다. 르베나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 자신은 이겨내지 못한 그 현실을 이 작은 계집은 어떻게 이겨냈는지. 그래서 파벤더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시녀가 되어 지켜보고 싶어졌다.
“처음엔 얼굴만 볼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귀엽더라고. 꼴에 공주라고 왕자한테 잡힌 시녀인 날 구해 주는 모습이. 그 뒤로도 안 그러는 척 날 챙기는 모습이. 그리고 그런 너의 곁에 자꾸만 몰려드는 사람들이.”
착각하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들의 곁에 머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어차피 파벤더와 그녀는 더 오랜 시간을 다른 이의 몸으로 살아갈 수 있으니 우리의 계획을 조금 미루자고 말할까도 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렸지. 너에게 다가오는 유파시드를 보며. 너희를 응원하는 사람들을 보며. 왜 난 안됐던 걸까. 난 그냥 힘없는 여자였고 가족 같지도 않은 것들에게 팔려 간 죄밖에 없는데. 인간만도 못한 남편의 놀음 빚과 그들의 추잡함을 내 몸으로 대신했어야 하는 삶이었을 뿐이데. 그런데 넌 응원받는 그 사랑이… 왜 나에겐 안 되는 거였느냐고!!!”
잔잔한 목소리로 시작한 그녀의 말은 비명 같은 외침으로 끝났다. 그리고 르베나의 배에 꽂혀있는 칼날을 따라 루의 분노와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르베나는 그 끔찍한 고통에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기절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사랑하고 싶었을 뿐이야. 응원받고 싶었을 뿐이야, 우린!! 하지만 잘난 그것들은 그조차 안 된다고 했어. 날 포기하라고 했어!!!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게?”
르베나의 주위에 몰려들어 자신을 찢어 죽일 것처럼 바라보는 이들을 훑어본 루가 히죽 웃었다.
“그에게 흑마법에 대해 말했어. 낮에도, 밤에도. 그의 책상에도, 그의 침대에서도 끊임없이 말하고 또 말했지. 그들이 왜 적이어야 하는지 세츠들의 정의가 정말 맞는 건지. 그리고 그는 똑똑한 사람이었어.”
루의 뒤는 듣지 않아도 모두가 아는 내용이었다. 루도 그걸 아는지 더 이상의 말을 늘어놓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한테 줘. 마력으로 가득 찬 너의 몸. 그 몸으로 나도 그의 곁에 설 거야. 그리고 네 속에 내가 있다는 걸 아는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나면. 모두 내가 가질 거야.”
순간 르베나의 귓가에 가까이 붙어선 루의 숨결이 황홀함에 떨려왔다.
“당신의 아버지도, 당신의 할아버지도, 당신의 기사단도… 크크크. 디오니스도, 왕녀도. 모두, 모두 내가 가질 거야!”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게 속삭이는 루의 목소리에 고통도 잊은 채 르베나가 생각에 잠겨 들었다.
다른 것보다 씁쓸한 맛이 더 강해 입맛에 맞았던 루의 밀크티. 오늘 전쟁이 시작되기 전까지 살뜰히 챙기던 그것이 몸을 바꾸기 위한 그녀의 오랜 준비였을 줄이야.
곧 르베나가 출혈로 인해 흐려진 시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잔뜩 긴장한 채 르베나와 루를 바라보는 다한과 라웅, 그리고 바흐란.
그들의 곁에서 당장이라도 루를 죽일 듯 온몸 가득 분노를 표출하는 아를과 칸. 또 언제나 차분하라 말했건만 눈물마저 글썽이는 아벨디온 기사단까지도.
루만 죽이는 거라면 쉬울 텐데. 르베나의 배에 꽂혀 있는 루의 칼 때문에, 그것에 담긴 흑마법 때문에. 행여나 르베나가 다칠까 꼼짝도 못 하는 사람들.
“저 사람들을… 갖겠다고?”
작은 르베나의 말소리에 루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응. 이 칼은 네 몸의 마력을 못 움직이게 구속할 거거든. 덩달아 계속 피가 흐르게 하지. 아, 느끼고 있어? 아무리 너라도 너무 힘들지? 크크크”
조금 더 다가오는 루의 움직임에 르베나가 고통에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루의 말대로 칼에는 마력 구속의 기능까지 있는지 몸 안의 마력들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고, 흐르는 피로 이미 바닥은 흥건히 젖어갔다. 눈앞마저 가물거리고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르베나!!”
르베나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가는 모습에 칸이 다가오려 했지만 르베나가 고개를 저으며 천천히 말했다.
“괜… 찮아요, 하… 칼에, 흑마법이… 내 마력과… 충돌…….”
힘들어 제대로 잇지 못하는 말에도 칸은 르베나의 말을 모두 알아들은 듯 다른 이들에게 말했다.
“르베나가 움직이면 저 검에 깃든 흑마법과 르베나의 마력이 충돌해 자칫 폭발할지도 모르는 거 같군요.”
참담함이 깃든 칸의 말에 아를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리고 출혈이 멈추지 않는 것도. 저 검 때문이고요.”
아를의 말에 칸이 고개를 끄덕이자 유일하게 침착한 유안이 루와 르베나를 보며 의아한 듯 물었다.
“하지만 이상합니다. 만약 저 시녀, 아니 루라는 사람의 목적이 왕녀님을 죽이려는 거라면. 바로 심장을 찌르면 될 것을 왜 저러고 있는지.”
유안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루에게 향했다. 그리고 지척에서 오고 간 그들의 대화를 들은 루가 르베나에 더욱 바싹 다가가 말했다.
“저 사람들은 우리 얘기가 안 들리나 봐, 크크. 이것도 파벤더님의 선물인가? 그러니까 네가 피를 많이 흘려서 기절하면 난 곧바로 그 몸으로 들어가고 넌 내 몸으로 들어오게 될 거야. 그럼 저들이… 크크큭. 내 몸에 있는 널 공격하겠지? 그렇게 네가 죽으면… 다 내 거야.”
광기와 혼돈에 찬 루의 눈빛이 르베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부. 이 모든 사람이, 이 모든 세상이… 나와 파벤더 님의 것이 될 거야.”
계속되는 루의 말에 계속 버티던 르베나의 몸이 휘청였다. 하지만 마법의 힘인지 루가 그녀를 가뿐하게 지탱하자 그 순간 그녀의 손목을 빠르게 잡아챈 르베나가 말했다.
“그런다고 모든 세상이 네… 것이 되지는 않아.”
가뿐 숨을 내쉬며 뱉는 르베나의 말에 루가 답했다. 어느새 그녀의 눈동자에는 약간의 이지가 돌아와 있었다.
“알아, 하지만 더 이상 나와 파벤더 님을 욕하는 사람들은 없겠지. 왜냐하면 우리에게 ‘다니아’가 올 테니까. 그것으로 세상의 근간을 없애는 거야. 세츠의 정의와 베이라의 한계를 없애고, 혼란한 세상 위에 우리가 군림하는 거. 전설 속의 파벤더가 죽은 유파시드의 자리를 대신해 세상을 돌보고 디오니스의 왕녀, 르베나 당신의 몸을 얻은 내가 당당히 그의 옆에 서는 거지.”
마치 어딘가 존재하는 이상향에 닿기라도 한 걸까? 루의 눈빛이 반짝이는 듯했다.
“그렇게 우리를 반대했던 모든 이를 세상에서 지우고 우리만의 세상을 만드는 거.”
루의 말에 르베나가 힘없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결국에 파벤더는 루드의 자리를, 넌 내 자리를 빼앗아 세상을 혼란에 빠트리겠다는 거네.”
르베나의 말에 루가 만족하는 얼굴로 웃었다.
“맞아, 이 세상은 그래도 돼. 혼란에 빠져 울고 고통스러워해도 돼. 내가 느낀 것처럼 말이야.”
순간 루가 르베나의 배에 꽂힌 검을 집고 중얼거렸다.
“이제 거의 다 됐어, 넌 곧 기절할 거고 너와 난… 드디어 몸이 바뀔 거야. 즐거웠어, 르베나 왕녀.”
그 순간이었다. 르베나의 눈앞이 까맣게 변하며 그녀의 몸이 순식간에 허물어진 것은. 그리고 즐거움에 크게 미소 지은 루가 르베나의 몸에서 검을 뽑아낸 것과 동시에 쓰러졌던 르베나가 다시 눈을 뜬 것은.
* * *
“됐다, 됐구나!! 하하하.”
루드바하와 루시드를 결박한 채 지상을 내려다보던 파벤더가 크게 미소 지었다.
루가 칼을 뽑아낸 것과 동시에 바닥에 쓰러져 있던 르베나의 몸이 다시 움직인 걸 확인했기 때문이다.
“제대로 몸이 바뀐 모양이군.”
흥분한 듯 번들거리는 시선으로 아래를 바라보던 파벤더가 창백하게 질린 루드바하와 루시드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이제 저 여인의 몸은 내 것이다. 아니, 나와 루의 것이지. 루가 제 몫을 해냈으니 이제 나도 내 몫을 해야겠구나. 루드바하 라 유파시드.”
그의 부름에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루드바하의 눈이 그를 향했다. 그러자 파벤더가 만족스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동안 수고했다. 내 자리를 지키느라.”
그와 동시에 루드바하와 루시드를 결박하던 검은 줄에서 빛이 뿜어나오기 시작했다. 아주 검고 불길한, 보기만 해도 모든 암흑이 생겨날 것 같은 색으로.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그때, 파벤더가 루드바하와 루시드의 신력을 남김없이 흡수하려는 찰나 들려온 말에 그가 여유롭게 루드바하를 바라보았다.
“마지막 발악은 접어두게, 유파시드여.”
그리고 파벤더가 탐욕스럽게 그들을 바라본 순간이었다.
“파벤더 님!!!”
지상에서 모든 절규를 담은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